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 위치한 식당들 대부분은 비건 메뉴 혹은 채식으로 주문이 가능한 메뉴가 표시되어 있다. 박소현씨 제공
영국에 온 뒤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이다. 한국과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먹는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지난 2년 동안 밥 문화가 중요한 한국에서의 채식 생활은 사람을 금세 지치게 만들었다. 친구와 밥 한 끼를 먹으려면 근처 채식 식당을 검색하고 메뉴를 선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눈치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런 채식하는 내게 런던은 밥 먹기 정말 좋은 곳이다. 런던은 어디를 가든 동물성 식품이 전혀 없는 ‘비건’ 메뉴를 판매하고 채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매우 높은 편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올해 영국에서 약 50만명 이상이 비거뉴어리(비거니즘을 새해 목표로 세우는 캠페인)를 선언했다. 그중에서 수도 런던은 152개의 비건 식당을 가진 채식주의자들에게 가장 친화적인 도시다. 그렇다 보니 식당에 가서 동물성 재료가 들어갔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대부분 메뉴판에 비건 메뉴 혹은 채식 주문 가능 여부를 표기하고 있다. 음식을 주문할 때 일일이 물어보는 번거로움이 없으니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먹고 싶은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어떤 카페를 가도 대개 식물성 음료(두유, 귀리유, 아몬드유 등)를 선택할 수 있어서 마시는 음료의 폭도 넓어졌다. 런던 친구들에게 한국 카페에서 우유가 들어가지 않는 음료가 거의 없어서 한겨울에도 과일 스무디를 마셨다는 필자의 이야기는 우스갯소리로 전해지고 있다.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트 체인인 ‘세인즈버리스사’의 고기를 넣지 않은 조리제품 코너. 대체육 관련 제품 판매하고 있다. 베지테리언을 위한 과자들도 있다. 박소현씨 제공
영국 런던대학교의 교내 카페 메뉴판. 카페에서는 비건 샌드위치뿐 아니라 메뉴판 아래 적힌 것과 같이 다회용기 이용과 두유 등 동물성 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대체 음료를 추가요금 없이 제공한다. 박소현씨 제공
학교에서의 채식 생활 또한 만족스럽다. 구내식당에서는 채식 식단을 제공하고 교내 모든 카페에서는 식물성 음료와 비건 간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필자가 재학하고 있는 학과 학생들의 상당수는 비건 맛집과 요리법을 공유한다. 최근 영국의 대학교에서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탄소발자국이 큰 붉은 육류를 캠퍼스에서 퇴출하고 있어 채식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없다.
채식 인구가 많다 보니 식품 산업도 변화하고 있다. 영국의 5대 대형마트들은 자체 비건 식품 브랜드를 갖고 비건 제품 전용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시장점유율 1위인 테스코는 2018년 비거뉴어리를 선언하며 비건 브랜드인 ‘위키드 키친’을 설립했다. 작년 9월에는 대체육 시장 진출과 2050 넷제로 달성을 위해 2025년까지 대체육 판매를 2018년 대비 300% 올리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2위인 세인즈버리스는 2040 넷제로와 지속 가능한 먹거리 전환을 위해 비건 브랜드인 ‘플랜트 파이오니어스’와 ‘미트 프리(Meat-free)’ 전용코너를 보유하고 있다. 이외에도 아스다의 ‘플랜트 베이스드’, 리들의 ‘비몬도’, 엠앤에스사의 ‘플랜트’ 키친이 있다. 비건 제품에 대한 접근성이 증가하면서 마트에서는 채식을 하지 않아도 대체육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대체육이 채식주의자만이 소비하는 특별한 제품보다 대중에게 육식을 대체할 수 있는 선택지로 주어진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트에 비건 코너가 없어도 이곳에서의 장보기는 즐겁다.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제품의 성분표를 보면서 소스 하나를 살 때도 한참을 고민해야 했던 한국과 달리 이곳은 제품 뒷면의 채식 인증마크를 통해 동물성 성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채식 가능한 제품을 법적으로 표기할 의무는 없지만 민간기관의 채식 인증이 활성화되어 있다. 식품이 아닌 소비재도 해당된다. 채식을 하는 정도에 따라서 크게 베지테리안(채식) 혹은 비건으로 분류하는데 영국 식품표준국(FSA·Food Standards Agency) 가이드라인에서는 채식주의를 ‘죽거나 도살된 동물로 만들어지거나 유래되지 않은 음식’으로 정의하고 비건은 ‘살아있는 동물의 착취’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민간 채식 인증마크에는 영국채식협회(Vegetarian Society), 영국 비건 협회(The Vegan Society)와 유럽 채식 연합(EVU, European Vegetarian Union)의 브이 라벨(V-label)이 있다. 사소하지만 브이자 마크는 채식을 해서 당연하게 감수해야 했던 불편함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었다.
베지테리언을 위한 과자들도 있다. 식물이라는 뜻의 플랜드(Plant) 단어가 들어간 비건 코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박소현씨 제공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의 농축산부문은 대체 가공식품을 이용한 탈육식 사회를 예고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코앞에 닥친 시점에 내연 자동차보다 더 많은 탄소발자국을 남기는 육식 중심의 식단에서 채식으로의 전환은 어쩌면 필연적일 것이다. 영국의 식품업계는 넷제로 선언을 포함한 장기적인 지속가능한 목표 아래 점진적인 식단의 전환을 추구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비건 트렌드에 편승하여 비건 제품을 출시하고 있지만 전국민의 식단을 개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저탄소 사회는 채식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채식이 육식만큼이나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채식을 실천하는 것은 대중의 몫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와 같은 대형마트들의 진열대가 변화해야 한다.
글·사진/박소현 런던대 대학원생(환경 전공)·유튜브 <기후싸이렌> 패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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