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지방선거에 출마한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경남도지사 후보가 14일 새벽 창원시 의창구 신월동 선거대책위 사무실에서 개표 결과 당선이 확정되자,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창원/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김경수 민주당 후보가 선거의 달인으로 불리는 김태호 자유한국당 후보를 여유있게 꺾었다. 보수정당의 아성이었던 경남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첫 도지사가 됐다는 점뿐 아니라 정치 잠재성 면에서도 김 당선인은 6.13 지방선거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의 ‘미래’를 알기 위해 김 당선인의 삶을 되짚어봤다.
‘경남도지사 당선 확실’이라는 개표 방송 자막이 나오고도 한참 뒤인 14일 새벽 1시가 가까워서야 김경수 경남도지사 당선인(50·이하 호칭 생략)은 경남 창원의 선대위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먼저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손을 치켜들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방송 인터뷰를 차례대로 마친 뒤에는 지지자들을 향해 다시 마이크를 들고 섰다.
“인터뷰할 때 오랫동안 제 소리가 안 들려서(인터뷰 때 텔레비젼 소리를 껐음) 불편했죠?”라고 물은 뒤 당선 소감과 지지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흥분할 만한데도 전혀 그런 기색 없이 특유의 느릿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성품과 리더십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김경수의 도지사 당선은 여권의 차세대 주자가 한명 더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그는 영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적’이 없기에 확장력이 뛰어나다는 평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순항할 수 있을지 여부는 곧 닥쳐오는 드루킹 특검의 암초를 무사히 건널 수 있느냐에 달렸다. 또다른 시험대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경남도지사 후보가 14일 새벽 창원시 신월동 선거대책위 사무실에서 개표 결과 당선이 확정되자, 김영순 장애인선대본 공동본부장(신장유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장)으로부터 무릎을 굽힌 채 꽃다발을 받고 있다. 창원/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94년 신계륜 의원실에서 정치 수업
김경수가 주목받는 것은 온유하다고 알려진 그의 성품이나 인격 때문이 아니다. 정치 잠재력 때문이다. 경력은 짧지만, ‘민주개혁 세력의 적통을 이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듯이 노무현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문재인에게 신뢰받는 최측근이다. 그도 이번 선거 방송광고에서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우리 경남은 두 거인을 키워낸 자랑스러운 땅이다. 거인은 거인을 낳는다. 노무현과 문재인을 이제 김경수가 이어간다”고 강조했다. 더구나 도지사는 대선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다.
그러나, 김경수는 그런 큰 그림은 자기에게 없다고 선을 그었다. 지난 14일 오전 봉하 묘역 참배를 끝내고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이하 인터뷰)에서 “지금 경남의 상황은 온전히 역량을 집중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성공하는 도지사가 되고 싶다. 그보다 더 큰 그림은 제가 감당할 몫이나 져야 할 짐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 정도는 흔히 정치인들이 야심을 숨기기 위해 늘상 하는 수사에 가깝다. 그는 밤늦게 이뤄진 전화 인터뷰에서는 더 깊은 생각을 내보였다.
“정치권에 들어온 뒤로 참모로 활동하는 것이 내 몸에 맞는 옷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직접 정치로 뛰어들 때가 가장 힘들었다. 지금은 할 수 없이 옷에 몸을 맞추고 있는 격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빨리 마무리하고 어떻게 하면 남은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갈까 하는 게 늘 로망이다.(웃음) 물론 경남도지사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당면한 목표에 올인하는 것은 해낼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까지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나 생각은 솔직히 별로 없다. 강한 의지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건 내가 봐도 정치인으로서 약점이기도 하다.(웃음)”
사실 김경수의 삶의 궤적은 정치 야심이 없다는 그의 고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적 목표를 먼저 세우고 치밀하게 나아가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 ‘옳은 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피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 하신 말씀 중에 가장 가슴에 와닿는 부분은 시대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저도 그 말씀에 많이 공감이 되더라.”(인터뷰)
김경수가 정치권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4년 가을이었다. 신계륜 의원실에서 일하던 학교 선배가 국정감사 기간에만 도와달라고 해서 여의도로 첫 출근했다. 지금은 사라진 30~4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월간지(<리더스 비젼>) 편집부 기자 생활에 별 흥미를 못 느끼던 참이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국회에서 일하면서 한때 사회 변혁을 꿈꾸며 제도권을 외면하던 청년은 정치와 의회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 하에서 국회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싶었다. 그러나 국감 기간 직접 겪어본 국회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국회에서 하는 일이 통쾌하고 보람도 컸다.”(김경수, <사람이 있었네>,2014)
국정감사가 끝난 뒤 신계륜은 정책비서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이제 그로서는 머뭇거릴 까닭이 없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계륜은 낙선했지만, 이미 의원회관 주변에서 김경수는 야구로 치면 인기있는 ‘자유계약 선수’였다. 15대 국회에서는 인권 변호사 출신의 유선호 의원실, 16대 국회에서는 재야 출신의 중진 임채정 의원실에서 스카웃했다.
