국정농단으로 기소된 최순실씨가 지난 2월13일 오후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뒤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19일 만에 열린 재판이었다. 20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형사대법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이 시작됐다. 출석 여부를 묻는 형사22부 재판장의 질문에 조현권 변호사가 “다섯 명 모두 출석했다”고 말했다. 증인신문에 따라 둘, 셋씩 나눠 재판에 출석했던 박 전 대통령의 국선변호인 5명이 모처럼 함께 변호인석에 나타났다.
이날은 최순실씨의 증인신문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13일 같은 재판부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최씨는 하루 전날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당초 오늘 10시부터 최서원(최순실씨는 최서원으로 개명했기 때문에 법정에서 그의 이름은 모두 ‘최서원’으로 불린다) 증인신문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저께 자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습니다. 자신의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나와서 진술할 수 없다는 취지입니다. 증인신문 예정됐다 변경된 것이 검찰에서 여러 차례인데 증인신문 유지 여부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김세윤 부장판사)
“최서원 증인이 출석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고 신속한 절차 진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증인신청을 철회하고자 합니다.(검사)
“저희도 철회합니다.”(조 변호사)
“오늘은 검찰이 제출한 서증(문서로 된 증거) 조사를 진행하겠습니다.”(김 부장판사)
박 전 대통령의 1심 마지막 증인이 될 뻔했던 최씨는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40년 지기’ 재판에서는 증인석에 서지 않게 됐다.
“주된 책임은 대통령과 피고인”
재판부가 같고 혐의 대다수가 겹치는 탓에 최씨의 1심 선고는 박 전 대통령 1심 선고의 ‘스포일러’였다. 최종 결말(양형)만 빼면 ‘반전’이 이미 다 드러난 셈이 됐다. 스포일러가 공개된 마당에 개봉을 늦출 필요는 없었다. 김 부장판사는 이날 ‘최후변론’, ‘재판 종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7~28일 재판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는데 확인해보니 28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사건 준비기일이 대법정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날은 재판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아서 오늘과 내일 검찰 서증조사를 하고 26일 27일 남은 서증조사와 최종변론 절차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1일 열린 재판에서는 검찰이 27일 오후 구형을 하기로 했다.
“최종변론 예상시간 검토해서 말씀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김 부장판사)
“30분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검사)
“저희는 2시간 정도.”(조 변호사)
“최종변론 하실 때 구두로 하실 건가요?”(김 부장판사)
“네.”(조 변호사)
“27일에 6시간 확보 가능한데 오전부터 먼저 검찰의 남은 서증조사 하고, 이어서 최종변론 절차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김 부장판사)
27일 검사의 구형과 변호인의 최후변론이 진행되면 박 전 대통령이 기소된 지 316일 만에 1심 심리가 끝나게 된다. 최씨는 결심 이후 약 한달 뒤에 선고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 재판도 함께 진행해야 했고, 상당 부분 혐의가 겹치는 최씨의 판결이 나온 상황이라 이번 구형 뒤 결심까지는 한달보다는 적게 걸릴 것으로 보인다. 또 박 전 대통령의 1심 구속 재판 기한이 올해 4월16일이라 3월 중에는 1심이 선고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의 국선변호인들은 사실상 답안지를 받은 상태였지만 시험을 포기하지 않았다. 재판부가 인정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의견서, 유죄로 인정된 삼성 승마지원 뇌물은 단순 뇌물죄가 아니라는 의견서, 말값도 뇌물이라고 인정됐지만 최씨가 말 소유권을 달라고 한 건 아니었다는 의견서 등이 재판을 쉬는 동안 꾸준히 제출됐다. 20일 오전 재판을 마치고 최씨의 1심에 대한 평가를 묻는 말에 강철구 변호사는 “뭐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최씨와는) 입장이 좀 다르니까요. 저희는 계속해봐야죠”라고 말했다.
