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금언을 새삼 떠올리게 해줬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화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의 일부. 가운데 두 사람 중 왼쪽이 플라톤, 오른쪽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위키미디어코먼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연결(connection)이라는 화두로 전개될 새로운 칼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빌려 시작해본다. 이 고대의 금언은 이천년도 넘는 시간을 관통해 지금의 팬데믹 현상에서도 발현되고 있다. 원문은 ‘폴리스의 동물(zoon politikon)’로 적혀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의미하는 폴리스는 성벽으로 둘러진 요새에서 기원한 단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인간은 ‘경계가 존재하는 집단’ 속에서 존재한다고 풀어 쓸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집단은 울타리 속의 가축이나 늑대 무리 등의 단순한 떼거리의 의미가 아니다. 자급자족이 지속되는, 체계적인 조직과 법률로 운영되는 문명 집단을 의미한다.
도시 국가에서 시작된 역사는 다양한 사회 집단들이 전쟁과 화합을 반복하며 연결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명 집단의 연결 규모는 점점 더 커졌으며, 현대에는 국경을 경계로 하는 국가까지 확장된 상태이다. 그리고 새롭게 맞이한 21세기에는 세계화라는 거대한 연결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광학 현미경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한 작은 바이러스가 끼어들면서, 세계화의 톱니바퀴는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코로나라는 생소한 단어는 삼년 전 갑자기 뉴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노(10억분의 1m) 크기의 유전물질에 불과한 이 바이러스는 놀라운 속도로 우리 일상을 잠식했다. 사회는 구성원의 연결을 전제로 성립된다. 특히 고도로 조직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과의 연결 없이는 생존이 어렵다. 바이러스는 이 연결 고리를 타고 전파가 된다. 코로나19는 인간이라는 단일 종이 숙주다. 즉 감염이 가능한 사람이냐 아니냐만 중요할 뿐, 원시적인 바이러스에게 국가나 국경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신종 바이러스는 인류 공통의 문제다. 하지만 이와 싸워야 할 방역은 국가 단위로 작동한다. 인류와 국가라는 공격과 수비 범위의 불일치가 팬데믹의 동력이다,
이번 팬데믹이 마지막 일거라 예측하는 전문가는 없다. 지난 삼년간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진단법, 백신, 치료제 등의 과학적 대응 수단이 빠르게 개발되었다. 동시에 다양한 방역 전략도 계획되고 수행되었다. 코로나라는 단어에 익숙해질수록 과학적 지식, 방역전략, 대중 상식은 축적되고 확장되었다. 그럼 지금 상황에서 질문을 하나 생각해보자. 다음 팬데믹이 닥쳤을 때 우리는 더 잘 대응할 수 있을까?
코로나바이러스는 머리카락 굵기의 1000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크기의 유전물질에 불과하지만 놀라운 속도로 우리 일상을 잠식했다. 비주얼캐피탈리스트
이 간단한 질문에는 ‘왜’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왜 팬데믹은 발생하였나? 왜 변이는 꼬리를 물고 출현하였나? 왜 국가별로 피해는 차이가 났는가? 등등…. 바이러스라는 좁은 범위에 국한하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팬데믹 ‘현상’은 바이러스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움직일 수 없는 무생물인 바이러스 입자를 전파하는 것은 집단 속에서 서로 연결된 인간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복제와 전파에는 집단 개념이 들어가지 않는다. 각각의 바이러스 입자는 자기 유전자를 복제하기 위해서만 작동한다. 하나의 숙주 세포에서 복제되어 새롭게 생성되는 수천개의 바이러스에게 형제라는 개념 따위는 없다. 이들은 단지 같이 복제된 클론(clone)의 집합에 불과하다. 각각은 유전자 복제를 위해 경쟁하는 단일 개체로만 작동한다. 숙주 감염에 성공해 증식하거나 아니면 실패하거나, 한 바이러스 입자에겐 오직 두 가지 갈림길만 존재한다. 성공하면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고 사라진다. 실패하면 그냥 사라진다. 살벌한 적자생존의 원리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방역에서는 적자생존이 적용될 수 없다. 인간은 집단에서 살아간다. 현대 사회에서는 좋던 나쁘던, 알던 모르던 타인과 연결이 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 방역이 어려운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사람 사이의 연결 고리를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가 되기 때문이다. 너무 추상적이라면 생활하면서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세어보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스쳐가는 사람들도 모두 바이러스 전파의 연결고리가 된다.
1918년 스페인독감 유행 당시 미국 캔자스주의 한 병원. 위키미디어코먼스
과학적 측면만 고려하면 지긋지긋한 팬데믹을 당장이라도 끝장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식량을 싸들고 틀어박혀 당분간 서로 완전 격리하면 된다. 두명 이상이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공기를 공유해야 전파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가 동시에 이런 완벽한 격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이러스 전파를 간신히 통제하는 격리조차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코로나 제로 정책을 열심히 수행한 중국을 보면 알 수 있다.
방역은 집단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본질이다. 격리, 록다운(봉쇄), 마스크, 백신 등 모두가 개인의 자유 의지를 제한하는 것이다.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 타인의 건강, 혹은 집단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보면 강제 방역이 올바른 결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의 개념이 들어가면 어려운 문제가 된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바이러스를 막기 위한 방역 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된다. 하지만 방역으로 인한 피해는 사람마다 다른 크기로 다가선다. 누군가에겐 가벼운 불편이지만 누군가에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르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개인 사정을 일일이 고려하면 바이러스는 그 틈새로 흘러나간다.
