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양보호협회 울진지회 회원들이 지난 9일 마을로 내려왔다가 밭그물에 걸려 탈진한 산양을 구조하고 있다. 한국산양보호협회
▶ 경북 울진 일대는 천연기념물 산양의 집단서식지다. 하지만 대표적 천연기념물인 산양이 2010년 이후 이곳에서 조난당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끊이지 않는다. 상시적인 보호·관리가 이뤄지지 않는데다 구조와 치료 등 관련 시설이 미비한 탓이다. 길을 잃고 헤매다 쓸쓸히 사라져 가는 산양의 슬픈 발자국을 따라가봤다.
지난 9일. 한국산양보호협회 울진지회로 다급한 구조 신고전화가 걸려왔다. 곧바로 회원들과 함께 조난 현장인 응봉산(999m)으로 출동했다. 오후 1시10분 현장에 도착해 지켜본 산양의 모습은 너무 처참했다. 산양 한 마리가 유해조수로부터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밭그물에 옴짝달싹 못 하고 걸려 있었다. 머리에 난 뿔과 온몸이 얽힌 채 숨을 헐떡이며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연신 바둥거렸다. 울진지회 회원들은 놀란 산양을 진정시키려 산양 눈에 수건을 두르고 조심스레 그물을 풀어냈다. 간단히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동물병원으로 이송해야 했다. 혈액검사 결과 탈수 증세가 있고 호흡이 매우 약해 마취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한고비를 넘기고 안정을 찾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고 한다. 앞으로도 한달 정도는 더 차분하게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
구조된 산양은 인근에 동물병원이 없어 차로 장시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산양보호협회
천연기념물 산양이 길을 잃고 자꾸 ‘하산’하고 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다가 산 아래 마을과 민가는 물론이고 농경지와 도로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대부분 탈진한 상태의 산양들이다. 보통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 동물은 여간해선 자신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깊은 산속 바위지대에 주로 서식하는 산양 역시 마찬가지다. 이날 구조된 산양은 암컷으로 나이는 3~4년생 정도로 추정됐다. 산속에서 민가 근처로 길을 잃고 내려왔다가 밭그물에 걸려 탈진한 것을 지나가던 주민이 발견해 신고한 것이다.
최소 6~7시간 지나야 치료 이뤄져
특히 남한 최대의 산양서식지인 경북 울진에서 산양들이 조난당하는 사례가 2010년 무렵 이후 꾸준히 늘고 있다.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천연기념물과 환경부가 관리하는 멸종위기동물 중에서 이렇듯 수시로 민가로 내려오는 것은 울진 산양이 거의 유일한 편이다. 2010년부터 이달 20일 현재까지 울진·삼척 지역에서 구조 혹은 폐사된 산양은 모두 56개체에 이른다. 이 가운데 40개체가 폐사한 채로 사후에 사람들 눈에 발견됐다. 탈진 상태에서 발견된 건 겨우 16개체에 불과하다. 그나마 11개체는 구조 후 이송 혹은 치료 중 결국 폐사했다. 폐사 비율은 90%를 웃돈다.
남한 최대 산양서식지 ‘울진’
조난·탈진 사례 꾸준히 늘어
폐사비율 90% 웃도는 현실
동물치료시설조차 아예 없어
주로 겨울~초여름에 조난 발생
정부 차원의 조사·구조체계 미흡
주민·민간단체 자원봉사에 의존
“상근자 두고 상시 모니터링해야”
이처럼 폐사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이 지역이 천연기념물 산양의 최대서식지임에도 변변한 의료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울진에는 산양을 전문적으로 치료할 동물병원과 같은 동물구조시설이 아예 없다. 이번 경우처럼 탈진한 산양이 발견돼 구조에 성공하더라도 약 4시간가량 걸려 강원 북부지역까지 다시 산양을 이송해야 한다. 구조시간까지 포함하면 신고 후 최소 6~7시간은 지나야 시설과 장비가 갖춰진 곳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산양 구조 신고가 들어오는 경우는 먹이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쇠약해진 상태가 대부분이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장시간 이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과도한 스트레스까지 안겨주게 돼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지난 3월24일 울진 구수곡 자연휴양림 부근에서 구조됐던 산양도 결국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생명을 잃고 말았다. 울진 현지에 산양구조센터 설치가 시급한 이유다.
