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발매된 박시춘의 ‘올특수무그 6집' 엘피음반 재킷 뒷면에 실린 신시사이저.
1970년대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 국립과학관에 갔더니 무척이나 낯선 음악이 귀를 잡아끌었다. 기계가 일정한 톤으로 ‘아아-’하고 내는 듯한 코러스 음향을 배경으로 ‘뚜 뚜뚜 뚜-’하는 모스 부호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사람의 목소리가 ‘라디오 액티비티’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말한다. 훗날 알고 보니 독일 전자음악 그룹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곡이었으며 제목인 ‘라디오 액티비티(Radio-Activity)’는 방사능, 그리고 무선전파 통신을 동시에 의미했다.
위 곡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75년인데, 그즈음은 우리나라에서도 대중가요들을 신시사이저로 새롭게 연주한 음반들이 줄줄이 나와 전자음악이 시선을 끌기 시작한 때이다. 특히 대중음악 작곡가로 유명했던 박시춘이 유명 가요들을 편곡해 ‘특수무그음악’이라는 제목으로 잇달아 낸 연주곡집이 인기였다. (당시 연주는 당대 최고의 아코디언 연주가로 꼽히던 심성락이 맡았다. 그는 금년 초에 80대 중반의 나이로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바 있다.) 여기서 ‘무그’란 신시사이저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상업화한 발명가 로버트 무그(Robert Moog)를 말한다.
전자악기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기 장치를 이용해 소리를 음계로 내는 일종의 전자오르간인 ‘텔하모니움’이란 악기가 1890년대에 미국에서 특허를 받았는데 이것이 사실상 세계 최초의 전자악기이다. 그리고 1920년에 발명된 ‘테레민’이란 악기는 지금도 쓰인다. 김건모의 곡 ‘사랑이 떠나가네’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소리가 바로 테레민으로 연주한 것이다. 테레민은 악기에 손을 대지 않고 허공에서 전자기장을 교란하는 특이한 연주법을 쓴다.
무그 신시사이저는 1960년대에 처음 선을 보였다. 그전까지 신시사이저는 진공관을 썼기 때문에 크기도 어마어마하고 전기도 많이 먹었으나 무그는 트랜지스터를 이용하여 부피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큰 덩치라서 요즘의 키보드형 신시사이저처럼 들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고 스튜디오에 고정해 놓고 써야 했지만.
무그 신시사이저의 전성기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내 저물고 말았다. 트랜지스터보다 훨씬 소형화가 가능한 IC칩이 개발되면서 악기 크기도 더 작아졌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방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무그가 만든 신시사이저는 기계음을 연주만 할 수 있을 뿐 메모리나 프로그램 기능은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야마하나 롤랜드, 코르그 등 일본 회사들이 디지털 신시사이저를 속속 내놓으면서 시장 판도가 완전히 뒤집혀 현재 무그 신시사이저는 추억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디지털 신시사이저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기술적 특이점’ 이론 등으로 유명한 미래학자이자 발명가인 레이 커즈와일이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던 커즈와일은 1984년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신시사이저를 내놓았는데, 실제 피아노의 소리와 음색을 놀랍도록 똑같이 재현해서 커다란 시선을 끌었다.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 반젤리스, 드림 시어터, 장 미셸 자르 등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커즈와일의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바 있다. 커즈와일은 1990년에 자신의 악기 회사인 ‘커즈와일 뮤직 시스템즈’ 지분을 모두 한국의 영창악기에 매각했으며 그 뒤 현대산업개발이 다시 2006년에 영창악기를 인수했다. 현재 커즈와일은 이 악기 회사의 주인은 아니지만 여전히 최고전략책임자로 남아 있다.
처음에 소개했던 장면, 즉 70년대에 국립과학관에서 크라프트베르크의 곡 ‘라디오 액티비티’를 틀어놓았던 사실은 돌이켜보면 꽤 아이러니하다. 곡의 내용은 방사능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선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한창 건설 중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엄청난 방사능이 유출된 뒤 세계적인 음악가인 사카모토 류이치는 2012년부터 탈원전을 표방하는 ‘NO NUKES’라는 록 페스티벌을 열기 시작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초대된 그룹이 크라프트베르크였다. 이들은 가사를 일본 상황에 맞춰 개사한 뒤 일본어로 불러 시선을 끌었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