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환경활동가 니나(12)가 최근 미국 플라스틱 폐기물이 도착한 것에 항의해 미국 할인매장업체 타겟 가방을 펼쳐보이고 있다. 바젤행동네트워크(BAN) 제공
지난해 1월 세계 187개국은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처리에 관한 국제협약’인 바젤협약 개정안에 서명했다. 개정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항목은 플라스틱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을 규제하는 조항이다. 하지만 비영리 환경기구 ‘바젤행동네트워크’(BAN·밴)의 최근 국제무역 통계분석 자료를 보면, 바젤협약 개정안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월 이후 미국, 캐나다와 유럽연합은 수억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다른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플라스틱 폐기물 대부분은 매립되거나 소각되고 일부는 자연 환경에 그대로 유기되고 있다.
바젤협약은 1992년 스위스 바젤에서 발효된 유해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처리에 관한 국제협약으로, 처음에는 수은 및 살충제 같은 물질이 적용 대상이었다. 2019년 협약 회원국들은 플라스틱 폐기물에 관한 새로운 지침을 추가했다. 지난해 1월 발효된 협약의 주요 개정사항은 단일 재질로 돼 있거나 페트(PET)·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 3종으로만 혼합된 폐플라스틱만 국가 간 이동이 가능하고, 나머지 플라스틱 폐기물은 수입국의 사전 서면동의를 받아야 이동이 가능하다는 조항이다.
중국은 이미 2017년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을 제한하기 시작하고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도 2019년 수입 금지나 제한 조처를 내렸다. 우리나라도 2020년 페트(PET)·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폴리스틸렌(PS) 등 4가지 품목 수입을 금지했으며, 바젤협약 개정안 발효와 상관없이 수입 금지 조처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프랑스 해운업체 ‘CMA CGM’가 일체의 플라스틱 폐기물 선적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2021년 미국에서 수출된 플라스틱 폐기물이 도착한 국가들. 바젤행동네트워크(BAN)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바젤협약 개정과 코로나19 영향으로 플라스틱 폐기물이 개발도상국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국제 플라스틱 폐기물 거래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바젤협약을 아직 비준하지 않은 8개 국가의 하나인 미국은 지난해 멕시코, 말레이시아, 인도, 베트남 등 바젤 당사국에 36만톤 이상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수출했다. 바젤협약은 회원국이 규제된 플라스틱을 비회원국과 거래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어 이런 거래는 위법 행위이다. 밴은 “합법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의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생수병 페트(PET)처럼 단일 고분자로 분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미국의 국내 재활용 산업에서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기준이다. 밴 설립자인 짐 푸켓은 “미국에서 플라스틱 폐기물을 다른 물질이 5% 이하로 오염된 단일 고분자로 분리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국내에서조차 플라스틱 폐기물을 분류하지 못한다면 수출용 폐플라스틱은 어떻게 분류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미국은 지난해 54만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수출했다. 한국도 미국에서 3100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수입한 것으로 밴 자료에 나와 있다.
특히 미국은 말레이시아, 멕시코, 인도 등에 폴리염화비닐 폐기물을 수출했다. 폴리염화비닐(PVC)의 경우 카드뮴, 납 등 첨가제가 들어 있어 바젤협약에서 유해 폐기물로 분류돼 회원국 사이의 거래와 비회원국과의 거래 모두 금지돼 있다. 한국도 110톤을 수입한 것으로 집계됐다.
밴은 유럽연합도 협약을 위반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가 아닌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개발도상국들은 유럽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계속 수입했다. 2020년 월 평균 8300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수출하던 네덜란드의 물량은 지난해에는 월 평균 1만8600톤으로 급증했다.
그린피스 터키 활동가가 지난해 11월 터키 아다나주 세이한에서 ‘버려진 땅’이라는 쓰인 플래카드 뒤에 앉아 플라스틱 폐기물 더미를 조사하고 있다. 그린피스 제공
플라스틱 폐기물이 폐기물 관리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로 이동하면 사람과 환경에 장기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재활용되지 못한 플라스틱은 결국 소각돼 지역사회와 먹이사슬을 오염시키는 해로운 화학물질을 방출한다. 또 플라스틱이 통제되지 않는 폐기 장소에 버려지거나 자연환경에 직접 유기돼 수자원을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손상시킬 수 있다. 플라스틱 수입대국인 필리핀은 플라스틱 폐기물의 유입이 너무 막대해 마닐라 주민들을 병들게 하고 해안이 가로막혔다. 최근 그린피스가 터키 아다나산업단지 주변 10곳을 표본 조사한 결과 영국과 독일에서 수입한 플라스틱 폐기물을 버리고 소각한 장소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오염 물질을 발견했다. 또 인도네시아 비정부기구 에코톤(Ecoton)은 세계 최대의 종이 재활용 시설에 인접한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를 발견했다.
바젤협약의 강제 여부는 대부분 개별 회원국에 달려 있기 때문에 플라스틱 폐기물 거래 위반을 단속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밴은 밝혔다. 플라스틱 수입업체는 수출국에서 대가를 받고, 또 일부 플라스틱 폐기물은 산업 및 제조를 위한 신제품으로 재활용할 수 있어 바젤협약을 엄격하게 시행하는 것을 주저할 수 있다. 밴은 “플라스틱 폐기물의 불법 수입 및 수출에 대한 검역을 강화하고 각국 정부가 협약을 위반하는 업체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일 것”을 촉구했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