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봄을 알리는 생강나무의 어린잎이 돋았다. 차로 마시면 좋다지만, 언감생심, 애벌레 먹이로 남겨두어야 한다.
따가운 찬바람은 어느덧 기분 좋은 부드러운 바람으로 바뀌어 얼굴을 간질인다. 얼굴에 부딪히는 체감온도로는 봄이다. 여전히 아침, 저녁으로는 영하의 기온에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성큼 봄이 오고 있다. 아직 녹지 않은 하얀 눈을 배경으로 생강나무 가지 끝에 맺힌 연둣빛 꽃눈이 꿈틀거리며 생기가 넘친다.
연구소 산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생강나무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식물로 꽃과 가지를 잘라 문지르면 진짜 알싸한 생강 향이 난다. 어린싹은 작설차(雀舌茶)라 하여 어린잎이 참새 혓바닥만큼 자랐을 때 따서 말렸다가 차로 마시면 좋다 하지만 아직 연구소에서는 마셔 본 적이 없다. 어린 생강나무 잎만 먹는 흰띠왕가지나방이나 가두리들명나방애벌레를 생각하면 내 몸에 좋다고 곤충 밥을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2월 18일은 우수(雨水). ‘봄 눈 녹듯이’란 말이 아직 이곳 산속에서는 이르지만 매서웠던 막바지 한파가 물러가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땅 위의 눈과 얼음이 녹아 질퍽해지고 이맘때쯤 내리는 봄비로 겨울의 건조한 대기가 촉촉해지면서 날이 많이 풀린다는 절기다.
땅을 갈아야 할 이 시기의 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촉촉하게 적셔진 땅으로 대지가 물을 머금어야 씨앗들이 마르지 않고 생기를 되찾아 싹을 틔울 수 있다. 그리고 물이 스며들어 땅이 좀 물러져야 땅속에서 겨울을 나는 애벌레가 땅을 쉽게 뚫고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물은 모든 생물에게 생명 그 자체다.
수노랑나비 애벌레가 낙옆 뒤에서 봄 기운을 느끼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계절마다 풍경이 다르고 절기별로 생물들 사는 모습이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이때야말로 절기 따라 자연의 변화가 확연히 전해오는 때다. 마치 새로운 무엇이 생겨나는 것 같은, 세상 가득한 에너지를 느낀다.
우리나라와 같은 온대지방에서 겨울은 뭇 생명에겐 치명적인 생존조건이 된다. 철 따라 움직이는 여름 철새들에게 바다나 사막, 높은 산과 강 같은 장벽을 넘는 일이 매우 위험하다 하나 감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추운 날씨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환경 조건이어서 따뜻한 남쪽 나라로 이동해야 한다. 물론 한반도보다 훨씬 더 추운 시베리아에서 상대적으로 따뜻한 우리나라로 이동해 오는 겨울 철새도 있지만.
그러나 멀고도 험하며, 생태적으로도 이질적인 산과 강, 바다와 사막을 건널 자신도, 방법도 없는 곤충은 자신들이 살던 그 공간에 남아 있으면서 혹한의 조건을 견뎌야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에너지를 저장하고 모든 발육은 중지한 채 추위를 버틸 수 있는 내한성 물질을 만드는 생리적 프로그램으로 대체한다.
겨우내 몸을 얼지 않게만 하던 생리 프로그램들이 이 무렵 생식 활동에 장애가 되었던 영하의 조건이 바뀌면서 발육을 재개한다. 매일 매일 낮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조금씩 올라가는 온도나 햇빛의 양이 곤충의 휴면을 끝내기 위한 특별한 자극인 셈이다.
한낮의 기온이 영상 10도를 오르내리며 따뜻해진 봄 햇살에 꿈틀거리며 외부 세상을 향한 창문 역할을 하는 각종 감각기가 적당한 반응을 시작한다. 길섶으로 잠시 발을 들여 아직 월동 중이나 따뜻한 온도에 살짝 반응하고 있는 곤충 애벌레들을 관찰한다.
