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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디지털 시대 살아남은 ‘100년 베스트셀러’

등록 2017-04-03 12:39수정 2017-04-03 13:40

[박상준의 과거창]
조선총독부 펴낸 ‘조선민력’부터
2017년 민간 출판 ‘대한민력’까지
노인세대와 사라지고 마는 걸까
‘춘궁기 보릿고개를 극복하자’는 말이 쓰인 1941년 <조선약력>(왼쪽)과 2017년 <대한민력>의 3월 부분. 편집 디자인이 일제시대와 사실상 다를 바 없다.  서울SF아카이브 제공
‘춘궁기 보릿고개를 극복하자’는 말이 쓰인 1941년 <조선약력>(왼쪽)과 2017년 <대한민력>의 3월 부분. 편집 디자인이 일제시대와 사실상 다를 바 없다. 서울SF아카이브 제공
100년이 넘도록 해마다 새로운 개정판이 나와서 꾸준히 판매되는 출판물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기상대에서 편찬했고, 지금은 한국천문연구원이 공표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민간 출판사가 펴낸다. 바로 민력(民曆)이다.

이 책자는 놀랍게도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표지나 내지 디자인에 큰 변화가 없다. 지금은 컴퓨터로 조판과 편집을 하고 출판사의 홈페이지 주소가 인쇄되어 있는 정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민력>(朝鮮民曆), 일제 막바지인 1937년부터는 내용이 일부 줄어서 <조선약력>(朝鮮略曆),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력>(大韓民曆)이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민력은 민간에서 쓰는 달력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은 월과 일의 날짜만이 박혀 있고, 절기나 국경일, 기타 기념일 등이 조그맣게 주석처럼 붙어 있거나 그마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원래 민력에서는 하루하루가 다 육십갑자에 따라 다르게 이름이 있고, 음양오행 등의 원리에 따라 길흉도 매겨져 있었다.

이런 민력은 사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류 문화의 소산이다. 원시 인류가 처음 농경을 시작할 때 계절에 따른 기상의 변화를 알아야만 했다. 언제 우기가 되고 언제 겨울이 닥치며 매년 태풍이나 가뭄은 언제쯤 오는가? 이런 계절 변화의 규칙성은 밤하늘의 천체를 관측하면서 파악되었다. 태양의 높이와 뜨고 지는 시간,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주기, 행성과 별자리들의 움직임 등등이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세대를 거치며 기록되고 정리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역법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역법은 태양력, 그중에서도 그레고리력이다. 태양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이며, 그레고리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시행한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각국의 전통적인 역법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모두 고려한 태음태양력이었다. 흔히 우리가 ‘음력’이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 역법이다. 우리나라는 1895년에 음력 11월17일을 양력 1896년 1월1일로 정하면서 그때부터 그레고리력을 쓰기 시작했다. 을미개혁의 하나로 시행된 것이다.

1924년 <조선민력>과 2017년 <대한민력> 표지를 나란히 놓은 것인데, 표지의 느낌도 비슷하다.  천문연구원, 서울SF아카이브 제공
1924년 <조선민력>과 2017년 <대한민력> 표지를 나란히 놓은 것인데, 표지의 느낌도 비슷하다. 천문연구원, 서울SF아카이브 제공
지금처럼 달력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민력이 일반인들의 생활 지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나온 민력을 보면 각종 기념일과 절기일 등은 물론이고 매일매일의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 달이 차고 이지러진 정도, 그리고 만조와 간조 시간이 모두 나와 있다. 그리고 매달마다 계절 변화 등에 따른 그즈음의 중요 사안들까지 표어처럼 인쇄해놓았다. 예를 들어 1941년에 나온 약력의 3월을 보면 춘궁기이니 용기를 내서 보릿고개를 극복하자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책 뒤쪽엔 양력과 음력의 대조표, 지역별 월평균 기온, 강수량, 평균 풍속, 평균 습도, 수렵이나 채취를 금지하는 야생동식물, 임업 및 어업 편람, 도량형표, 통신요금표, 국세 및 지방세 납부기일표에다 한반도 전국의 도로 및 철도 지도까지 붙어 있다. 그야말로 집집마다 비치해 두지 않을 수 없는 요긴한 생활정보지였던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 소책자의 맨 앞 장이 ‘아침마다 궁성을 향해 요배하자’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책자 전반에 걸쳐 ‘대일본제국 황국신민’으로서 애국하는 자세를 주입하는 내용이 배어 있다. 일본의 축제와 기념일, 일본기 도안과 게양 방법, 대동아공영, 국어(일본어) 사용 장려 등등. 흔히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을 얘기하지만, 이 책자야말로 일상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진 체계적인 세뇌 수단이었던 셈이다.

민력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숨은 베스트셀러였다는 기록이 있다. 수익이 보장되었기에 출판사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민력을 기억하고 요긴하게 보는 노인 세대가 점점 줄고 있다. 아마 40대 이하라면 이런 책자가 매년 나온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과연 민력이 종이책으로는 언제까지 출판될지 자못 궁금하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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