국선변호인들의 희망과 달리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가능성은 적다. 똑같은 증거, 증인을 근거로 한 차례 판결을 내린 재판부가 새로운 증거, 증인 없이 같은 사안에 대해 달리 판단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최씨의 20개 혐의 중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한 혐의는 13개고, 13개 중 삼성 관련 220억여원의 제3자 뇌물수수 혐의(미르·케이스포츠재단,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를 뺀 11개가 유죄 선고를 받았다.
최다 공범에 걸맞게 488쪽에 달하는 최씨의 1심 판결문에는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1244번 등장한다. 최씨의 양형 이유 부분에서 재판부는 “국정농단 사건의 주된 책임은 헌법상 부여된 책무를 방기하고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위와 권한을 사인에게 나누어준 대통령과 이를 이용하여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추구한 피고인에게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다.
13일 오후 2시10분 형사대법정 피고인석에 최순실씨, 안종범 전 수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섰다. 최씨는 지난해 5월23일 박 전 대통령의 첫 재판에 공동 피고인으로 서서는 “이 재판장에 40년 동안 지켜본 박 대통령을 나오게 해서 너무 많은 죄인인 것 같다. 박 대통령께서는 절대 뇌물이나 이런 걸 가지고 나라를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울먹거렸고, 12월14일 결심에서 검찰이 징역 25년을 구형했을 때도 “이런 모함과 검찰의 구형에 사회주의보다 더한 국가에서 살고 있나 생각했다”며 억울해했고 휴정시간에는 비명도 질렀다. 그러나 오후 4시32분까지 2시간 넘게 진행된 재판에서 최씨는 울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대신 오후 4시8분께 최씨의 변호인 이경재 변호사가 말했다.
“두어 시간 됐는데 최서원이 신체적으로 고통스러워하거든요. 좀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최서원 양형 이유를 맨 마지막에 설명하겠습니다. 다른 피고인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쉬었다 오시죠.”(김 부장판사)
“대통령을 올바르게 보좌할 책무가 있음에도 대통령과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전국경제인연합회 및 기업들로 하여금 재단 설립과 모금 출연을 강요하고, 박채윤, 김영재 부부로부터 4949만원의 뇌물을 수수함으로써 전체 국정농단 사건의 단초의 일부를 제공하여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는 안 전 수석과, “뇌물 범죄는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해 엄히 처벌할 필요성이 있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최상위층에 있는 대통령과 재벌기업 회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신 회장의 양형 설명이 끝나갈 무렵 최씨는 돌아왔다. 그리고 김 부장판사는 오후 4시15분부터 마지막으로 최씨의 양형 이유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과의 오랜 사적 친분관계를 바탕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하여 전경련 및 기업들로 하여금 재단 설립 관련한 모금·출연을 하도록 강요하고, 여러 차례 걸쳐 기업들에게 피고인이 설립·운영을 주도하거나 친분관계 있는 회사 등과의 납품, 에이전트 계약 등 체결, 특정인에 대한 채용 및 승진, 광고 발주, 금전 지원 등을 요구하여 기업들로 하여금 이를 이행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또한 삼성그룹 및 롯데그룹으로부터 합계 140억원이 넘는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였고, 에스케이(SK)그룹에 대하여는 89억원의 뇌물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그중 딸인 정유라에 대한 승마 지원과 관련하여 삼성그룹으로부터 수수한 합계 약 72억원 상당은 실질적으로 피고인에게 그 이익이 귀속되었다고 판단됩니다. 뇌물수수를 은폐하기 위하여 관련 서류를 허위로 작성하는 등 범죄수익 발생 원인 및 처분에 관한 사실을 가장하고, 피고인 등에 대한 검찰 수사 및 언론의 의혹 보도 등이 계속되자 김영수 등에게 컴퓨터 등 증거를 인멸할 것을 교사하기까지 하였으며, 다른 회사가 인수를 추진 중인 광고회사의 지분을 빼앗으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하였습니다.