생명 담은 들이 움직이고 있다
별박이자나방 애벌레 수십마리가 그물 둥지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붉은 경계색으로 무장한 지옥독나방애벌레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외형적으로는 복슬복슬한 털이 많아 따뜻하게 생겼고 아름답지만 독으로 찬 가시 털을 갖고 있어 작아도 무시무시하다. 툭 건드리자 조금씩 몸을 놀린다.
사계절 늘 푸르고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소나무의 적갈색 줄기에 들러붙어 갈색 몸에 털로 무장한 솔송나방 애벌레도 스며들 듯 살고 있다.
쥐똥나무잎 사이에 별박이자나방 애벌레 수 십 마리가 집단으로 하얀색 실을 내어 커다란 그물 모양의 집을 만들었다. 끈끈하고 탄력성이 좋은 그물로 방어막을 치고 떼 지어 버티는 집단선택을 통해 겨울을 나고 있다.
쥐빛비단명나방은 잎끝과 끝을 동그랗게 말아 잎 전체를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엉성하지만 몸의 크기에 맞춰 집을 만들고 들어온 햇볕을 가두어 따뜻하고 넉넉하게 이용한다. 바람 막고 천적 막는 은신처였던 집을 겨울 눈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게 가지에 실로 꽁꽁 묶어 놓았다. 궁금하여 집을 살짝 열어보니 잘 있다.
두줄푸른자나방은 나뭇가지 형태로 위장한 애벌레 상태로 겨울을 난다.
두줄푸른자나방은 몸을 웅크린 채 겨울을 나는 동안에도 나무줄기 곁가지처럼 뻗어 나간 모습으로 위장하며, 수노랑나비, 왕오색나비 애벌레들은 자신의 모습이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게 팽나무 갈색 잎과 하나 되어 숨을 고르고 있다.
완연한 봄이 되어 풀과 나무가 푸르러지면 애벌레도 푸르러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저마다 온 힘을 다해 겨울을 보내고 찬란한 봄을 기대하지만 과연 얼마나 생존할지는 미지수다.
아무것도 살아 있을 것 같지 않고, 모든 생물이 죽은 듯이 몸을 사리는 시련의 계절, 겨울 한복판인 12월에 부화해 1령 애벌레였던 붉은점모시나비가 조금씩 기린초를 먹더니 알에서 나온 지 80여일 만에 껍질을 벗고 2령으로 컸다. 다른 애벌레처럼 에너지를 저장하고 겨울의 추운 조건을 견뎌내는 월동시스템이 아니라 발육을 한다는 증거다.
겨우내 자라 껍질을 벗고 2령에 돌입한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 특유의 붉은점이 몸에 나타났다.
1령 애벌레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붉은점모시나비의 특징적인 붉은색 원형 점이 뚜렷하게 몸 양옆 숨구멍 주위로 띠를 이루어 화려해졌고 크기도 2배가량 커졌다. 크게 자란 몸체에 맞는 많은 양의 먹이를 먹기 위해 더욱 크고 단단한 입틀(Mouthparts)을 가져야 하므로 머리도 약 1.3배 컸다.
머리를 제외한 몸통의 껍데기 부분은 아주 딱딱하지 않은 큐티클이라서 신축성이 있고 어느 정도 성장이 가능하나 머리는 딱딱한 캡슐 같아서 크기 위해서는 완전히 해체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발육 단계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머리 크기를 측정하는 일이다.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의 1령부터 4령까지 머리 크기 변화.
2령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열심히 먹고, 껍질을 벗는 성장 속도에 가속을 붙여 12일 후면 또 한 번 탈피하고, 대략 100일 후면 아름다운 ‘태양의 신’(Apollo Butterfly)으로 환생할 것이다.
분명 봄이 아닌데도, 늘 깊은 산 속에서 생물과 붙어 지내는 필자는 산중에 심어진 많은 꽃나무와 풀에서 퍼져 나오는 향기를 느낀다. 자연의 속도를 맞춰 천천히 일상을 준비하면서 이 숲에서 생물의 생존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삶이 풍요롭다.
때때로 까칠한 바람이 빗장을 채워도 봄을 막을 수 없다. 국정 농단에 세상이 요동쳐 혼란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정해진 대로 무심히 흐르고 있다.
글·사진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