“마침 16대 국회부터 보좌관 자리가 하나 더 늘어 사람을 구하고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그를 소개했다. 만나보니 착하면서도 똑똑했다. 보좌관 하기에는 나이(당시 32살)가 어렸지만 발탁했다. 남북관계기본법을 우리 의원실에서 만들 때였다. 그 법이 헌법과도 연관돼 있어 매우 복잡했는데 잘 정리해내더라.”(황창화 당시 임채정 의원 보좌관·전 국회도서관장)
6·13 지방선거에서 경상남도 도지사에 당선된 김경수 당선자가 14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한 뒤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해/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국정상황실 때 출근은 일등, 퇴근은 꼴찌”
2001년 말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정무수석에 임명된 유선호의 요청에 따라 임채정 방을 그만두고 청와대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휴전선에서 장교로 근무하다가 월북했던 외삼촌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3개월만에 청와대에서 보따리를 싸서 나왔다. 이 좌절은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줬다. 노무현을 만난 것이다. “그가 쉬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2002년 7월 노무현 대선후보 캠프로 데려왔다. 그에 대해서는 여의도 주변에서 워낙 평이 좋았다. 캠프에서는 전략기획팀에서 같이 일했는데 열심히 할 뿐 아니라 업무에 뛰어났다. 인수위(당선인 비서실 기획팀)를 거쳐 청와대 국정상황실에도 데려갔다. 거기서도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더라. 상황실은 대부분 각 부처에서 파견나온 엘리트 공무원들인데도 정책역량 등 실력면에서 그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도지사 출마를 위해 청와대를 나올 때는 김경수를 제1부속실로 추천했다.”(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그가 1부속실 행정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2004년 5월14일)돼 대통령의 업무정지가 해제된 날이었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 보좌하는 청와대 1부속실은 ‘비서실 중의 비서실’로 불린다. 대통령에게 올라오는 모든 보고서와 자료를 미리 검토하고, 지시사항을 담당 비서실에 전달하는 일을 한다. 2006년 1년 동안은 대통령 수행비서로 일했다. 청와대 입성 때만 해도 노무현과는 안면이 없었던 그는 집권 중반기에 노무현의 최측근 중 한명이 됐다.
“일이 아무리 많아도 인상을 찌푸리는 경우가 없었다. 늘 차분하고 온화했다. 청와대의 컴퓨터 업무 시스템인 ‘이지원’을 개발할 때 진면목이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개발했는데, 업무시간이 아닌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주로 작업했다. 누군가 보조를 해야 하는데 그걸 전부 김경수가 도맡아 했다. 그럴 때 보통은 주변사람들한테 ‘힘들다’ ‘바빠서 죽겠다’고 자랑섞인 불평을 늘어놓기 마련인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업무에서 매우 까다로운 노 대통령도 그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윤태영 당시 제1부속실장)
그는 이른바 ‘문고리 권력’으로서의 위세를 부리지 않았다.
“김경수는 제1부속실에 근무할 때 해당 비서실에 전화로만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전달하지 않았다. 직접 발품을 팔아서 업무를 조정했다. 그래서 청와대 비서실의 업무가 굉장히 부드럽게 돌아갔다.”(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2007년 2월 김경수는 ‘노무현의 복심’이라고 불리던 윤태영이 맡았던 연설기획비서관으로 승진했다. 윤태영이 건강이 안 좋아져서 물러난 자리였다. 노무현의 신임이 높아지는 만큼 그 역시 ‘보스’에 대한 충심이 깊어졌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따라갈 비서관이 누가 될지 설왕설래했다. 대통령과의 관계를 감안하면 김경수도 우선 순위에 있었지만, 그가 봉하행을 수락할지가 관심이었다. 당시에 두 아들이 서울에서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녀 교육을 이유로 고사해도 비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경수는 흔쾌히 수락했다.
