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1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럽 최대 원전 단지인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포격전이 이어지면서 국제사회에 방사능 재난 발생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950㎿ 원자로 6기로 구성된 자포리자 원전 단지는 지난 3월부터 러시아군에 점령된 상태다.
로이터, 타스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 11일 자포리자 원전과 핵 시설 주변 지역에 포격이 가해졌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상대를 비난하고 나서 공격의 주체가 불분명하지만, 어느 쪽이 됐든 전쟁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방사능 재난도 개의치 않겠다는 무모함을 드러낸 것이다. 자포리자 원전 지역은 앞서 5일과 6일에도 연이어 포격을 받아 전력선과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일부가 손상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3월 초 러시아군이 점령하는 과정에서는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원전 부속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원전은 다양한 사고 상황을 상정해 이중, 삼중의 안전을 확보하도록 설계돼 있다. 하지만
군사 공격은 예외다. 세계 모든 원전의 건설과 운영에서 군사 공격을 포함한 사보타지(의도적 파괴행위)에 대한 대비는 안전(safety)을 다루는 설계가 아닌 원전 시설을 방호하는 보안(security)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이 대형 항공기를 이용한 의도적 파괴 행위를 설계 기준에 반영하고 한국도 이것을 따랐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다. 어떤 파괴적 무기에도 안전한 원전을 짓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방사능 재난 상황은 원자로나 사용후핵연료 저장 시설의 냉각기능이 상실되는 경우다. 노심 용융이나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화재로 연결돼 대량의 방사능 유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포리자 원전 지역에 떨어지는 포탄이 이런 재앙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우려다.
이런 우려가 현실화될 경우의 피해 범위는 어떻게 될까? 국제 원자력 전문가 저널인 <원자 과학자 회보>에 지난 3월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자포리자 원전 6기 가운데 1기에서만 최악의 방사성 물질 유출 사고가 나도 주변 5개국에서 최대 700만명이이 넘는 주민이 대피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 연구는 한국의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원자력공학자 강정민 박사와 미국 엠아이티 출신 핵컨설턴트인 에바 리소우스키가 공동으로 수행한 것이다.
연구진은 미사일 공격이나 포격으로 자포리자 원전 1호기의 냉각시스템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져 원자로 노심 용융과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에 화재가 발생한 상황을 가정해 시뮬레이션 분석을 진행했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사용후핵연료 저장조의 냉각 시스템이 바로 회복되지 않으면 원자로에서 꺼내 온 지 몇 개월 안 된 핵연료의 온도가 섭씨 1000도 정도까지 높아지면서 지르코늄 피복재에 불이 붙어 방사선을 방출하고, 다른 사용후핵연료의 화재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의 시뮬레이션에 적용된 자포리자 1호기의 방사성 물질 방출량은 세슘137 기준으로 노심 용융의 경우 157PBq(페타베크렐·1000조Bq),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화재의 경우 590페타베크렐이다. 노심 용융보다 사용후핵연료 저장조 화재 때 세슘137 방출량이 더 많은 것은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에 보관되고 있는 양이 더 많을 뿐 아니라 방출률도 높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원자로 노심 용융에서는 세슘137 총량의 50%, 원자로보다 차단이 덜 된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에서는 총량의 75%가 방출되는 것으로 잡았다.
원전에서 방출되는 방사성 물질에 의한 대피 범위는 방출이 일어날 당시의 풍향과 풍속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된다. 연구팀의 방사성 물질 확산 분석에는 1년 전인 지난해 3월 셋째 주와 넷째 주에 실제 나타났던 기상 조건이 적용됐다.
이런 가정을 바탕으로 자포리자 1호기 냉각 시스템이 완전 작동 불능 상태가 된 상황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 당 1.5MBq(메가베크렐) 이상의 오염도를 기록해 강제 피난해야 하는 지역과 대피 인구는 최대 706만명에 이를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해 3월 넷째 주 기상조건에서 대피 지역과 인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튀르키에 등 3개국 43만~382만여명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3월 셋째 주였다면 튀르키에 대신 루마니아, 몰도바, 벨라루스가 포함돼 강제 대피 지역이 5개국으로 늘면서 대피 인구도 두 배 가까이 늘어났을 것으로 분석됐다.
강정민 전 원안위원장은 “원전은 평상시에도 냉각기능 상실로 인한 중대 사고의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지만 전시에는 특히 더 위험하다. 남북한 대치 상황에 있는 한국은 더욱 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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