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서울 영등포구 더플러스 스튜디오에서 열린 단일화 비전발표회에서 만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 공동취재사진
아름다운 단일화는 없다. 4월7일 보궐선거가 3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 야권 후보 구도는 안갯속이다. 오세훈-안철수 후보는 단일화 룰을 두고 합의를 이뤄가고 있지만 그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유권자들은 아마도 다음주까지 지리멸렬한 단일화 힘겨루기를 지켜봐야 할 공산이 크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이 첨예하게 부딪쳐온 쟁점은 여론조사 표본에 반영할 유·무선전화 비율이었다. 오 후보 쪽은 휴대전화가 없는 소외계층을 고려해 여론조사 표본에 유선전화 비율을 10% 반영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안 후보는 100% 무선전화도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진통 끝에 19일 두 후보는 서로의 주장을 수용하겠다며 때늦은 ‘양보 배틀’을 벌였지만, 실무 협상에는 진전이 없었다. 애초 단일화 시한으로 삼았던 후보 등록 시한(18일)도 이미 넘긴 상태다.
전문가들은 고령층 응답자가 많은 유선전화 비율이 늘어날수록 국민의힘 소속인 오 후보가 유리할 것으로 분석한다. 실제 지난 13~14일 리얼미터가 서울시민 1030명에게 조사한 결과(유선 20%·무선 80%), 오 후보는 39.3%를 얻어 처음으로 안 후보(32.8%)를 오차범위 밖으로 제쳤다. 반면 13일 넥스트리서치가 실시한 조사(무선 100%)에서는 여전히 안 후보가 36.1%로 오차범위 안에서 오 후보(32.3%)에게 앞섰다.(두 조사 모두 신뢰수준 95%에 표본오차 ±3.1%포인트) 두 후보는 서울시장으로서 비전과 가치 대신, 단일화 유불리만 놓고 샅바 싸움을 이어온 것이다.
볼썽사나운 감정 대립도 이어졌다. ‘상왕’ 논란이 대표적이다. 협상단의 힘겨루기가 두 정당 지도부까지 옮겨붙어 갈수록 대립이 격해지고 있다. 안 후보는 연일 자신을 비판하는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겨냥해 “오 후보 뒤에 ‘상왕’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경고했다. 단일화 협상에서 김 위원장은 빠지라는 뜻이었다. 이에 국민의힘 쪽에서 오히려 안 후보 부인 김미경 교수가 ‘상황제’ 노릇을 하고 있다고 반격했고, 안 후보는 “김 위원장 사모님이 제 아내와 이름이 같다. 혹시 착각하신 것 아니냐”고 받아쳤다. 급기야 김 위원장은 “그 사람(안 후보)은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 같다”고 응수했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단일화를 향한 두 세력의 절박감이 커질 텐데, 감정의 앙금마저 차곡차곡 쌓였다. 이날 두 후보가 서로의 제안을 전폭 수용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무 협상은 한 치도 진전되지 않은 이유다. 더구나 두 후보가 후보 등록 기한까지 단일화를 마무리하지 못해, 투표용지에 두 사람의 이름은 모두 명시된다. 단일화 협상을 서두를 실익이 사라진 셈이다. 이제 남은 데드라인은 실제 투표용지가 인쇄되는 3월29일이다. 그 전까지만 한쪽이 물러나면 기표란에 ‘사퇴’라고 인쇄할 수 있기 때문에, 두 후보가 이때까지 대치를 이어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두 후보의 ‘될 듯 말 듯 한’ 협상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무의미한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에서는 ‘단일화 공해’라는 명명도 과하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이런 ‘단일화 공해’의 폐단이 유권자의 피로감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번 선거가 치러지게 된 계기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잃고 있다.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는 각각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권력형 성폭력 사태가 계기가 됐다. 과연 민주당이 보궐선거에 후보를 낸 것이 불가피했던 것인지, 왜 유독 지방자치단체장들의 권력형 성폭력이 반복됐는지,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떤 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진지한 토론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의혹은 어떤가?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저마다 발본색원을 외치고 있지만, 수사 주체와 조사 범위를 두고 수싸움만 계속하고 있다. 한쪽이 국회의원 전수조사를 제안하면 다른 쪽은 청와대까지 확대하자 하고, 한쪽이 특검을 요구하면 다른 쪽은 국정조사까지 주장한다. 실체는 사라지고 ‘묻고 더블로 가는’ 베팅전만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됐던 부동산 정책 역시 ‘향후 5년간 주택 ○○만채 공급’이라는 각 후보들의 대표 공약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와 유권자의 눈이 온통 야권 단일화의 향배에 쏠린 사이, 정작 꼭 짚어야 할 논쟁이 뒤로 밀린 것이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란 정치인들이 시민에 대한 책무를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세훈-안철수 후보의 지리멸렬한 단일화 다툼이 우리 정치에 미치는 가장 큰 해악은, 어쩌면 시민들이 이런 선거의 의미를 잊게 만드는 데 있을지 모른다.
노현웅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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