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법정 다큐 수인번호 503
⑤ 박근혜의 수족들 연일 유죄
“새벽 2시에 유라가 나가서 특검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 밝혀주셔야 합니다. 걔를 너무 협박하고 압박해서 2살 아들을 두고 나간 것 아닌가요. 재판부에서 좀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12일 정유라(21)씨의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 ‘깜짝 증언’의 여파는 박근혜(65) 전 대통령과 최순실(61)씨 재판에도 미쳤다. 최씨는 정씨 증언이 있은 지 5일 만인 17일, 법정에서 발언권을 얻고 문제를 제기했다. 정씨가 출석한 이 부회장 재판이 아닌, 자신과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였다. 최씨는 재판장인 김세윤 부장판사에게 ‘정씨 출석의 경위를 밝혀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불똥은 계속 튀었다. 최씨 쪽은 21일 이 부회장 재판 증인신문에 출석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씨 증언이라는 ‘돌발상황’이 발생한 만큼, 준비할 시간을 더 갖고 26일 이 부회장 재판에서 증언대에 서겠단 얘기였다.
“정유라 증언이 어머니가 인지한 객관적 사실과 상당히 다릅니다. 재판부에 문서송부촉탁 신청을 했고요, 왜 정유라가 변호인을 따돌리고 검찰에 협조했는지 파악하는 중입니다. (정씨 증언이) 이재용 재판에서 결정적 증언이기 때문에 저희는 많이 준비하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필요합니다.”(최씨 쪽 이경재 변호사)
이번에도 최씨를 달래는 것은 김세윤 부장판사 몫이었다. “최서원(최순실) 피고인도 알다시피, 통상 공판 절차를 다 마치고 피고인 신문을 마지막에 하잖아요. 그런데 최서원 피고인이 26일 증언하면, (이재용 등) 피고인 신문보다 최서원씨 증인신문이 늦어진다고 해요. 그래서 (이재용 등 사건) 재판부에선 최서원씨에 대한 증인신문 날짜를 좀 당겼으면 한다고 해요.” 예의 친절한 설명도 역부족이었다. 최씨는 “그쪽 사정은 제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해냈다. 이어 같은 말이 반복됐다. “새벽 2시에 애를 데리고 나가는 건 특검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잠을 못 잤어요, 정말.”
최씨는 결국 지난 26일 이 부회장 재판에 나갔지만, “(특검팀에서) 딸을 새벽에 데리고 가서 먼저 신문을 강행한 것은 제2의 장시호를 만들기 위한 수법이라고 생각해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증언을 거부했다.
내 재판 남 재판 없이 얽힌 피고인들
‘국정농단’ 재판에서 낡은 소식은 없다. 옆 재판부의 어제는 내 재판부의 다가올 미래다. 공범 관계이거나 혐의가 관련이 있는 피고인들이 서로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에서 ‘국정농단’ 관련 사건을 맡거나 진행했던 형사합의부가 8부에 이른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혐의만 13개에 달해 공범들 재판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뇌물 사건의 경우 ‘옆 사건 민감도’가 더 크다. 433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의 이재용 부회장과 이를 받은 혐의의 박 전 대통령 사건은 각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진동)와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가 심리를 맡았다. 검찰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함께 공소유지를 맡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뇌물’ 재판과 달리, 이 부회장 재판에서 검찰석에 앉은 건 특검팀이다. 피고인도, 기소주체도 다르지만 복잡한 법조계 원리를 알기 어려운 일반인들에게 이들은 ‘국정농단’이란 이름 아래 한데 엮인다. 4층 법정에서 일어난 공방이 3층 법정으로 옮겨오는 일도 허다하다. ‘강 건너 불구경’이 불가능한 재판이다.
근래 들어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 빈번히 호출된 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이 부회장 재판 증언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14일 이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삼성그룹과 이 부회장에게 ‘쓴소리’를 쏟아냈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조직이다”, “미전실은 대주주 일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대관업무 창구 역할을 하면서 금력 등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삼성과 어울리지 않는 구태의연한 조직이다”, “삼성그룹은 성공의 역설에 빠져 있다. (현재 삼성그룹 지배 구조를 유지하는 한) 이 부회장은 우리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경영자(CEO)가 될 수 없다.” 그는 과거 자신이 김종중 전 미전실 팀장 등 삼성 고위임원들로부터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런 진단을 내렸다고 했다.
그의 쓴소리에 진땀을 흘린 것은 이 부회장뿐만이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전직 미전실 임원들은 김 위원장의 법정 진술을 바탕으로 하는 특검팀의 질문 세례를 마주했다. 지난 25일 박 전 대통령 재판 증언대에 선 김 전 팀장이 수차례 입에 올린 말은 ‘오해’였다.
