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잡지 '자유의 벗'에 소개된 한국우주과학연구회. 서울SF아카이브 제공
곧 출범할 새 정권에서는 항공우주청(가칭)의 창설이 기정사실이다. 벌써 유치를 둘러싼 지역 간의 눈치 싸움이 치열하다. 그런데 항공우주청 창설과 함께 민간 차원에서 우주 문화의 저변을 확장할 구상도 필수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와 관련해서 이미 60년도 더 전에 우리에게 있었던 좋은 선례를 소개한다.
1957년에 옛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우주로 쏘아 올린 뒤, 미국을 필두로 한 세계 각국에는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가 몰아쳤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여파가 이태 뒤인 1959년에 정점에 올랐다고 할 만하다. 1959년에 최초의 국산 로켓 발사 공개실험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한우주항행협회(Korean Astronautical Society)’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아마추어 동호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 학계와 군 등에서 로켓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대부분 참여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한국학생우주과학연구회(나중에 ‘한국우주과학연구회’로 개칭)’도 발족했다.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우주과학회보’(나중에 ‘우주과학월보’로 개제)를 발행하고 대중강연회를 여는 등 우주개발과 관련된 여러 지식과 문화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이런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국가 차원의 관심이 꾸준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오늘날 이 단체들의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조직의 맥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불과 2, 3년만에 흐지부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제1공화국에서 싹텄던 우주개발을 향한 열정은 제2공화국에서도 계속 이어져 인공위성 탑재체 제작 시도까지도 나왔지만,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제3공화국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그라들고 말았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장거리 로켓 발사체 제작을 탐탁지 않아 했던 미국의 눈치를 봤다는 말도 있고, 민생경제가 우선시되는 시국에서 우주개발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시각도 있다.
그래도 60~70년대를 거쳐 민간의 우주개발에 대한 관심은 계속 불씨가 남아 있었다. 1971년에는 ‘한국우주로케트클럽’이 발족했는데, 비록 아마추어들의 모임 성격이었지만 자체 제작한 로켓 발사 실험을 수십 차례나 하고 강연회와 전시회도 여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회장을 맡았던 대학생 채연석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훗날 항공우주연구원장이 되어 나로우주센터를 건설하게 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우주개발 붐의 특징은 민간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스페이스엑스나 블루오리진 같은 기업들은 이미 발사체 임대나 우주 관광 등의 비즈니스 모델을 상업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대기업부터 중소기업, 스타트 벤처기업까지 숱한 업체들이 이미 우주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우주산업 시장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려면 무엇보다도 대중들의 더 많은 관심과 성원이 필수적이다. 문화적 저변 없이 경제 프레임으로만 접근해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 정부에서는 민간의 우주개발 관련 활동을 북돋우고 지원하는 정책적 배려가 나오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대한우주항행협회의 재건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우주개발은 궁극적으로 인류의 시공간적 시야를 넓혀 문명의 성숙도를 높이는 길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이런 장기적 사고를 바탕으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