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구달이 15일 이화여대의 석좌교수 연구실에서 침팬지와 함께한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을 내쫓던 침팬지는 결국 그의 존재를 받아들였고, 이런 신사협정의 주도자는 인간이 아니라 침팬지였다. 원숭이 인형은 여행 때마다 동반하는 ′미스터 에이치′ 다.
[토요판] 생명/‘침팬지의 어머니’ 제인 구달
▶과학은 먼저 과학자가 되고 인간이 되라고 가르쳤다. 제인 구달은 먼저 인간이 되고 과학자가 되라고 가르친다. 주류 과학의 세계에서 인간은 동물을 지배하는 신이고, 동물은 실험실에 갇힌 객체다. 반면 구달은 동물 속에 직접 뛰어듦으로써 기존 과학이 놓친 위대한 발견을 해왔다. 1960년 시작된 그의 발자취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거대한 전환을 불러왔다. 채식주의자로 사는 제인 구달은 지금 동물보호와 환경보전을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곰베에서 ‘침팬지와의 추억’
애초 접근은 쉽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더니
그들은 무심히 지나쳤고
어느 순간 내 옆으로 다가왔다
관찰보다 공감이 먼저였던 거다 1960년 7월16일 제인 구달(78)이 탄자니아 곰베국립공원의 숲에 도착한 순간 인간에 대한 전통적 정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인 구달은 침팬지들이 나뭇가지를 이용해 흰개미를 잡아먹는 걸 발견했다. 더 이상 도구를 이용하는 동물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침팬지 집단에 들어가 소통하고 공감하는 그의 연구방법도 당시 ‘객관주의’에 경도된 과학계 주류에 도전장을 내밀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성찰하는 계기를 던져주었다. 1980년대 제인 구달은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에서 운동가로 삶의 극적인 전환을 이룬다. 1977년 설립한 제인구달재단을 중심으로 야생동물 보호, 실험동물 등의 동물복지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15일 서울 이화여대 행동생태연구실에서 제인 구달을 만났다. 인터뷰에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와 김산하 박사(동물생태학)가 동석했다. -어제 서울대공원의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찾아갔던데. 만나보니 어땠나? “돌고래 같은 해양포유류들이 수족관에 있는 걸 보면 언제나 안타깝다. 야생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내년 봄 제돌이를 고향인 제주 앞바다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용기 있고 훌륭한 결정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불법포획돼 공연장에서 쇼를 하는 돌고래들이 있다. 그들도 바다로 돌려보내야 한다. 제돌이가 친구들과 함께 돌아가길 빈다.” -반대 목소리도 나왔다. “사자·호랑이는 안 풀어주냐” “동물원·수족관을 없애자는 얘기냐” 이런 것들이었는데, 동물원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보나? “어떤 동물원인지 그리고 어떤 종이 사육되느냐에 달렸다. 예를 들면 돌고래나 코끼리, 늑대 등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종은 일반 동물원에 전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코끼리의 다리는 시멘트 바닥에서 몸집이 주는 하중을 견디기 힘들다. 사파리 같은 환경이나 야생동물보호소(미국 등에는 동물원 등에서 구조된 동물들이 사는 곳이 있다) 등에서나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동물원, 동물실험, 동물쇼는
궁극적으론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좀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달라 -돌고래 쇼는 어떻게 생각하나? “돌고래가 거기 있을 수밖에 없다면, 돌고래가 할 일을 찾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물론 돌고래 쇼를 찬성하는 건 아니다. 애초 돌고래 쇼는 있어선 안 된다.” 최재천 교수가 구달의 말을 듣고 “하나의 꿈이 그려진다”며 말했다. “제돌이가 고향에 돌아가 가끔씩 사람들 앞에 나타나 뛰논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더 기뻐할 것이다. 공연장에서 묘기를 부리는 것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구달도 “야생 고래관찰과 돌고래 쇼는 비교할 수 없다”며 맞장구쳤다. -세계의 여러 동물원을 다녀봤을 텐데. “동물원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데…(웃음) 침팬지를 보러 가긴 한다. 요즈음엔 많은 동물원이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노르웨이의 한 동물원은 워낙 커서 늑대들이 뛰어다닌다. 사람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신처)도 많이 마련해줬다. 추운 겨울에는 아예 문을 닫는다. 