2008년 가을 경남 김해 봉하마을 들판을 (오른쪽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주영훈 전 경호실 안전본부장, 김경수 비서관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김경수 선대위 제공
어린 아이들 데리고 봉하행 선뜻 수락
“1부속실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어쩌면 퇴임 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봉하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큰 망설임 없이 결정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준 것이 고마웠다.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김경수, <사람이 있었네>)
대학 재학시 총학생회 간부로 학술행사를 준비하면서 한 동아리 회장이었던 부인(김정순·50)을 만났다. 서로 호감만 가지고 있다가 김경수가 국회 비서관으로 일할 때 다시 만나 사귄 끝에 1996년 결혼했다.
김경수는 봉하마을에서 낮에는 유기농 쌀농사를 짓는 농부와 마을 가꿈이로, 밤에는 ‘새로운 진보’를 꿈꾸는 이상가로 살았다. 욕심없는 삶은 여유로웠고, 시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간 노무현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큰 행복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2009년 5월 노무현의 서거로 그의 평화로운 삶은 뿌리채 흔들렸다. 더 이상 노무현의 뒤에 머물 수 없게 됐다.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으로 노무현 정신을 앞장서 지키고 계승해야 했다. 그 일은 결국 정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평소 정치를 직접 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6년 결혼할 때 장인에게, 장인의 요청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정치판에서 일은 해도 출마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바도 있었다. 처가는 정치 때문에 친척간에 원수가 됐던 아픈 경험에서 자식들이 정치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청와대 근무할 때 대통령으로부터 1998년 총선에 출마(경남 진주)하라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지만 뿌리쳤다.
현실정치 참여를 처음으로 고민한 것은 2011년 4·27 경남 김해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였다. 노무현의 고향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김경수가 나가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이 강했다. 고심 끝에 “꽃이 되기보다는 단결과 연대의 거름이 되고 싶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한 국민참여당 후보(이봉수)는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의 후보 김태호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를 뼈 아프게 여긴 김경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 큰 판을 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에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정치를 극구 멀리 해왔던 문재인이 정치 참여를 결심했던 것도 김경수의 결단을 도왔다.
“문 대통령을 현실정치로 등을 먼저 떠민 사람은 나와 이호철 민정수석이었다. 문 대통령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다음에는 김경수도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김경수는 2011년 야권통합을 추진한 시민운동모임 ‘혁신과 통합’ 때부터 문재인을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비서실장과 연설기획비서관 등으로 같은 공간에서 일했지만, 둘은 그 전에는 서로 교감하거나 긴밀히 통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2012년 대선 때는 김경수가 대선 후보 수행팀장을 맡을 정도로 둘은 가까워졌다.
“2012년 대선 때, 후보한테 자꾸 노 대통령 선거 때는 어땠다는 등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나는 그런 비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후보의 선거는 그분이 강한 점을 찾아서 하면 될 일이지 노무현 대통령의 장점을 끌어다 거기에 맞추려는 것은 성공하기도 힘들다고 봤다.”(인터뷰)
문재인은 첫 대선 실패 이후에도 어디를 가나 김경수를 데려갔다. 2017년 대선 때는 대선후보 선대위 대변인을 맡겨 가장 가까운 거리에 뒀다. 대선 출구조사가 나온 지난해 5월9일 저녁, 문재인이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여의도 당사로 가는 자동차의 옆자리에 김경수를 앉힌 것은 둘이 얼마나 친밀한지 보여주는 한 예다.
“지난해 문 대통령의 취임 초기 당시 김경수 의원은 청와대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대통령이 그와 많은 것을 상의했는데, 그러다 보니 인사문제 등에 김 의원이 너무 깊이 관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문 대통령은 그를 신뢰한다.”(익명을 요구한 여권 인사)
‘정치는 안 맞는 옷’ 생각 때문에
노 대통령의 출마권유도 뿌리쳐
노무현 정신 계승 위해 결심 바꿔
도지사 출마도 처음에는 회피
대학 때 3번 구속된 운동권 출신
국정감사 자원봉사로 첫 정치 인연
의원보좌관 생활 거쳐 청와대 입성
2012년 이후 문재인의 최측근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6월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열리는 일자리 추경 예산안 관련 시정연설을 위해 본청으로 들어서며 더불어민주당 당시 김경수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사회 잘 볼라 캤는데…” 울던 착한 운동권
김경수는 1967년 12월 경남 고성군 개천면 용안리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면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인 아버지(작고)와 시장에서 좌판을 펴고 장사를 할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 사이에서 난 4남1녀의 맏이였다.
