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2004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15면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는 젊은이의 거리다. 5월 8일 오후 4시, 주말을 맞아 연인들이 몰려나온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노재우(65)씨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겨레신문입니다’를 외치며 한겨레 구독 홍보전단을 열심히 나눠주고 있었다.
양복을 차려입고 전단을 나눠주는 노재우씨 주변에는 연극 값 50% 할인권이나 패스트푸드 가게 광고지를 뿌리는 10대 후반 젊은이들이 서성거렸다. 대학로를 덮은 형형색색으로 차려입은 젊은이들 물결 속에 그는 섬으로 홀로 떠 있었다.
이날 노씨는 대학로에서 2시간 동안 아들뻘,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의 손에 어렵게 300여 장의 홍보전단을 쥐여줬다. 행인 10명 중 7~8명은 앞만 보고 걸으며 노씨가 내미는 홍보전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몇몇은 숫제 노씨를 잡상인 취급하기도 한다.
“30대는 ‘한겨레신문입니다’라고 하면 받아가는 사람이 꽤 있는데, 20대 젊은이들이 영 관심이 없어요. 빨리 한겨레 부수를 늘려 한국사회의 여론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는 한겨레 구독 홍보물에 대해 “누구나 만화형식은 좋아하더라. 잔글씨로 쓴 글은 잘 읽지 않는다. 감동적인 문구를 큰 글씨로 인쇄하면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란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대학로에서 3시간가량 ‘한겨레를 보자’며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한겨레신문을 사랑하는 모임(한사모)’ 회원들과 자발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먼저 한겨레신문사 직원도 아닌데 스스로 나서서 한겨레를 홍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궁금했다. “한겨레가 희망이기 때문에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 한다”고 짧게 대답했다.
한겨레 열성 독자 가운데는 몇 해째 신문을 차곡차곡 모아둔 사람들이 꽤 있다. ‘신문을 모아뒀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뜻밖에도 “하나도 없다”고 했다.
“집에서 한겨레를 보고 나서 주위 사람에게 주거나 밖에 나갈 때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지하철 선반 위에 두고 내려요. 내가 보고 나서 그냥 갖고 있으면 나 한 명밖에 못 보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전철에 두고 내리면 한 명이라도 더 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노재우씨는 한겨레 창간독자다. 주식도 1천 주 갖고 있다. 그는 한겨레뿐만 아니라 〈한겨레21〉 등 한겨레신문사에서 내는 매체, 단행본 등을 빼놓지 않고 읽는 열성 독자다. 1990년대 초반 한겨레 경영진에게 신문뿐만 아니라 시사주간지도 창간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는 한겨레 출판사업부에서 펴낸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쓴 책을 10여 권 사서 주위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한겨레를 권유하기가 쉽지 않지만 부지런히 설득하고 있다”며 “내 권유로 한겨레를 보게 된 사람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한겨레 구독 전도사’를 자처하는 그를 보고 젊었을 때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을 꽤 열심히 했을 것으로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기술자 출신의 은퇴한 기계공장 사장이다. 사회운동이나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스스로를 “60년 넘게 살았지만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고 나약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그는 60, 70년대 울산 공업단지 건설, 소양강 댐 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70년 중반부터 24년 동안 서울 영등포에서 기계 공장을 경영하다 은퇴했다. 그가 경영했던 업체는 직원이 30여명에 불과했지만 폐수처리 기계에 대한 독보적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었다.
그는 가난했던 집안 형편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국군으로 전사했던 형님 3명의 영향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일찍 눈을 떴다.