영국 인버네스의 ‘하일랜드 와일드라이프 파크’도 괜찮더라. 무엇보다 동물의 생태특성에 맞는 식생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1960~70년대 곰베에서 침팬지와 지내던 젊은 시절일 것이다. 당시 침팬지는 유능한 과학자들의 우선 연구 대상이었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99% 이상이 인간과 같다는 사실이 나중에 유전자 분석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야생 침팬지에 접근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구달도 마찬가지였다. 석 달째 침팬지들은 그를 쫓아내고 있었다. 빈손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절망 속에서 그는 한 봉우리에 올라가 앉았다. 아래가 침팬지들이 무화과나무를 따 먹으러 가는 길목이었다. 구달은 침팬지들에 말했다. “나는 여기에 있다. 그대들을 해치지 않는다. 다만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해 뜨기 전에 봉우리에 올라 하루 종일 앉았다가 왔다. 구달은 할 게 없었다. 가끔 침팬지가 지나가면 이름을 붙였다. 침팬지들은 그를 훌쩍 쳐다보곤 무심하게 지나쳤다. -처음에 침팬지들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무리에 합류한 건 아니다. 다만 서로 신뢰를 쌓았을 뿐이다. 처음에 가까이 가면 침팬지들이 도망쳤다. 그러다가 미스터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흰개미를 잡아먹다가 구달에게 들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선물한 침팬지)에게서 그런 무서움이 사라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우리 캠프로 왔고, 한번은 바나나를 가져갔다. 그레이비어드가 친해질 수 있는 침팬지라고 느껴졌다. 언젠가부터는 무리와 같이 있을 때 다른 침팬지들도 나와 그레이비어드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도망가지 않더라. 물론 서너 달 힘든 시기도 있었다. 나를 포식자로 여기곤 쫓아내려고 위협했다. 그때 혼자 땅을 파고 먹는 척했다. 어느 날 내가 무리에 접근했는데, 침팬지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털고르기에 집중하더라. 그때 ‘됐구나’ 싶었다.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구달의 연구방법은 당시 과학계에 논쟁을 불러왔다. 침팬지에 이름을 붙이고 바나나 등 먹이를 주는 행위는 야생에 대한 인간의 개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전염병이 유행하자 백신을 주사하기도 했다. “야생에 개입한 거 맞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인류학자들이 원주민을 연구하던 중 그들이 병에 걸렸다면 가만히 있어야 하나? 그렇지 않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점엔 냉정한 관찰자보다는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건가? “공감이 중요하다. 공감하지 않고 차가운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는 게 과학의 최대 오류였다. 새끼 침팬지 ‘제인’이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팔이 다쳐 피가 흥건한 적이 있었다. 나도 펑펑 울었다. 하지만 난 그걸 상세히 보면서 체계적인 기록을 했다. 공감과 관찰은 양립 가능하다.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공감하면 행동의 원인을 훨씬 더 잘 추정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왜 침팬지를 연구했나? 사람의 뇌와 비슷해 인지연구를 한 거 아닌가? 신체기관이 비슷해서 약학실험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사고와 감정은 인간과 다르다니. 이런 선입견이야말로 비논리적이다.” -과학자에서 동물보호운동가로 전환한 직접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1986년 미국에서 전세계 침팬지 학자가 모인 학회가 있었다. 침팬지가 덫에 걸려 죽고 사냥당해서 실험실과 서커스로 이송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과학자로 회의장에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그 뒤 제인 구달은 침팬지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그의 관심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일어나는 불법 밀렵뿐만 아니라 실험동물 이용에 대한 비판 등 동물 이용에 관한 문제까지 이른다. -동물실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궁극적으로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좀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마취제나 진통제도 투여하지 않는 등 아직 대다수 동물실험은 열악하게 진행된다. 동물실험의 대안을 만드는 데 더 많은 힘을 모아야 한다. 공장식 축산으로 인한 대량 고기 섭취도 문제다. 동물에 대한 잔혹성만 아니라 가축사료 경작을 위한 열대우림 파괴, 과도한 메탄가스 발생 등 환경 문제도 크다.” -16일 출범한 생명다양성재단이 제인구달재단 한국지부로 활동하게 된다. 한국에서 펼치고자 하는 활동은? “환경보존과 영장류 연구 지원이다. 과학자인 최재천 교수가 핵심에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주실 거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애초 접근은 쉽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더니
