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탈원전 정책으로 지난해 말까지 모두 폐쇄된 바이에른주 군트레밍겐 원자력발전소. 위키미디어 커먼스
지난해 말 공개된 유럽연합의 녹색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 초안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친원전 국가들이 독일을 중심으로 한 반원전 국가들과의 공방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연합 집행위가 작성한 초안에서 원자력은 녹색 에너지로 분류됐다. 하지만 정작 원전업계에서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최종 검토 중인 이 초안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들의 우려는 원자력이 녹색 에너지로 분류돼도 원전 산업 부흥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일부 분석가들의 전망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집행위의 초안은 원자력을 기후변화를 완화시키는 데 상당히 기여하는 ‘과도기적’ 에너지로 인정해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시키면서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원전 투자 프로젝트에 대한 녹색 분류를 방사성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분할 계획·자금·부지가 있는 경우로 제한한 것이 핵심이다.
신규 원전 건설과 운영을 위한 투자가 녹색으로 분류되려면 2045년 이전까지 건설허가를 받아 유럽연합 회원국 안에 건설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방사성페기물 관리와 원전 해체를 위한 기금도 확보돼 있어야 한다. 건설하려는 국가에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최종 처분시설이 있어야 하고, 2050년까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최종 처분시설을 완공해 운영하기 위한 세부 단계가 포함된 계획이 있어야 한다. 국가 안전규제기관의 인증을 받은 가용한 최고의 기술과 사고 저항성 핵연료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조건의 하나다.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을 위한 투자는 2040년까지 회원국 내에서 이뤄지는 것에 한해 녹색 투자로 분류된다. 여기에도 신규 원전과 동일한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과 사고 저항성 핵연료 사용 등의 조건이 붙어 있다. 특히 달성 가능한 최고 수준의 안전 기준과 안전 목표를 충족할 수 있는 개선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이에 대해 유럽원자력산업협회(FORATOM)는 이들 조건 가운데 특히 2050년까지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을 확보해야 하는 조건과 사고 저항성 핵연료 사용 조건에 대해 불합리하다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 단체는 지난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보낸 의견서에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설치 시점을 2050년이 아닌 실제 운영이 필요한 시기에 맞춰 늦춰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40년대에 건설허가가 이뤄지는 신규 원전이 실제 건설돼 고준위 폐기물 최종 처분장이 필요한 시기는 2050년 훨씬 이후가 될 것이기 때문에 미리 만들어둘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유럽원자력협회 커뮤니케이션 이사 제시카 존슨은 지난 주말 <유랙티브>와 인터뷰에서 “현재 상태로는 이런 조건 때문에 어떤 원자력 기관도 녹색분류체계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 특히 사고 저항성 연료는 아직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런 조건이 설정된 것을 두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원전산업 상황에 대한) 단순한 오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고준위 폐기물 최종 처분장이 2050년까지 설치 운영돼야 한다는 조건에 대해 “최종 처분장을 20~30년 동안 놀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며 수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유럽원자력산업협회는 신규 원전과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뿐 아니라 기존 원전의 운영 관련 투자, 유럽연합 역내가 아닌 역외 원전 투자까지 녹색 투자로 인정할 것도 요구하고 있다.
유럽원전 업계를 대표하는 유럽원자력산업협회의 이런 요구는 유럽연합의 그린 택소노미가 초안대로 적용될 경우 실제 원전업계가 기대하는 원전 부흥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것이라는 에너지 전문가들의 분석을 뒷받침한다.
유럽연합 집행위는 오는 21일까지 회원국과 전문가 그룹의 검토 의견을 받아 그린 택소노미 최종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이 최종안에 원전업계의 이런 요구가 수용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