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견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비글이 자신이 실험 대상인지도 모른 채 동물실험실 우리 안에 갇혀 있다.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토요판] 생명
김성한 교수의 동물철학 강의 (1)
김성한 교수의 동물철학 강의 (1)
▶ 1970년대부터 서구 사회에서 전개된 동물권, 동물복지 운동은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다. 서구 동물운동은 공리주의 철학, 생명윤리학 등의 이론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다. 동물운동의 이론을 제공한 세계적인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번역·소개한 김성한 숙명여대 교수(철학)의 동물철학 강의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우리는 왜 동물의 권리와 복지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왜 동물의 고통을 감소시켜야 하는가? 그 대답이 여기에 있다.
불과 이십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물에 대한 처우 문제는 우리 사회 성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즐겨먹는 소, 돼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마저도 지금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가령 개는 집 마당 한구석에 만들어놓은 개집에 묶여 평생을 지내야 했고, 주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는 정도로 애정을 표현했을 따름이었죠.
이러한 태도는 최근 들어 현격하게 변했습니다. 인터넷에서 반려동물 학대에 대한 고발 기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흔해졌고, 사람들의 이런저런 태도로 미루어보았을 때 반려동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이제 정착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식용·실험용 동물들에 대한 관심은 아직 요원한 일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이 처한 극한 상황을 보여주는 고발성 다큐멘터리는 이미 지상파를 통해 몇 번 방영된 바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반려동물들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 보았을 때, 식용·실험용 동물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거의 0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과연 이는 정당한 태도일까요?
반려동물과 똑같은 생명인데
부리 잘리고 분쇄기에 갈리는
가축이 고통받는 이유가 뭔가
동물 대하는 모순적 태도 때문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해답은
피터 싱어 ‘동물해방’의 공리주의
쾌락·고통 느끼는 동물도 배려
동물 중 약자인 가축에 주목하다 모순된 ‘동물 윤리’ 만약 여러분들께 반려동물에게는 관심을 가지면서 식용·실험용 동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이에 어떻게 답하건, 그러한 기준을 곰곰이 따져보면 아마도 그것이 별다른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나 개는 불쌍한데 소나 돼지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면 이는 사실을 잘못 알고 있거나 외면함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고양이나 개와 비교해 봐도 평균적인 소나 돼지는 그보다 훨씬 낮은 처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더욱 연민을 느껴야 할 대상은 소나 돼지일 겁니다. 실제로 고기 생산의 효율성만을 고려한, 대량 사육을 위한 고안물인 공장식 농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은 가혹하다는 표현으로는 크게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다 도축되어 식탁에 오르게 됩니다. 예컨대 닭은 어릴 때 서로 쪼지 못하게 부리를 잘리고, 한 마리가 들어가도 비좁은 철망 우리에 서너 마리가 수용됩니다. 때문에 힘이 없는 일부 닭들은 짓밟혀 죽기도 하죠. 또한 수평아리들은 쓸모가 없다고 해서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갈려서 혹은 커다란 비닐봉투 안에서 질식하여 생을 마감합니다. 이밖에도 양계장에서는 계란 생산을 최대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가혹행위가 암탉에게 자행되죠. 만약 이와 같은 처우를 받는 반려동물이 있고, 이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면 아마도 세상이 들썩거릴 겁니다. 하지만 실험용이나 식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물들이기 때문일까요? 이들이 이러한 가혹한 처우를 받는 데에 항의를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왜 굳이 반려동물을 넘어 실험용·식용 동물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따져보고자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정한 도덕적 기준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인간마저도 그저 막연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뿐, 인간을 왜,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고민해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동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겠죠. 하지만 이러한 기준을 이용해 따져보면 우리는 식용·실험용 동물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태도가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임을 여실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반려동물과 식용·실험용 동물을 구분하고, 오직 전자만 배려하는 것은 공정한 태도가 아니며, 심지어 인간 아닌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고, 인간만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려는 태도마저도 분명 재고해 보아야 하죠.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은 명확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검토한 최초의 저서입니다. 