조난당해 폐사한 상태로 발견된 산양의 모습. 한국산양보호협회
더 중요한 건 천연기념물 산양에게 닥칠 위험 요인을 아예 처음부터 없애는 일이다. 체계적인 산양 개체의 보호와 관리 말이다. 그럼에도 현재 울진 인근에서 산양의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실질적인 보호를 할 수 있는 관리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주민들이 자원봉사 형태로 운영 중인 한국산양보호협회 울진지회가 있지만, 이곳 역시 상근자를 둘 형편은 못 된다. 그래서 조난 신고가 들어오면 주민들이 생업을 잠시 중단하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형편이다. 이날 현장에서 산양을 수습했던 김상미 한국산양보호협회 울진지회 사무국장은 “겨울부터 봄철까지 산양이 수시로 마을과 도로까지 내려오는데도 서식지 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울진지회뿐”이라며, “전담자가 있어야 좀더 체계적인 산양 보호 기반을 마련할 수 있고, 그래야 산양을 지킬 수 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무인카메라에 잡힌 산양 가족의 모습. 녹색연합
2011년 민간단체의 전수조사뿐
뭐니 뭐니 해도 천연기념물 산양 보호는 서식지의 체계적인 관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동물은 모두 국가가 법으로 보호를 약속한 대상이다. 그러나 그간 울진지역 산양의 서식지 상황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 것은 2011년 민간단체가 나서 전수조사를 실시한 게 마지막이다. 산양과 같은 천연기념물의 경우엔 정부가 현장에 상주 인력을 두고 일상적인 조사와 관찰을 통해 서식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위급한 경우엔 직접 구조에 나서는 게 응당 옳은 일이다. 울진 산양은 이 두가지 기본적 조처로부터 모두 배제돼 있다.
그나마 민간단체와 울진 지역주민들 덕분에 산양을 지키려는 손길은 명맥을 유지해오는 중이다. 한국산양보호협회 울진지회와 자원봉사자들은 해마다 1월 초순부터 6월까지 생업에 종사하느라 겨를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늘 비상대기 체제를 유지한다. 산양이 주로 조난당하는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지나 초여름 문턱까지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최대한 신속하게 구조에서 이송까지 마무리짓도록 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기부 움직임도 산양 보호활동에 미약하나마 숨통을 조금 틔워줬다. 2010년부터 한 여성지가 해마다 울진 산양 보전활동을 위해 후원에 나선 게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의 경우엔 기업이 멸종위기동물 보호를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벌이는 게 다반사이지만, 국내에선 흔치 않은 일이다.
현재 지역주민과 민간단체들은 울진·삼척 일대에 40여대의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모니터링 중이다. 이 카메라에는 산양의 소중한 생태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잠자고 먹고 놀고 있는 산양의 ‘생얼’이다.
산양의 모습이 주로 포착되는 곳은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생태관광코스인 십이령 구간. 대부분 먹이와 물을 찾아서 찬물내기 계곡 인근으로 지나가는 산양이다. 남한 내에서 멸종위기동물을 법정 생태탐방로에서 수시로 관찰할 수 있는 경우는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반달가슴곰, 여우, 사향노루, 담비, 하늘다람쥐 등 희귀하거나 법적 보호를 받는 동물 가운데 사람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숲길이나 탐방로에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집단적 개체수를 유지하면서도 산양과 인간(지역주민)이 공존했던 결과다.
울진 십이령 인근에서 산양 두 마리가 정겹게 놀고 있는 모습이 무인카메라에 잡혔다. 녹색연합
개발의 손길로부터 벗어난 지역
울진·삼척 산양서식지는 고도 1000m 미만의 산림지역이다. 하지만 암릉이 발달하고 비탈이 가파른 사면과 깊은 협곡이 어우러져 있다. 전형적인 첩첩산중 산세에 속한다. ‘맵고 짠’ 험준한 지형으로 치자면 백두대간의 고산지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런 곳이 산양의 터전으로는 안성맞춤이다. 또 하나. 이 인근에 산양서식지가 이어져온 데는 지형적 특성과 더불어 대도시와 가장 멀리 떨어졌다는 지리적 요인도 한몫했다. 승용차로 서울에서 4시간30분, 대구에서 3시30분이 걸리는 오지인 탓에, 무분별한 개발의 손길로부터 야생동물의 터전이 침범당하지 않은 셈이다.
경북 울진을 중심으로 인근 강원 삼척 일대는 국내 으뜸의 야생동물 서식지일뿐더러 산양의 집단서식지로는 세계 최남단에 자리잡은 곳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동물인 산양. 보호의 손길이 더디기만 한 상황에서, 산양이 하나둘씩 길을 잃고 앓다가 결국 사라지고 있다.
울진/임태영 녹색연합 야생동물담당
산양이 먹이와 물을 찾아 이동하는 모습이 주로 무인카메라에 잡힌다. 녹색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