그들은 무심히 지나쳤고
어느 순간 내 옆으로 다가왔다
관찰보다 공감이 먼저였던 거다 1960년 7월16일 제인 구달(78)이 탄자니아 곰베국립공원의 숲에 도착한 순간 인간에 대한 전통적 정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인 구달은 침팬지들이 나뭇가지를 이용해 흰개미를 잡아먹는 걸 발견했다. 더 이상 도구를 이용하는 동물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침팬지 집단에 들어가 소통하고 공감하는 그의 연구방법도 당시 ‘객관주의’에 경도된 과학계 주류에 도전장을 내밀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성찰하는 계기를 던져주었다. 1980년대 제인 구달은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에서 운동가로 삶의 극적인 전환을 이룬다. 1977년 설립한 제인구달재단을 중심으로 야생동물 보호, 실험동물 등의 동물복지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15일 서울 이화여대 행동생태연구실에서 제인 구달을 만났다. 인터뷰에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와 김산하 박사(동물생태학)가 동석했다. -어제 서울대공원의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찾아갔던데. 만나보니 어땠나? “돌고래 같은 해양포유류들이 수족관에 있는 걸 보면 언제나 안타깝다. 야생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내년 봄 제돌이를 고향인 제주 앞바다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용기 있고 훌륭한 결정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불법포획돼 공연장에서 쇼를 하는 돌고래들이 있다. 그들도 바다로 돌려보내야 한다. 제돌이가 친구들과 함께 돌아가길 빈다.” -반대 목소리도 나왔다. “사자·호랑이는 안 풀어주냐” “동물원·수족관을 없애자는 얘기냐” 이런 것들이었는데, 동물원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보나? “어떤 동물원인지 그리고 어떤 종이 사육되느냐에 달렸다. 예를 들면 돌고래나 코끼리, 늑대 등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종은 일반 동물원에 전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코끼리의 다리는 시멘트 바닥에서 몸집이 주는 하중을 견디기 힘들다. 사파리 같은 환경이나 야생동물보호소(미국 등에는 동물원 등에서 구조된 동물들이 사는 곳이 있다) 등에서나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동물원, 동물실험, 동물쇼는
궁극적으론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좀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달라 -돌고래 쇼는 어떻게 생각하나? “돌고래가 거기 있을 수밖에 없다면, 돌고래가 할 일을 찾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물론 돌고래 쇼를 찬성하는 건 아니다. 애초 돌고래 쇼는 있어선 안 된다.” 최재천 교수가 구달의 말을 듣고 “하나의 꿈이 그려진다”며 말했다. “제돌이가 고향에 돌아가 가끔씩 사람들 앞에 나타나 뛰논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더 기뻐할 것이다. 공연장에서 묘기를 부리는 것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구달도 “야생 고래관찰과 돌고래 쇼는 비교할 수 없다”며 맞장구쳤다. -세계의 여러 동물원을 다녀봤을 텐데. “동물원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데…(웃음) 침팬지를 보러 가긴 한다. 요즈음엔 많은 동물원이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노르웨이의 한 동물원은 워낙 커서 늑대들이 뛰어다닌다. 사람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신처)도 많이 마련해줬다. 추운 겨울에는 아예 문을 닫는다. 영국 인버네스의 ‘하일랜드 와일드라이프 파크’도 괜찮더라. 무엇보다 동물의 생태특성에 맞는 식생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1960~70년대 곰베에서 침팬지와 지내던 젊은 시절일 것이다. 당시 침팬지는 유능한 과학자들의 우선 연구 대상이었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99% 이상이 인간과 같다는 사실이 나중에 유전자 분석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야생 침팬지에 접근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구달도 마찬가지였다. 