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구속된 노회찬 “덜 춥고 괜찮다”에
공안검사 황교안 “구치소가 따뜻하면 안돼”
‘삼성 X파일’ 수사지휘한 황…박 정부 장관행
노는 ‘떡값 검사’ 폭로로 의원직 상실 타격
‘최순실 게이트’에 공격·수비 맞붙기도
2017년 2월6일 황교안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오른쪽)가 국회 본회의에 출석하며 노회찬 정의당 의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여기 동기동창 두 사람이 있다. 1973년 경기고에 입학한 고 노회찬 의원과 황교안 전 총리다. 문과에서 함께 3년을 보낸 두 사람은 이후 노동·진보정당 운동가와 공안 검사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까까머리’ 고1 시절 만난 둘은 ‘삼성 엑스(X)파일’ 수사, 통합진보당 창당과 해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게이트 등 굵직한 사건들을 두고 45년간 얽히고 설켜왔다.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각자’ 일관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1973년 노회찬
부산 출신 노회찬은 고입을 한 해 재수했다. 유신이 선포(1972년 10월)된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경기고에 입학한 노회찬은 유신 비판 유인물을 직접 제작해 학교에 배포했다. 서슬 퍼런 시절 “유신타도”를 가방에 써붙이고 다니던 열혈 학생이었다. 고2 때인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시위가 일자 교실 문을 잠그고 수업 거부를 주도했다. 당시 경기고의 수업 거부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5년 경기고 학도호국단 연대장 때의 황교안 총리(맨 앞쪽 어깨띠와 완장을 찬 이)의 모습이 경기고 72회 졸업앨범에 남아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1975년 황교안
서울에서 태어난 황교안은 모범생으로 꼽혔다. 고3 시절 황교안은 경기고에서 학도호국단 연대장이 됐다. 노회찬은 생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용적인 성격의 학도호국단 간부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긴 해도 대체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들이 많았다. 당시 임명직인 연대장 자리를 맡는 것 자체가 체제 순응적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고등학교때부터 두 사람의 길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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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노회찬
경기고 졸업 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노회찬은 학창 시절 내내 유신독재 반대 시위를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곤 용접 기술을 배워 인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돼 청주에서 옥살이를 했다. 1992년 출소한 노회찬은 정치로 눈을 돌려 진보정당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2004년 그는 민노당 소속으로 초선 의원이 됐다.
노회찬은 국회에 들어가자마자 삼성에 화살을 겨눴다. 의정활동 초반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잘못된 경영형태가 공공의 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공식화”한 점을 성과로 꼽았다. 2005년 8월엔 ‘삼성 엑스(X) 파일’ 사건과 관련해 이른바 ‘떡값’을 받은 검사 7명의 실명을 폭로했다.
■ 2005년 황교안
경기고 졸업 뒤 성균관대 법대에 들어간 그는 곧바로 고시반에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에 집중했다. 1983년 검사가 된 뒤 ‘공안통’의 길을 걸었다. 1989년 노동운동으로 구속돼 서울지검에서 조사를 받던 노회찬은 옆 방의 ‘공안 검사’ 황교안과 조우한 일화를 떠올린 바 있다. 2016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수사 끝나는 날 황교안이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포승줄 다 풀고 수갑 다 풀고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마시며 황교안이 ‘어떻게 지내냐’고 묻길래 저는 걱정하지 말란 뜻에서 ‘서울구치소가 새로 옮겨가서 겨울에 덜 춥고 괜찮다’고 했더니 황교안은 ‘그게 문제다’라면서 자기가 거기 지을 때 가서 ‘구치소라는 게 이렇게 따뜻하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또 저에게 하더라.”
2005년 서울지검 2차장 검사가 된 황교안은 ‘삼성 엑스파일’ 특별수사를 총괄했다. 당시 횡령과 뇌물공여 등의 혐의를 받던 이건희 회장은 서면조사만 받은 뒤 무혐의 처리됐다. 다른 삼성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연루 검사들도 기소되지 않았다. 반면 노회찬은 ‘떡값 검사’의 실명을 공개해 통신비밀보호법을 어겼다며 이후 기소됐다. ‘공익 폭로’와 그에 대한 기소로 두 사람의 엇갈린 인연은 더 벌어졌다.
2005년 12월14일 황교안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가 삼성 엑스(X)파일과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2005년 12월 황교안 2차장은 삼성 엑스파일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곤 이런 질문을 받았다.
기자 : 이건희 회장은 소환 통보 자체를 안했나?
황교안 : 소환 필요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증거가 전혀 없는데 어떻게 소환하나.
기자 : 떡값 검사들에 대해서도 서면으로 조사했나?
황교안 : 모두 부인하는 상황에서 과연 소환 조사의 필요성이 있을까 생각했다. 검찰에 나와 조사받은 사람은 두 사람이다.
기자 : 정치권과 삼성 관련 보도자는 처벌되고 (떡값 등) 의혹을 받은 당사자들은 처벌이 안 됐는데?
황교안 : 검사는 법대로 한다. 도청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통비법에 위반된다. 법대로 처벌 안하면 그것이 안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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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삼성 엑스(X)파일' 관련 폭로로 의원직을 상실한 직후 노회찬 의원이 ‘국회를 떠나며'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2013년 노회찬
2005년 시작된 사건은 8년 뒤 대법원에서 유죄로 확정됐다. 떡값 검사의 실명을 공개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됐던 노회찬에 대해 2013년 2월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이 확정된 것이다. 서울 노원병을 지역구로 재선 의원이었던 노회찬은 의원직을 내려놔야 했다. 선고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8년이 지난 오늘 대법원의 유죄 확정은 뇌물을 줄 것을 지시한 재벌그룹회장, 뇌물수수를 모의한 간부들, 뇌물을 전달한 사람, 뇌물을 받은 떡값검사들이 모두 억울한 피해자이고 이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저는 의원직을 상실할 만한 죄를 저지른 가해자라는 판결이다. 폐암환자를 수술한다더니 암 걸린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와 무엇이 다른가.”