1975년 출간된 이 책은 감정에 호소하여 동물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지 않고,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저서는 그 어떤 동물의 처우를 다루는 서적보다도 논리적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가 <동물해방>에서 글을 전개하는 방식은 공리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공리주의에 입각해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가 부여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대체로 공리주의는 쾌락을 선으로, 고통을 악으로 파악하는 윤리이론입니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고통을 야기하거나 행복을 앗아가면 도덕적 잘못을 범한 것이고, 고통을 없애거나 행복을 초래하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쾌락과 고통을 중시하는 이론이다 보니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배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이를 느낄 수 없는 존재, 혹은 이를 극소하게 느끼는 존재는 배려의 대상이 아니거나 상대적 배려의 순위에서 밀리게 되죠. 그런데 소위 식용·실험용 동물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반려동물과 다를 바 없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배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물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면 우리가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은 따로 없습니다. 부자로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활동이 필요하지 않듯이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동물들에게 별도로 해줘야 할 것은 없죠. 때문에 싱어는 자신의 책에서 반려동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반려동물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싱어가 책을 쓸 당시, 이미 서구에서는 그들이 어느 정도 존중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실험용·식용 동물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열악한 환경에서, 평생을 엄청난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공리주의의 요청임을 고려할 때, 싱어는 가축들과 실험용 동물이 살아가는 실태를 폭로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행동을 촉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고통받는 동물들의 현실을 고발하고 난 후 싱어는 이러한 동물들을 위한 우리의 실천방안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채식인데요. 그는 채식을 할 경우 고기 수요가 줄어들면서 동물들 또한 상대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공리주의에 입각한 행동 방침까지 제시한 후, 싱어는 마지막으로 육식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는, 동물해방론자들에 대한 비판을 일일이 반박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그는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논리를 빈틈없이 전개하여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죠. 이쯤 되면 다른 문제보다도 공리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왜 하필 공리주의냐고요. 그리고 공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동물해방의 논리는 설득력을 상실하는 것 아니냐고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공리주의는 약점 또한 적지 않게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상 고안된 여러 윤리이론들 중 공리주의는 칸트의 의무론과 더불어 가장 설득력 있는 윤리이론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를 채택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에 나온 후보 에이(A), 비(B), 시(C) 중 종합적인 평가 점수가 100점 만점에 각각 20, 30, 10점이라고 해도, 그래서 모두가 크게 후보로 미흡하다고 해도 우리는 30점을 받은 비를 뽑아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 이론이 만점과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이론이 현재로서는 가장 나은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선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김성한 숙명여대 교수(철학)
부리 잘리고 분쇄기에 갈리는
가축이 고통받는 이유가 뭔가
동물 대하는 모순적 태도 때문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해답은
피터 싱어 ‘동물해방’의 공리주의
쾌락·고통 느끼는 동물도 배려
동물 중 약자인 가축에 주목하다 모순된 ‘동물 윤리’ 만약 여러분들께 반려동물에게는 관심을 가지면서 식용·실험용 동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이에 어떻게 답하건, 그러한 기준을 곰곰이 따져보면 아마도 그것이 별다른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나 개는 불쌍한데 소나 돼지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면 이는 사실을 잘못 알고 있거나 외면함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고양이나 개와 비교해 봐도 평균적인 소나 돼지는 그보다 훨씬 낮은 처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더욱 연민을 느껴야 할 대상은 소나 돼지일 겁니다. 실제로 고기 생산의 효율성만을 고려한, 대량 사육을 위한 고안물인 공장식 농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은 가혹하다는 표현으로는 크게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다 도축되어 식탁에 오르게 됩니다. 예컨대 닭은 어릴 때 서로 쪼지 못하게 부리를 잘리고, 한 마리가 들어가도 비좁은 철망 우리에 서너 마리가 수용됩니다. 때문에 힘이 없는 일부 닭들은 짓밟혀 죽기도 하죠. 또한 수평아리들은 쓸모가 없다고 해서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갈려서 혹은 커다란 비닐봉투 안에서 질식하여 생을 마감합니다. 이밖에도 양계장에서는 계란 생산을 최대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가혹행위가 암탉에게 자행되죠. 만약 이와 같은 처우를 받는 반려동물이 있고, 이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면 아마도 세상이 들썩거릴 겁니다. 하지만 실험용이나 식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물들이기 때문일까요? 