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산간지대에서 일하는 빙하 관리인인 파우스타 오티즈(38)가 그의 딸을 업고 걸어가고 있다. 파스토루리빙하는 1980년부터 2014년까지 576m가 녹아 없어졌다. 급격한 빙하의 해빙은 하류 지역의 홍수 위험을 높인다. 후아라즈/AP 연합뉴스
빙하 아래에는 호수가 생긴다.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내려 고이기 때문이다. 빙하 밑의 빙퇴석들도 따라 내려가 쌓이면서 호수의 제방을 만든다.
하지만, 최근의 기후변화로 빙하의 녹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호수의 물이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수압을 버티지 못하고 제방이 붕괴하면서, 하류 마을에 피해를 주는 ‘빙하홍수’(GLOF∙Glacial Lake Outburst Flood)도 잦아지고 있다. 지난해 2월 수력발전소와 댐이 붕괴하고 200여명이 숨진 인도 우타라칸드주 고산지대의 홍수도 빙하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히말라야산맥과 안데스산맥의 산간 마을은 빙하홍수의 취약지대다. 페루 안데스산맥의 팔카코차호수도 1941년 빙하홍수로 널리 알려졌다. 그해 12월13일 산사태로 거대한 빙하 조각이 호수로 떨어지면서 제방이 붕괴해 물난리가 났다. 산더미만 한 파도가 하류를 삼켰고, 18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지구온난화 시대, 빙하 근처 마을 주민들은 그래서 ‘머리 위에 물을 얹고 사는’ 공포에 떤다.
2015년 팔카코차호수 하류의 도시 후아라즈에 사는 농부 루치아노 리우야는 이런 위험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게 의아했다. 그는 독일 환경단체 ‘저먼워치’와 함께 “독일의 다국적 거대 에너지기업인 아르베에 그룹(RWE)이 빙하홍수의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홍수예방 비용을 요구하는 소송을 독일 법원에 제기했다. 이들은 비영리환경단체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의 주요 온실가스 배출원 보고서에 따라 거대 온실가스 배출원의 책임 비율을 산정했고, 아르베에에 홍수 배수시설과 조기경보시스템을 만드는 등 홍수예방 비용의 0.47%인 2만 유로(약 2700만원)를 부담하라고 요구했다.
지난 27일 페루의 고원 도시 후아라즈에서 독일의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아르베에(RWE)에 홍수예방 비용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농민 루치아노 리우야가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후아라즈/DPA 연합뉴스
29일 <아에프페>(AFP) 통신은 독일의 북부도시인 함의 고등법원이 파견한 9명의 조사단이 팔카코차호수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조사단은 이 지역 빙하의 해빙이 후아라즈의 도시 기반시설과 주민 12만명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볼 예정이다.
앞서 2016년 에센 지방법원은 루치아노 리우야의 소송을 기각한 바 있다. 당시 법원은 “개별 기업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기후변화에 책임지긴 힘들다”는 아르베에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오염원과 달리 온실가스는 각각의 배출원(기업, 가정 등)이 내뿜은 배출량이 해당 지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다른 배출원이 내놓은 배출량과 함께 전 지구적으로 쌓이면서 기상이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기업의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는 게 루치아노 리우야의 생각이다. 아르베에는 시가총액만 200억 유로(약 27조원)인 독일의 최대 발전사업자다. 싱크탱크 ‘엠버’(Ember)와 ‘석탄을넘어서캠페인 유럽’이 올해 초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아르베에는 유럽에서 석탄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은 기업이다. 최근 들어 아르베에는 독일 내 석탄발전소 11곳을 폐쇄하고 해상풍력과 태양열 발전으로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구 환경에 위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별 기업 책임 물을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
루치아노 리우야는 후아라즈 인근의 시골에서 닭과 양을 사육하면서 옥수수와 퀴노아를 재배한다. 그는 아에프페 통신에 “기업과 산업계가 지구를 위협하고 있고, 당신 또한 그 위험 속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라며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아르베에 또한 세계 전역을 오염시켰다는 건 상식”이라며 “이 기업이 책임지길 원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르베에는 “(이 소송은) 역사적인 온실가스 배출에 관한 법적인 다툼”이라며 “우리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등에서 줄곧 정부 기준을 지켜왔다”고 반박했다. 아르베에는 2040년까지는 탄소중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온실가스는 산업화를 주도한 선진국과 다국적 에너지 기업이 배출했다. 역설적이지만, 사회적∙산업적 표준을 제시하며 ‘기후정치’를 주도하는 것도 이들 국가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시한 표준을 지키는 것만으로 정의로울 수 있을까? 이들 기준에 따르면, 적어도 아르베에는 과거 배출한 온실가스와 관련한 개별 소송에서 법적으로 책임질 이유가 없다. 그게 정말 옳을까? 이번 소송을 사람들이 주시하는 이유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