<반지의 제왕>을 쓴 J.R.R. 마틴은 “우리 모두는 자기 이야기의 영웅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집단으로 확대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 이야기 속에서는 악당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에서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이익이 남의 손해가 될 수 있고, 나에게 나쁜 일이 타인에겐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팬데믹은 집단과 개인 자유 의지의 균형이라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격리, 백신, 마스크 등의 방역 조치를 취했을 때(왼쪽)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때(오른쪽)의 바이러스 확산 차이.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회는 제도와 법령을 통해 이해 충돌을 조절한다. 우리나라에는 감염예방법이 있으며 대상 병원체, 방역 행위, 처벌 범위 등이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제정과 시행은 전염병의 뒤를 따라간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정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종 바이러스는 미증유의 상황이다. 특히 코로나19는 대량의 바이러스 유전자 검사와 분석이 가능해지고 나서 발생한 최초의 팬데믹이다. 추적을 통해 어제까지 통했던 방역 원칙이 오늘 새롭게 등장한 변이에는 통하지 않는 상황이 빈번히 드러났다. 극단적인 예지만 같은 행동이라도 어제까지는 법을 어긴 것이고 오늘은 아닌 상황이 된다. 비록 과학의 발전이 이런 보이지 않던 문제를 드러냈지만, 이는 과학이 풀지 못하는 영역이다.
이제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다음 팬데믹에서 더 잘 대응할 수 있을까? 바이러스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대응 수단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이 퍼져 나가고 문제를 일으키는 배경인 인간 집단 혹은 사회에 대한 이해와 논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제대로 적용할 수가 없다. 특히 지금처럼 국가 이기주의나 불신이 팽배해져가는 상황에서 다시 팬데믹이 닥친다면 암울한 예측만 가능하다. 원시적인 코로나19가 첨단 문명에 역설한 것은 공감과 협력의 중요성이다. 실제 데이터의 분석 결과 방역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에는 대중 캠페인과 투명한 정보 공개가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사회적 합의와 협력은 대중의 신뢰와 공감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공감을 주도하는 것은 인문학의 영역이다. 인문학은 과학과 뚜렷한 연결점이 없어 보인다. 과학은 냉정하며 인간의 사정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왜(why)와 어떻게(how)를 구분하면 연결점이 보인다. 왜 과학을 하는가? 개인에게는 명예나 이익을, 사회에는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과학을 하는가? 연역법 혹은 귀납법 같은 엄밀한 추론 방법에 기반을 두고 가설을 증명하여 예측 가능한 법칙을 도출한다. 이것은 과학적 방법론의 영역이다.
사람 사이의 연결 혹은 소통에 대한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로뎅 미술관의 지옥문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 조각. 위키미디어코먼스
사람이 수행하기 때문에 과학에도 욕망이나 희망이 투영된다. 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냉정하고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되어야 한다. 현대 과학의 힘은 엄격히 분리된 방법론에서 나온다. 만약 과학의 방법이 연구자의 욕망에 오염되면 연구부정이 발생하고, 방법론과 목적론을 혼동해서 전개하면 사이비나 음모론 등이 등장한다. 이미 오래 전 칼 세이건은 “귀신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단절이 만드는 여러 문제들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이번 팬데믹에서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눈부신 성과의 깃발을 날리며 앞서 달려가는 과학이지만, 철학과 과학은 원래 한 뿌리에서 출발했다. 가설 설정, 엄밀한 증명, 원리 도출로 이어지는 과학적 방법론을 기본 틀로 가지는 현대 과학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에서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 가지를 친 사람이 바로 아이작 뉴턴이다. 이런 배경을 갖고 있기에 그의 역작의 제목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된 것이다. ‘프린키피아’로 더 유명한 이 책은 물리학의 시발이자 현대 과학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뉴턴 이후 과학은 연구 대상에 따라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사회학 등등 다양한 학문 분야들로 파생되었다. 분야에 따라 다루는 대상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공통점은 다양한 대상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작용하는지 규명하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 방법론의 적용은 기본이다. 그리고 경계를 지닌 단위들이 연결되어 더 큰 단위를 만드는 현상이 반복되며 관찰된다. 생물학을 예로 들면 유전자 단백질 같은 생체 고분자들이 모여 세포를, 세포가 모여 조직을, 조직이 모여 기관을, 기관이 모여 한 사람을 구성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사람 사이의 연결이 대상이 되는 인문학이 등장한다.
중세 암흑시대를 끝내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것은 인문학이다. 자연철학에서 과학을 분리시킨 뉴턴은 최후의 르네상스인으로도 불린다. 이렇게 과학의 탄생을 견인한 인문학이 쇠락해 가는 현재 상황을 보면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머리만 거대해지는 기형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과학적 지식의 양 자체는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그런데 지식으로 머리를 가득채운 현대인이 고대인보다 더 지혜롭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 사이의 연결 혹은 소통에 대한 고민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눈부신 성취를 하더라도 제대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인문학적 고민이 동반되어야 한다. 과학은 인문학에 연결되어 있다.
주철현/울산의대 미생물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