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동부구치소에 재수감되기 위해 서울 논현동 자택을 떠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사과는 바라지도 않았다. ‘사실관계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거나 ‘일부 오해가 있지만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고 했어야, 한때나마 국가와 국민을 대표했던 대통령의 도리다.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침묵했어야 한다. 그런데 2007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은 달랐다.
대법원이 징역 17년 형을 최종 선고한 뒤 11월2일 재수감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나는 구속할 수 있어도 진실을 가둘 수는 없다”고 했다. 전형적인 정치 박해 피해자 코스프레다. 열린민주당 김성회 대변인의 촌평이 사실에 부합한다. “진실을 가둘 수 없어서 당신이 구속된 거예요.”
나는 그 진실의 조각을 13년 전인 2007년 여름에 보았다. <한겨레21> 정치팀장으로 특별취재팀을 꾸려 대통령 후보 검증에 주력했을 때다.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현재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컸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의 승리자가 대통령 당선자나 다름없었으므로, 한나라당 이명박과 박근혜 두 후보 검증에 주력했다.
그해 7월17일 발행한 <한겨레21> 제668호 표지의 제목은 ‘이명박의 거짓말’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는 인터넷 기반 금융회사를 표방한 비비케이(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임을 가리키고 있으나, 이명박 본인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주식 한 주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그때 이명박과 한나라당과 검찰이 진실을 가두지 않았더라면, 그가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을지언정 노년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노년의 삶을 망친 건 그의 탐욕이었다. 각종 편법과 불법으로 포장된 현대건설에서의 ‘샐러리맨 성공신화’를 정치 쪽으로 연장하려던 게 화근이었다. 이명박은 1992년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한 뒤, 1996년 서울 종로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한다. 그런데 측근 폭로로 공직선거법 위반이 들통나 의원직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사퇴한다. 증언을 조작하고 측근을 국외로 빼돌리며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1999년 대법원 판결로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벌금형이 확정됐고 피선거권도 박탈됐다.
“100% 이명박 회사”라던 김경준은 말 바꿔
한동안 정치를 못하게 되자 새로운 신화가 필요했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게 금융회사였고 김경준이었다. BBK 대표이사를 맡았던 김경준은 이명박을 만나 사기 전과자가 돼버렸지만 한때 잘나가는 금융인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랑하는 ‘와튼스쿨’,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전문대학원 출신이었다.2000년 광복절 특사로 정치 재개의 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이명박은 한동안 사업에 전념했을지도 모른다. 족쇄가 풀리자마자 이명박은 BBK에서 발을 빼고 김경준도 제 잇속을 차리면서 둘 사이는 어그러진다.
‘이명박의 거짓말’과 ‘BBK 사건’을 파헤친 2007년 <한겨레21> 제668호와 제686호 표지.
결국 수백억원대 금융사기 사건으로 번졌다. 이명박의 형인 이상은씨와 처남 김재정씨가 대주주였던 다스는 2003년 김경준을 상대로 150억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미국 법원에 냈다. 주가조작과 횡령에서는 무관할지 몰라도, BBK라는 회사의 종잣돈은 이명박에게서 나왔다. 형과 처남 명의로 보유했던 서울 강남 도곡동 땅을 판 돈이 자동차부품 회사인 다스로, 다스에서 BBK로 흘러갔다. 2018년 이명박 구속으로, 그리고 최근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이 ‘사실’은 당시에도 김경준을 포함한 여럿의 증언과 자료로 뒷받침됐으나 검찰은 ‘미래 권력’ 앞에서 애써 눈감았다.
이명박은 BBK와 무관하다고 했지만 그는 발을 빼기 전까지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겼다. <한겨레21> 특별취재팀은 BBK와 관련된 여러 소송 자료와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취재했고, 이명박의 거짓말을 확신했다. 최종 확인을 위해서는 한때 동업자였던 김경준의 증언이 필요했다. 국내 송환을 앞두고 미국 로스앤젤레스 구치소에 갇혀 있던 그를 취재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그해 8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김경준 아내를 통해 전화 인터뷰를 하고, 서류 확인 등 보충 취재를 하기 위해 한인 변호사가 김경준을 다시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김경준은 “BBK와 다스 등 3곳은 100% 이명박 회사”라고 증언했다. 더불어 이를 뒷받침할 주식거래계약서(Stock Purchase Agreement) 일부를 공개했다.
국내에 송환된 뒤 검찰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스스로 ‘가짜’라고 말을 바꾼 계약서였다.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막바지에 임박한 2007년 보도된 김경준 인터뷰 기사의 파장은 컸다. 이명박은 한겨레를 상대로 50억원짜리 소송을 내어 추가 보도를 막으려 했다. 손해배상 소송의 총액을 50억원으로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5천만원 소송을 제기했다.
한겨레가 앞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를 계속 쓴다면 건건이 손해배상 액수를 늘려갈 테니 추가 보도를 하지 말라는 이른바 ‘봉쇄 소송’이었다. 동시에 소송 총액에 비례해 내야 하는 인지대를 아끼려는 깨알 같은 그의 ‘현금 사랑’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명박은 그해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이 소송을 취하하지 않았다.
1심 법원은 한겨레가 이명박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3천만원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이명박의 반론을 한겨레신문에 실어주라고 사실상 강권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도곡동 땅은 서류상 주인이 아닌 “제3자의 것으로 보인다”며 이명박 소유를 암시했던 검찰은 이후 수사에서도 이명박 손을 들어줬다. 특검도 마찬가지였다.
<한겨레21>이 보도한 ‘이명박의 거짓말’ 이후 13년이 지났다. 늦게나마 갇혀 있던 진실이 풀려나고 이명박이 구속돼, 다행이다. 그럼에도 지체된 정의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생각하면 먹먹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그의 속셈이 찜찜하다. 이명박은 자신의 거짓말 속에 갇혀버린 것일까. 그는 어쩌면 ‘광복절 특사’로 화려하게 부활했던 2000년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보협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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