교육열이 강했던 부모는 장남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되자, 읍내인 고성읍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6년에 올라갔을 때는 대처에 있는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김경수만 인근 대도시인 진주로 전학시켰다. 일종의 조기 유학이었다. 김경수는 친척 집에서 기거하면서 천전초, 남중을 졸업했으며, 고교(동명고) 진학 때는 가족 전부가 진주로 옮겼다.
“중고생 때는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 가서 만났던 마산제일여고 학생과 잠시 펜팔로 사귀면서 공부를 다소 등한시했던 일이 청소년기의 가장 큰 일탈이었다.(웃음) 고등학생 때까지는 물론 사회의식이 전혀 없었다.”(인터뷰)
그 시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경수도 대학에 가서야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떴다. 재수 생활을 한 끝에 1986년 서울대 인류학과에 입학한 갓 스무살의 청년에게 대학 캠퍼스는 낭만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가슴에는 학문에 대한 막연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은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이 가장 격렬하던 때였다. 1986년 입학식 날부터 서울대에서는 재학생의 시위가 벌어졌다. 교정에 학생들이 던진 짱돌이 날고, 경찰이 쏜 최루탄이 난무했다.
“대학생이 된 동창들이 재수생활을 할 때 가끔 만나면 시국 얘기를 했지만, 그때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입학하고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학한 다음달인 4월에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신림사거리에서 전방훈련 입소 거부를 외치며 분신한 것도 충격인데 그해 5월 교내 집회 도중에 중앙도서관 난간에서 이동수 열사가 분신하는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집안의 기대와 공무원인 아버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많은 번민과 방황을 했는데 학생들의 자기희생적 헌신을 보고는 나만 출세하자고 조용히 공부만 하는 것은 시대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인터뷰)
6월 항쟁이 끝난 뒤인 그해 여름 방학에는 ‘공장활동’(공활)에 참가했다. 농촌을 이해하기 위해 농촌활동(농활)을 하는 것처럼 1980년대부터는 학생들이 직접 공장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와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장차 학생운동가에서 노동운동가로 전환하는 것을 모색하는 활동이었다. 김경수는 수원의 와우공단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를 택했다. 일이 익숙지 않은 그는 입사한 지 며칠 안 돼 쇠로 된 부품의 구멍을 다듬는 작업을 하다가 왼손 검지 손가락을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나중에 군 면제를 받았지만, 열악한 노동현장에 대한 생생한 경험은 가슴에 남았다.
그는 대학교 3학년인 1989년 총학생회 학술부장 시절 가을 축제 때 ‘북한 바로알기 자료집’을 만들었다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혐의로 구속되는 등 모두 세 차례 옥살이를 했다. 불의한 정권을 상대로 한 싸움에는 단호했지만, 사람을 대하는 심성은 따뜻했다고 그의 지인들은 기억한다.
“경수 선배는 생각은 강했지만 태도는 부드러웠다. 누구에게나 진심으로 대했다. 후배들을 만나서 자기 말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먼저 듣고 함께 고민하는 식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소통을 잘했다. 영화에 관심이 있다는 후배들 때문에 당시 인기 있었던 영화 <나홀로 집에>를 서너번이나 봤다고 하더라. 그런 점 때문에 반대 정파 쪽에서도 ‘김경수는 어떻게 당해낼 수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감옥살이 할 때였다. 선후배들이 위문편지를 보내면 그는 훨씬 긴 답장을 보내왔다. 개인적인 얘기는 하나도 없이 이 시대 청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온통 진지한 내용으로 가득찬 편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인류학과의 신영복’이라고 불렀다.”(익명을 요구한 인류학과 후배)
“설악산에 있는 학교 수련장으로 과 답사여행을 갔을 때였다. 경수가 저녁 여흥시간의 사회자를 맡게 됐는데, 소주가 몇 순배 돌고 나니까 사회자의 통제가 전혀 먹히지 않게 됐다. 다들 술에 취해 해롱거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경수가 울먹였다. 진한 경남 사투리로 “사회를 잘 볼라 캤는데…”라고 하면서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모두 배를 잡고 웃었지만, ‘이 친구는 책임감이 강하구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통사람은 ’나 안 해’라고 화를 낼텐데….”(익명을 요구한 인류학과 선배)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당시 의원이 지난달 4일 ‘드루킹’ 김아무개씨의 네이버 댓글 여론조작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차세대 주자 부상…참모스타일 탈피 과제
김경수는 민주개혁 진영의 불모지였던 경남에서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출마해 당선된 첫 도지사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차세대 주자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민주진영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피케이(PK, 부산 울산 경남)를 보수계열 정당으로부터 탈환한 장수이기 때문이다.