이들이 이러한 가혹한 처우를 받는 데에 항의를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왜 굳이 반려동물을 넘어 실험용·식용 동물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따져보고자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정한 도덕적 기준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인간마저도 그저 막연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뿐, 인간을 왜,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고민해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동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겠죠. 하지만 이러한 기준을 이용해 따져보면 우리는 식용·실험용 동물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태도가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임을 여실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반려동물과 식용·실험용 동물을 구분하고, 오직 전자만 배려하는 것은 공정한 태도가 아니며, 심지어 인간 아닌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고, 인간만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려는 태도마저도 분명 재고해 보아야 하죠.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은 명확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검토한 최초의 저서입니다. 1975년 출간된 이 책은 감정에 호소하여 동물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지 않고,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저서는 그 어떤 동물의 처우를 다루는 서적보다도 논리적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가 <동물해방>에서 글을 전개하는 방식은 공리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공리주의에 입각해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가 부여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대체로 공리주의는 쾌락을 선으로, 고통을 악으로 파악하는 윤리이론입니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고통을 야기하거나 행복을 앗아가면 도덕적 잘못을 범한 것이고, 고통을 없애거나 행복을 초래하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쾌락과 고통을 중시하는 이론이다 보니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배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이를 느낄 수 없는 존재, 혹은 이를 극소하게 느끼는 존재는 배려의 대상이 아니거나 상대적 배려의 순위에서 밀리게 되죠. 그런데 소위 식용·실험용 동물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반려동물과 다를 바 없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배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물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면 우리가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은 따로 없습니다. 부자로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활동이 필요하지 않듯이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동물들에게 별도로 해줘야 할 것은 없죠. 때문에 싱어는 자신의 책에서 반려동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반려동물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싱어가 책을 쓸 당시, 이미 서구에서는 그들이 어느 정도 존중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실험용·식용 동물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열악한 환경에서, 평생을 엄청난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공리주의의 요청임을 고려할 때, 싱어는 가축들과 실험용 동물이 살아가는 실태를 폭로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행동을 촉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고통받는 동물들의 현실을 고발하고 난 후 싱어는 이러한 동물들을 위한 우리의 실천방안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채식인데요. 그는 채식을 할 경우 고기 수요가 줄어들면서 동물들 또한 상대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공리주의에 입각한 행동 방침까지 제시한 후, 싱어는 마지막으로 육식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는, 동물해방론자들에 대한 비판을 일일이 반박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그는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논리를 빈틈없이 전개하여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죠. 이쯤 되면 다른 문제보다도 공리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왜 하필 공리주의냐고요. 그리고 공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동물해방의 논리는 설득력을 상실하는 것 아니냐고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공리주의는 약점 또한 적지 않게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상 고안된 여러 윤리이론들 중 공리주의는 칸트의 의무론과 더불어 가장 설득력 있는 윤리이론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를 채택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에 나온 후보 에이(A), 비(B), 시(C) 중 종합적인 평가 점수가 100점 만점에 각각 20, 30, 10점이라고 해도, 그래서 모두가 크게 후보로 미흡하다고 해도 우리는 30점을 받은 비를 뽑아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 이론이 만점과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이론이 현재로서는 가장 나은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선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김성한 숙명여대 교수(철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