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규암으로 이뤄져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견뎌낸 백령도 두무진의 선대암, 장군봉, 촛대바위 등 기암절벽. 10억년 전 형성된 퇴적암으로 당시의 환경이 어땠는지를 알려준다.
인천시 옹진군 대청면 대청도 북쪽에 자리잡은 미아동 해변이 썰물을 맞아 넓은 모래갯벌을 드러냈다. 게 구멍 사이로 밀물 때 바닷물이 바닥에 남긴 빨래판 같은 물결무늬가 가지런했다. 해안 서쪽 절벽으로 시선을 돌리고 화들짝 놀랐다. 똑같은 물결무늬가 60도쯤 기운 규암 절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0억년 전 이 퇴적암을 쌓은 모래 해변도 지금 이 해변과 비슷한 환경이었을 겁니다.” 동행한 김기룡 박사(지구과학 교육학. 인천 삼산고 교장)가 말했다. 물결자국의 이랑 모양은 물살이 흘러오는 쪽이 완만하고 반대쪽은 급하다. 이랑 형태로 물살과 퇴적물의 이동 방향을 알 수 있다. 김 박사가 덧붙였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네요.”
이런 물결자국은 백령도 두무진의 기암절벽 바닥 등 백령도와 대청도 해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살에 모래나 점토가 여러 층의 사면을 이루며 쌓인 단면인 사층리, 밀물과 썰물 때 물살의 방향이 역전되면서 어긋난 방향으로 쌓인 사층리가 물고기 뼈처럼 보이는 청어뼈 구조, 큰 홍수나 너울 때 쌓인 둔덕 사층리 등 다양한 퇴적층 모습도 보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 10억년이란 시차가 실감나지 않는다.
대청도 농여해변의 나이테바위. 규암과 이암으로 이뤄진 습곡이 수직으로 선 상태에서 차별침식을 받아 형성됐다.
■ 소청도 분바위 근처 화석의 증언
그렇지만 백령도 일대에 퇴적층을 남긴 10억년 전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태양은 지금보다 어두웠고 지구의 자전속도는 빨라 하루가 18시간이었다. 육지는 텅 빈 불모지였다. 오늘날 보는 식물은 없었고 첫 다세포 식물인 녹조류가 막 출현한 참이었다. 첫 다세포 동물인 해면 비슷한 동물이 나타나려면 1억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남세균이 살았던 흔적은 소청도 분바위 근처에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으로 남아 있다.
10억년을 건너뛰어 자연의 발걸음이 묵묵히 되풀이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건 이 지역 암석이 대부분 차돌로 불리는 규암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백령도와 대청도는 사실상 ‘차돌섬’이다. 이수재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선임연구위원(지질학)은 “사암이 변성된 규암은 매우 단단해 장구한 세월을 견디면서 퇴적 구조를 잘 간직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백령도 일대를 지질공원으로 지정하기 위한 기초연구 책임자인 이 선임연구위원은 “백령권에는 10억년 전의 퇴적 환경과 그 이후 변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대청도 미아동해변에서는 10억년 전 얕은 바닷가의 물결자국과 현재 모래갯벌에 찍힌 물결자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윤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사는 2008년 백령도의 옛 지자기를 측정해 백령도가 8억년 전 초대륙 로디니아의 호주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원생대 동안 조간대와 대륙붕이었던 백령도 일대에 모래와 점토가 쌓였다. 땅속에 묻혀 사암과 이암이 된 뒤 고온·고압 환경에서 ‘구워져’ 규암이 됐다. 2억5천만년 전 또 다른 초대륙인 판게아가 분열하면서 대륙충돌로 한반도가 형성될 때 이곳도 엄청난 지각변동을 받았다. 지층은 잡아당기고 누르는 힘을 받아 휘고 부러지고 녹아내렸다. 그 격변의 흔적을 백령도 일대의 지층은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대청도 서북쪽 지두리 해변에 가면 지층이 구부러진 습곡의 극단적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규암과 이암·셰일이 교대로 수평 지층을 이루지만 중간부터 모든 지층이 심하게 휘어져 있다. 마치 절벽을 가로질러 뱀이 구불구불 지나고 있는 형상이다. 어떻게 지층의 절반에만 습곡이 나타날 수 있을까. 김 박사는 “처음엔 덜 굳은 지층이 지진 등의 충격을 받아 휜 것으로 보았지만 자세히 조사한 결과 지층이 역전됐음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지층이 360도 휘면서 먼저 쌓인 지층이 위로, 나중 쌓인 지층이 아래에 놓이는 역전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평평한 지층은 그런 격변이 일어난 뒤에 쌓였다.
■ 남포리 해변 높이 50m 습곡·단층 선명
대청도 북쪽 농여 해변에는 수직으로 서 있는 습곡의 잔해가 있다. 규암과 이암이 교대로 쌓인 퇴적암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이암이 먼저 침식돼 규암층이 마치 공룡의 척추뼈나 고목의 등걸처럼 남았다. 주민들은 나이테바위라고 부른다.
백령도 남포리 습곡. 먼저 녹은 규암이 이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 모습이다.
백령도 남쪽 남포리 해변에는 높이 50m의 대규모 습곡과 단층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흰 규암과 검은 이암이 번갈아 쌓인 습곡은 거의 일어선 형태이고 산을 절반으로 가른 단층으로 또 다른 습곡과 나뉘었다. 습곡을 자세히 보면, 지하 깊은 곳에서 먼저 녹은 규암이 깨어진 이암 조각 사이로 스며들어 이룬 나무뿌리 모양의 암석이 이채롭다. 한반도를 형성하던 대륙충돌의 여파로 지하 깊은 곳에서 지층이 늘어나고 부러지고 그 틈으로 녹은 암석이 스며든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규암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지상에 드러나 소금기와 파도에 시달리면 풍화와 침식을 피할 수 없다. 대청도 미아동 해변의 규암은 흰색으로 바래고 암석에 난 틈을 따라 쪼개져 모래가 되고 있었다. 소금기에 풍화된 암벽에는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백령도 콩돌 해안에 가면 해변 끝 규암 절벽에서 쪼개진 암석이 파도에 닳아 둥글게 변모하는 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대청도·백령도/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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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