부울경(부산 울산 경남)은 1990년 3당 합당 전에는 호남과 함께 민주주의를 진척시키는 양대 보루였다. 그러나,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이 보수계열의 민주자유당으로 통합된 뒤로는 이 지역은 대구·경북과 함께 보수정당의 텃밭으로 변했다.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춘 노무현조차 부산에서 시장과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판판이 깨졌다. 부울경 지역을 민주당이 되찾은 것은 한국 정치지형의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부산시장으로 당선된 오거돈과 울산시장으로 당선된 송철호도 대변화의 주역이지만, 나이나 성장 잠재력 면에서 경남의 김경수가 더 유리하다.
“보좌관 시절부터 눈여겨 봤는데 흠을 잡을 데가 없다. 늘 신중하고 언행에는 진정성이 있다. 앞으로 한국정치를 감당할 새로운 주역 중 한명이다.”(임채정 전 국회의장)
“참모 스타일을 벗어나는 과정이 필요해서 김 당선인이 정치 행보를 서두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4년 뒤 대선 국면에서 지지자들에 의해 김경수 당선인이 소환될 가능성이 있다. 부울경의 대표주자가 된 만큼 최소한 당내 경선까지는 뛰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 그 다음은 시대상황에 달렸다.”(이철희 민주당 의원, 김경수 경남도지사 후보 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 당시 의원이 활약하는 것을 본 뒤 1992년에 만났을 때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한번 만들어야겠다. 거기에 내 인생을 걸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찌기 김경수를 보면서도 장래의 지도자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이들이 김경수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은 것은 학습능력과 균형감이다. 이철희는 “관훈토론을 준비할 때였다. 그가 큰 토론을 직접 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준비팀에서 마련한 내용을 죽 듣더니 토론장에서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말하더라”고 했다. 이광재는 “정치 지도자는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데 김 당선인은 그러한 균형감각이 뛰어났다. 또 국정상황실에서 일할 때 보면 담론과 정책의 조화를 잘 이루더라. 담론만 강하면 공허하기 쉽고, 정책만 능하면 방향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넘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당장 지난 대선 때 매크로를 통해 여론조작을 한 의혹을 받고 있는 드루킹 사건의 수사 파고를 넘는 일이다. 6·13 지방선거 직전에 터진 드루킹 사건은 야당의 요구로 특검이 임명돼 본격적인 수사가 곧 시작될 예정이다. 이에 대해 그는 “특검이 여러 의혹을 밝히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드루킹(김동원)이 주장한 대로 ‘2016년 10월에 파주 느릅나루 출판사 사무실에서 김경수 당시 의원에게 매크로 시연을 보여줬는지’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해명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면서 “구속된 피의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일방적으로 진술한 내용을 가지고 사실 검증도 없이 보도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 그의 주장은 경찰 수사 발표나 검찰의 조사 발표로만 보더라도 탄핵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6·13 지방선거에서 경상남도 도지사에 당선된 김경수 당선자가 14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올린 당선 인사 꽃바구니. 창원/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드루킹 수사 파고 넘길까
오랫동안 몸에 밴 참모 스타일을 벗어나는 것도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로 꼽힌다. 그는 아래에서 올라온 보고서의 글자 하나 하나까지 꼼꼼하게 다듬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업무에 있어서는 매우 까다로웠던 노무현과 문재인 두사람을 보좌하면서 굳은 습관이다.
“지도자는 디테일에 무관심해도 안 되지만, 만기친람하면서 사소한 것까지 자기가 다 챙기면 참모들이 오히려 움직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 시스템에 이상이 온다. 지도자는 큰 그림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추진은 아랫사람에게 위임하는 게 필요하다. 또,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약간의 틈을 보이는 게 좋다. 그래야 인재들이 모여든다.”(이철희 의원)
스스로 정치가 옷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태도도 얼핏보면 야심의 전쟁터인 정치판에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이 ‘김경수의 가능성’에 마이너스를 매길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정치를 욕망의 크기에만 비례하는 것으로 보는 낡은 프레임일 수 있다.
“일을 하다보면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경우다. 그 때는 성공하기 쉽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럴 때는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하는 일로 만드는 게 중요하더라. 저는 그렇게 해왔던 게 아닌가 싶긴 하다.”(인터뷰)
국회의원과 경남도지사 출마 모두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해야 할 일이었기에 좋아하는 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차세대 주자로의 업그레이드 역시 같은 과정을 밟게 될까. 경남 창원/김종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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