“김상조 교수는 특검 조사와 이재용 뇌물 사건 등에 증인으로 출석해 ‘해외 출장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아침 이재용, 최지성(전 미전실장), 장충기(전 미전실 차장), 김종중(전 미전실 팀장)이 모여 회의하면서 삼성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한다고 (증인에게) 들었다’는 취지로 증언했는데 이 내용이 맞나요?”(특검팀 파견검사)
“4명이 매일 아침 만나는 회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김 교수가 제가 한 이야기를 오해한 것 같습니다.”(김종중 전 미전실 팀장)
“김상조 교수는 또 ‘이재용 부회장이 아직 그룹 내 경영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40%는 본인이 결정하고 나머지 60%는 장충기, 최지성, 김종중이 의사결정을 한다’고 했는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특검팀 파견검사)
“그 말도 김 교수가 오해하고 하신 것 같습니다. 이 부회장은 미전실 의사결정에 크게 관여하지 않습니다. 회의 자체도 없었기 때문에, 이 부회장 의견을 40% 받아들이는지 60% 받아들이는지 구체적으로 퍼센트(%)까지 대면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김 전 팀장)
“증인이 김 교수에게 삼성에서 이 부회장이나 미래전략실이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는지 말한 적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특검팀 파견검사)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지만, 만약 말을 했다고 하면 의사결정은 미전실장 차원에서 하는 것이고, 특별한 경우 최지성 실장과 이 부회장이 공유하거나 의견 교환하는 건 있지 않나 싶습니다.”(김 전 팀장)
김 전 팀장은 자신이 과거 김 위원장에게 건넨 정보에 대해 해명하느라 진을 뺐다. 앞서 지난 18일 박 전 대통령 재판에 나온 이수형 전 미전실 기획팀장 증언 때와 같은 풍경이었다. 이 전 팀장은 2015년 7월 국민연금의 삼성 합병 의결을 앞두고 국민연금 주식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김성민 전 위원장 등을 접촉하며 합병 찬성 로비를 한 것으로 조사된 인물이다. 특검팀은 김상조 위원장의 진술을 바탕으로 질문을 쏟아냈고, 이 전 팀장은 “김 위원장이 오해한 것”이라는 취지의 답으로 일관했다. 김 위원장의 이 부회장 재판 증언 여파는 크고 길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7월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공범사건 재판부 고육지책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고, 관련 사건 선고가 내려지면 피고인들의 셈법은 좀더 복잡해진다. 공범에 대한 유무죄 판단이 자기 재판 결과를 미리 가늠해볼 수 있는 예고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관련자들 재판 결과를 보면, 박 전 대통령은 노란불이 켜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국정농단’ 관련자 가운데 완전히 무죄를 선고받은 이는 한명도 없다. 공범은 아니지만 이영선(37) 전 청와대 경호관과 문형표(61)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일찌감치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전 경호관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선진료 행위를 방조한 혐의가, 문 전 장관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서 핵심 사안으로 꼽히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국민연금공단에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가 인정됐다. 특검팀은 이들 1심 판결문을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부가 이 전 경호관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 옷값을 최씨가 냈다는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점 등을 근거로 두 사람이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증명하겠단 계획이다.
박 전 대통령에겐 문 전 장관 1심 결과도 우울한 소식이다. 법원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이 부회장 경영권 승계 과정의 일환이었고, 합병 찬성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경영권 승계 및 각종 현안에서 박 전 대통령 도움을 받는 대가로 삼성이 최씨를 지원했다는 게 검찰과 특검팀 주장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합병 찬성 과정에 자신의 손때가 묻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할 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박 전 대통령 사건을 맡은 형사22부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모든 재판부는 독립적으로 재판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결론을 내놓을 수 있지만, 옆 재판부에서 비슷한 사실관계를 두고 먼저 내린 판단을 뒤집으면 “판결에 모순이 있다”는 비판이 따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국정농단’ 사건 재판부도 마냥 마음이 편하진 않다. 판결문에 박 전 대통령의 공모나 지시 여부를 적시하면 한창 심리가 진행 중인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예단을 줄 수 있단 우려가 나와서다. 문 전 장관에게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 형사21부(재판장 조의연)도 삼성의 청탁이나 박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판결문에 적시하지 않았다. 범행 동기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진행 중인 재판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반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재판을 맡았던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는 지난 27일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51)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선고를 내리면서 공범으로 기소된 박 전 대통령의 공모 여부에 대한 판단을 내비쳤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노태강 전 문체부 체육국장의 사직서 제출을 요구한 것은 “신분보장과 직업공무원제도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위법하고 부당한 지시임이 명백하다”면서 김 전 실장 등의 공범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블랙리스트 사건의 핵심 쟁점인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행위에 대해선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 문체부 보고서 내용을 보고받았을 개연성이 크지만, 지원배제 범행을 지시하거나 지휘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예단은 금물이다. 27일 저녁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박근혜 블랙리스트 무죄’라는 “오보”가 양산될 것을 우려한 듯 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재판부가 말한 것은 김 전 실장 등 사건을 기준으로 박 전 대통령의 공모 부분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취지일 뿐, 박 전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무죄가 선고될 게 확실시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검찰 쪽에서 추가 증거를 제출할 가능성이 있고, 재판부가 서로 달라서 판단이 다르게 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아직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 블랙리스트 관련 심리는 본격화되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지원배제 행위 관련 재판기록을 바탕으로 방어선을 두텁게 하려는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발 예술농단의 정점엔 이를 지휘한 대통령이 있었음을 입증하려는 검찰의 진검승부가 펼쳐질 전망이다. 핵심 혐의인 ‘삼성 뇌물’ 사건의 한축, 이 부회장에 대한 1심 판단도 다음달 말 나올 예정이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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