석 달째 침팬지들은 그를 쫓아내고 있었다. 빈손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절망 속에서 그는 한 봉우리에 올라가 앉았다. 아래가 침팬지들이 무화과나무를 따 먹으러 가는 길목이었다. 구달은 침팬지들에 말했다. “나는 여기에 있다. 그대들을 해치지 않는다. 다만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해 뜨기 전에 봉우리에 올라 하루 종일 앉았다가 왔다. 구달은 할 게 없었다. 가끔 침팬지가 지나가면 이름을 붙였다. 침팬지들은 그를 훌쩍 쳐다보곤 무심하게 지나쳤다. -처음에 침팬지들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무리에 합류한 건 아니다. 다만 서로 신뢰를 쌓았을 뿐이다. 처음에 가까이 가면 침팬지들이 도망쳤다. 그러다가 미스터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흰개미를 잡아먹다가 구달에게 들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선물한 침팬지)에게서 그런 무서움이 사라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우리 캠프로 왔고, 한번은 바나나를 가져갔다. 그레이비어드가 친해질 수 있는 침팬지라고 느껴졌다. 언젠가부터는 무리와 같이 있을 때 다른 침팬지들도 나와 그레이비어드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도망가지 않더라. 물론 서너 달 힘든 시기도 있었다. 나를 포식자로 여기곤 쫓아내려고 위협했다. 그때 혼자 땅을 파고 먹는 척했다. 어느 날 내가 무리에 접근했는데, 침팬지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털고르기에 집중하더라. 그때 ‘됐구나’ 싶었다.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구달의 연구방법은 당시 과학계에 논쟁을 불러왔다. 침팬지에 이름을 붙이고 바나나 등 먹이를 주는 행위는 야생에 대한 인간의 개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전염병이 유행하자 백신을 주사하기도 했다. “야생에 개입한 거 맞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인류학자들이 원주민을 연구하던 중 그들이 병에 걸렸다면 가만히 있어야 하나? 그렇지 않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점엔 냉정한 관찰자보다는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건가? “공감이 중요하다. 공감하지 않고 차가운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는 게 과학의 최대 오류였다. 새끼 침팬지 ‘제인’이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팔이 다쳐 피가 흥건한 적이 있었다. 나도 펑펑 울었다. 하지만 난 그걸 상세히 보면서 체계적인 기록을 했다. 공감과 관찰은 양립 가능하다.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공감하면 행동의 원인을 훨씬 더 잘 추정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왜 침팬지를 연구했나? 사람의 뇌와 비슷해 인지연구를 한 거 아닌가? 신체기관이 비슷해서 약학실험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사고와 감정은 인간과 다르다니. 이런 선입견이야말로 비논리적이다.” -과학자에서 동물보호운동가로 전환한 직접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1986년 미국에서 전세계 침팬지 학자가 모인 학회가 있었다. 침팬지가 덫에 걸려 죽고 사냥당해서 실험실과 서커스로 이송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과학자로 회의장에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그 뒤 제인 구달은 침팬지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그의 관심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일어나는 불법 밀렵뿐만 아니라 실험동물 이용에 대한 비판 등 동물 이용에 관한 문제까지 이른다. -동물실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궁극적으로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좀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마취제나 진통제도 투여하지 않는 등 아직 대다수 동물실험은 열악하게 진행된다. 동물실험의 대안을 만드는 데 더 많은 힘을 모아야 한다. 공장식 축산으로 인한 대량 고기 섭취도 문제다. 동물에 대한 잔혹성만 아니라 가축사료 경작을 위한 열대우림 파괴, 과도한 메탄가스 발생 등 환경 문제도 크다.” -16일 출범한 생명다양성재단이 제인구달재단 한국지부로 활동하게 된다. 한국에서 펼치고자 하는 활동은? “환경보존과 영장류 연구 지원이다. 과학자인 최재천 교수가 핵심에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주실 거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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