노회찬은 “그러나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 2013년 황교안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2011년 8월 검찰을 떠난 황교안은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고문을 맡았다. 2013년 2월13일, 황교안은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자신이 기소를 지휘했던 ‘노회찬 통비법’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하루 전 날이었다. 그는 지명 직후 보도자료를 내 이렇게 밝혔다.
“새 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으로 내정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깨끗하고 안전한 사회, 인권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
장관 인사청문 과정에서 그가 노회찬에게 10만원의 정치후원금을 낸 사실이 뒤늦게 드러기도 했다. 황교안은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을 맡던 2007년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에게 10만원을 후원한 뒤 9만원의 소득공제를 받았다. 현직 공무원이 정치후원금을 낸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굳이 왜 10만원을 후원했는지 황교안이 직접 밝힌 적은 없다. 다만 시점을 통해 추측해볼 뿐이다. 황교안이 후원금을 낸 때는 노회찬이 ‘엑스파일 폭로’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 해다.
법무부 장관이 된 황교안은 2013~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을 지휘했다. 헌법재판소는 2013년 법무부가 심판을 청구한 ‘위헌정당해산심판 청구의 건’에 대해 이듬해 정당 해산 결정을 했다. 통합진보당은 2011년 노회찬의 참여 속에 창당됐던 당이다. 헌재 결정 당시 노회찬은 통합진보당을 나와 있었지만, 한 정당의 창당과 해산을 두고 두 사람은 역시 엇갈려 있었던 셈이다.
2015년 6월 황교안은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에 임명되며 또 한번 도약했다. 공안검사 출신 법무부 장관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통진당 해산 등의 ‘성과’를 낸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2015년 6월18일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으며 인사하는 황교안 국무총리.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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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노회찬과 황교안 ■
2016년 4월13일 노회찬은 경남 창원에서 3선에 당선되며 재기한다. 국회로 돌아온 노회찬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대통령 비판에 앞장섰다. 10월21일 국회 운영위 청와대 국정감사에서 “대통령은 (기업들을 상대로) 강제 모금을 하고도 강제 모금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마치 죄의식 없는 확신범 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 것은 큰 화제가 됐다. 이는 청와대의 심기를 건드렸다. 같은 달 24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을 앞두고 여야 지도부가 환담 자리가 있었는데 청와대 쪽에서 정의당 원내대표인 노회찬을 배제시킬 수 있는지 국회 의장실에 문의한 게 드러났다. 그즘 <한겨레>와 만난 노회찬은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을 향해 ‘죄의식 없는 확신범’이라고 한 데 대해 새누리당이 윤리위원회에 제소하기로 한 뒤 김재원 청와대 (당시) 정무수석이 ‘정의당은 대통령과의 환담 자리에서 빼면 안 되냐’고 의장실에 문의해왔다. 그러나 의장실에서 ‘대통령은 국회에 손님으로 오는 것이다’라며 거부했다고 전해왔다. 이 얘기를 들은 뒤 의장실에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했다.”
2016년 11월11일 국회에서 열린 긴급현안질의에서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에게 질의하고 있는 노회찬 정의당 의원. 국회 영상회의록시스템 갈무리
그해 11월11일 노회찬은 긴급현안질의에서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와 직접 맞붙기도 했다. 노회찬은 황교안을 향해 “직언을 드릴 수 없는 사람이 총리라는 게 박근혜 대통령의 불행이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대해 황교안은 “국정을 잘 보좌했어야 하는데 송구하게 생각한다”면서도 “적절하지 않은 말씀을 하지 말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둘은 이런 질의응답도 주고 받았다.
노회찬 : 대한민국의 실세 총리가 있었다면 최순실이에요 나머진 다 껍데기에요. 잘 알고 계시잖아요.
황교안 : 그렇게 속단할 일 아닙니다. 국정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노회찬 : 속단이 아니라 뒤늦게 저도 깨달았어요 지단이에요.
노회찬이 2004년 초선 시절부터 강조했던 “삼성의 잘못된 경영형태”는 이건희 회장 이후 ‘이재용 부회장 경영 시대’에 와서 최순실 게이트를 만나 이 부회장의 구속 기소라는 초유의 결과로 이어졌다. 황교안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뒤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노회찬은 ‘엑스 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내려놨던 시절인 2016년 3월 드루킹 쪽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데 대한 책임으로 지난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지난 24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빈소에서 조문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5일 노회찬의 빈소를 찾은 황교안은 기자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자리를 떴다.
기자 : 심경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황교안 : 애석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자 : 이전에 두 분, 인연이 있었는데요.
황교안 : 안타깝습니다. 같이 잘 모시기 바랍니다.
최근 공개된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에서 ‘비상계엄 선포문’의 승인권자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표기된 데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황교안이었기 때문이다.
기자 : 계엄령….
황교안 :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잘 모시기 바랍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관련 영상] <한겨레TV> 정치 논평 프로그램 | ‘더정치’ ◎ 정치BAR 페이스북 바로가기 www.facebook.com/polibar21/ ◎ 정치BAR 텔레그램 바로가기 https://telegram.me/polibar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