피고인의 위와 같은 범행 및 광범위한 국정 개입 등으로 인하여 국정질서는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 결정으로 인한 대통령 파면’이라는 사태까지 초래되었는바, 국정농단 사건의 주된 책임은 헌법상 부여된 책무를 방기하고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위와 권한을 사인에게 나누어준 대통령과 이를 이용하여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추구한 피고인에게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피고인은 국정농단 의혹 사건이 불거진 후 국민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국회에서 열린 국정조사특별위원회로부터 2회에 걸친 증인 출석 및 3회에 걸친 동행명령 요구를 받고도 정당한 이유 없이 이에 응하지 않아 위 사건의 진상규명을 바라는 국민들의 간절한 여망을 외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범행의 횟수와 내용, 피고인이 취득한 이익의 규모, 피고인의 범행으로 초래된 극심한 국정 혼란과 그로 인하여 국민들이 느낀 실망감 등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은 그 죄책이 대단히 무겁습니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하며 이 사건 범행을 모두 부인하면서, 이 사건이 ‘기획된 국정농단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그 책임을 주변인들에게 전가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면, 피고인에 대하여는 그 책임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합니다.
다만, 피고인이 1994년경 건축법 위반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외에 아무런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고, 롯데그룹으로부터 받은 70억원은 반환되었으며, 에스케이그룹과 관련된 뇌물 범행은 요구에 그쳤습니다. 또 포스코그룹과 관련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및 강요 범행에 따른 펜싱팀 창단 등은 실제 창단 등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고, 포레카 인수와 관련된 강요 범행은 미수에 그쳤습니다.
이와 같은 피고인에게 불리하거나 유리한 주요 정상, 그 밖에 피고인의 연령, 가족관계, 환경, 건강상태, 범행의 경위, 범행 후의 정황 등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제반 양형 조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피고인에 대하여 주문과 같이 형을 정합니다.
피고인 최서원을 징역 20년, 벌금 180억원에 처한다. 피고인이 위 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하는 경우 3년간 피고인을 노역장에 유치한다. 피고인으로부터 72억9427만원을 추징한다.”
변호인 “최선 다하겠다”지만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 2018고합20 재판을 시작합니다. 피고인 박근혜씨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고 출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순실씨의 선고 하루 전날인 12일, 형사32부(재판장 성창호)는 서울중앙지법 형사대법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새 재판 첫 공판준비기일을 가졌다. ‘국정농단’ 재판이 지나간 서울중앙지법에는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특수활동비 뇌물’ 사건 재판이 한창이다. 박 전 대통령도 피해가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5월~2016년 9월까지 남재준·이병기·이병호 국정원장에게서 국정원 특활비 35억원을 받고, 이병호 국정원장이 이원종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1억500만원을 주도록 한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의 뇌물·국고 등 손실, 업무상 횡령)로 1월4일 추가 기소됐다. 피고인은 없는 피고인석에는 국선변호인인 정원일, 김수연 변호사가 있었다.
“기소된 내용 관련해서 피고인 측 입장이 어떤지 변호인께서 의견 말씀해 주십시오.(성창호 부장판사)”
“이 사건 변론 맡고 있는 정원일 국선변호인입니다. 공소사실 인부 의견에 대해서는 아직 저희가 직전 대통령님과 접견이 허용되지 않아 보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이 끝난 뒤 정 변호사는 “(박 전 대통령의 접견 거부 사유에 대한) 답변을 못 받았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어 “검찰은 엘리트팀을 구성해 수사 기간까지 걸쳐서 2년여 동안 재판을 준비해 코끼리를 그려놓고 싸우는데 저는 이제 3주 남짓 돼서 코끼리 다리도 그리지 못한 채 싸워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는 변호인 입장에서 혼을 다해서 변론에 임하겠다”며 변론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였다. 두번째 공판준비기일은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결심이 예정된 27일 다음 날 오후 2시 열린다.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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