“한국전쟁 때 힘없고 못 배운 사람들만 희생당하고 높은 자리 사람들은 빠져나가는 현실을 보면서 반골기질이 싹텄지요. 하지만 가난 때문에 당한 고통을 후대가 겪지 않도록 열심히 일했습니다. 가족들 먹여 살려야 했고 …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다른 곳에는 한눈팔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70년대 소양감 댐 공사에 제때 납품을 하려고 보름 동안 전 직원들이 회사에 남아 하루 4시간씩만 자고 일을 했던 적도 있다. 그는 요즘 보수세력들이 칭송하는 60, 70년대 산업화 세대의 전형처럼 보인다. 이런 그가 어떻게 ‘한겨레 구독 전도사’가 되었을까. 그와 한겨레는 ‘원칙’이란 코드가 통했다. 그는 은퇴하던 97년까지 기업 경영과 기술 개발 말고 한눈판 적이 없었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주식과 부동산에 관심 돌리지 않고 기술개발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주변에서 ‘남들이 부동산 해서 수백억원씩 벌 때 뭐했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어요.” 그는 “24년 동안 기업하면서 공장터를 한번도 옮기지 않았다”며 다른 기업들이 공장터를 확보한다는 빌미로 은행돈을 끌어들여 땅 투기해 돈 버는 동안 큰돈을 벌지 못했지만, 절반쯤은 성공한 기업인이었다”고 자평했다. 그는 언제나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79년 11월 경영하던 기업에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요즘 주 5일 근무제가 퍼져나가고 있지만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우리 같은 소기업이 주 5일 근무를 하니까 ‘주제를 알라’는 핀잔을 합디다. 하지만 사람들이 충분히 쉬면서 호연지기도 키우는 게 능률적이라고 봤지요.” 그는 주 5일 근무제 도입 뒤 2년 동안 토요일에 혼자 공장에 나와 전화를 받고 찾아오는 손님 접대를 했다.
88년 그는 한겨레 주식 1천 주(500만 원어치)를 사서 한겨레의 주춧돌에 힘을 보탰다. 당시 500만원은 그가 운영하던 공장 직원들의 한 달 치 봉급과 거의 맞먹는 금액이었다. 당시 그의 기업 사정도 넉넉지 않았다. 기업 시작한 지 10년 동안은 빚을 갚아야 했고 88년쯤 겨우 이익이 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박정희·전두환 집권 시절의 부패와 부조리에 분노하던 터에 사회가 바로 서려면 바른 말을 하는 언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다른 언론들은 정부의 채찍과 당근에 길들여져 이런 구실을 할 수 없다고 봤지요. 한겨레 주식은 투자가 아니라 기부하는 마음으로 샀어요.”
88년 당시만 해도 기업하는 사람이 한겨레 주식을 사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결정이었다. ‘한겨레 주식을 산 뒤 기업활동에 지장을 받은 적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실 좀 걱정을 했는데 노태우 대통령의 동생이 나와 이름이 같고 나이도 비슷했는데 이 덕을 좀 봤다. 공무원들이 나를 노태우 대통령의 가까운 친척으로 여기고 별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불균형, 부조리를 청산하는 데 한겨레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한겨레 구독 권유를 하면 ‘빨갱이다’ ‘전라도다’ ‘정보가 빈약하다’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이슈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한겨레를 봐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가 생각하는 한겨레는 이편저편 들 것 없고 사실대로 보도하는 유일한 신문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4년 뒤에는 한겨레가 발행부수가 100만 부가 될 것으로 믿는다.
대학로에서 구독 홍보 활동을 마치고 종로의 한사모 모임 자리로 가는 택시 안에서도 홍보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택시 기사에게 ‘한겨레는 6만3천 명의 주주가 만든 신문이다. 이 신문만이 권력과 금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한 뒤 한겨레 구독 전단을 택시에 두고 내렸다. 그는 식당에 가서도 주인에게 “무슨 신문 보십니까”를 묻고 “아무리 그래도 한겨레를 보시라”는 구독 권유를 빼먹지 않았다.
글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지난해 7월 중순 한겨레사랑모임 회원들이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한겨레> 홍보를 하고 한 자리에 모였다. 뒷줄 오른쪽 끝이 노재우 회장.
한겨레 구독 전도사 노재우씨(한겨레를 사랑하는 사람 모임 회장). 사진/김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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