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일본 와카야마현 다이지의 고래박물관에서 야생에서 잡힌 큰돌고래들을 조련사들이 훈련하고 있다. 이 큰돌고래들은 죽은 생선을 먹고 간단한 지시를 이행하는 법을 익힌 뒤 전세계 수족관으로 수출된다. 다이지(일본)/남종영 기자
“흑범고래예요. 아주 먼 바다 깊은 곳에 사는 동물이죠. 여기에서 오래 살지 못할 거예요.”
지난달 12일 ‘돌고래 사냥터’로 알려진 일본 다이지의 고래박물관. 2015년 출판된 논픽션 <바다의 목소리>에서 수전 케이시는 이 흑범고래가 얼마 못 버틸 거라고 했지만, 이날 오후 매끈하고 검은 피부를 가진 이 고래는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좁은 만을 시멘트 방파제로 막은 바다에서 열리는 돌고래쇼의 주인공은 흑범고래 말고도 큰머리돌고래, 들쇠고래도 있었다. 야생에서 보기 힘든 종인데, 다이지는 잡아서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공연장 뒤쪽 가두리에서는 돌고래가 만든 파도로 아수라장이 났다. 조련사들이 버킷에 죽은 생선을 담아 가져가자 돌고래들이 물을 튀기며 솟구친 것이다. 다이지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큰돌고래였다.
다이지에서는 매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돌고래 사냥이 벌어진다. 매년 1천마리 가까운 돌고래가 잡혀 전세계 수족관으로 수출되거나 이곳에서 돌고래쇼를 하거나 고기용으로 도살된다. 처음 잡혀 온 돌고래들이 배우는 건 가두리에서 일주일 이상 굶으며 ‘죽은 생선’을 먹는 일이다. (비싼 활어를 먹어서는 수족관 운영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뒤 전세계 수족관으로 보내져 돌고래쇼를 시작한다.
이렇게 한국에 수입되어 돌고래쇼를 하고 있는 큰돌고래 중 하나가 ‘태지’다. 다이지에서 왔다고 해서 이름이 태지다. 2013년 제돌이를 시작으로 서울대공원은 남방큰돌고래를 원 서식지인 제주 바다로 돌려보냈다. 지난 18일에는 금등, 대포가 마지막으로 떠났다. 그러나 일본이 고향인 태지는 돌려보낼 곳이 없었다. 결국 서울대공원은 지난달 제주 퍼시픽랜드에 위탁 관리를 맡겼다. 한국에 있는 다이지산 큰돌고래는 26마리다.
‘큰돌고래 미스터리’ 풀리다
그렇다면, 태지 같은 큰돌고래를 국내 연안에 방사하는 건 어떨까?
애초 이런 주장은 지난 2월 울산 고래생태체험관이 수입한 다이지산 큰돌고래 한 마리가 폐사하면서 동물·환경단체가 모인 ‘돌고래 수입 반대 공동행동’에서 제기됐다. 제돌이처럼 큰돌고래들을 바다로 돌려보내자는 것이다. 울산 등 동해에 방사해도 일본 다이지까지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지난 5월 슬로베니아 블레드에서 열린 국제포경위원회(IWC) 연차총회에 제출된 보고서를 보면, 한국 연안에 방사된 큰돌고래가 고향까지 찾아가 무리를 만날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다이지산 큰돌고래의 서식지와 이동 경로는 의견이 분분했다. 다이지는 오사카에서 230㎞ 떨어진 일본 동해안에 위치한다. 일본 동해의 큰돌고래가 원양형과 연안형으로 나뉘고 다이지산 큰돌고래는 연안형으로 추정된다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지만, 정확히 규명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국제포경위원회에 제출된 연구 결과는 이런 학설을 뒤집는 것이었다. 러스 홀절 영국 더럼대 교수와 천잉 대만 청궁대 연구원 등 영국-대만-일본 공동연구진은 일본 열도에서 대만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각각 서쪽과 동쪽의 큰돌고래의 계군(cluster)이 확연히 다르다고 밝혔다. 즉, 북서태평양에 사는 큰돌고래의 서식지가 이 선을 중심으로 서부 계군과 동부 계군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서부 계군의 서식지가 일본 서해안에서 대만해협까지를 포괄한다면, 동부 계군의 큰돌고래들은 따뜻한 구로시오해류를 타고 일본 동해와 대만 동해를 오간다.
둘 사이에 긴 생태적 장벽이 쳐진 이유는 해저 지형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서부 계군은 연안의 얕은 바다가 주 서식지이지만, 동부 계군은 깊은 대륙사면과 구로시오해류가 생활사를 지배한다. 연구진은 일본, 대만, 중국 연안에서 채취된 큰돌고래 조직 샘플을 분석해 두 계군의 차이를 밝혀냈다.
이 연구 결과는 큰돌고래 야생방사에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의 동·남해는 서부 계군의 서식지에서 가깝다. 다이지를 오가는 동부 계군의 큰돌고래에게는 낯선 환경이라는 뜻이다. 21일 이번 보고서의 주 저자인 천잉 연구원을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일본 서해에서 대만해협까지 넓은 바다의 큰돌고래들이 같은 계군(서부)에 속한다는 말인데? 반면 일본 다이지와는 전혀 다른 계군이고.
“그렇다. 유전자 프로파일이 전혀 다르다. 물론 지피에스 등으로 회유 경로가 밝혀진 연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태지 같은 다이지산 큰돌고래를 울산이나 제주 등에 방사한다면?
“미국해양대기청(NOAA) 매뉴얼을 보면, 원래 살던 곳에 방사하는 게 원칙이다. 따라서 다이지에 방사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에 방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므로, 한국 내 방사가 유일한 선택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태지가 일본 동해까지 먼 길을 가서 고향 무리에 합류하리라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막연하게 희망을 걸기보다 과학적 실험 목적으로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지피에스를 달고 어디로 가는지 지켜볼 수 있다.”
-과학적 실험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태지의 야생방사가 운동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면 고향 무리에 합류할지에 대한 관심은 꺼두는 게 낫지 않을까. 가장 나쁜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둔다면, 과학적 실험 목적으로는 야생 방사를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의 남방큰돌고래는 제주 바다로 성공적으로 돌아갔고, 과학적 자문과 실무 진행도 매끄러웠다. 하지만 다이지에서 온 돌고래의 야생방사는 복잡한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만약 제주 남방큰돌고래와 교잡종이 탄생하면 어떻게 할 건가?”
태지와 같은 처지의 35마리
일본 다이지에서 잡힌 고래는 고향에 영영 돌아갈 수 없을까.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연안에 풀어주어 작은 기회라도 주는 게 태지에게 바람직할까 아니면 인간의 보호 아래 살도록 하는 게 현명할까. 우리는 여기서 다른 생명체의 운명을 선택해야 하는 윤리적 문제에 부딪혀 있다. 돌고래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이지만, 야생에서 포획된 순간부터 그러기는 불가능해졌다.
전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남방큰돌고래 7마리를 야생방사한 ‘돌고래 복지 선진국'인 한국은 지금 ‘태지의 문제’를 들고 시험대에 서 있다. 현재 국내에는 태지 등 일본 바다에서 잡혀 온 큰돌고래 26마리와 러시아에서 잡혀 온 흰고래 9마리가 산다. 일본 다이지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595마리가 도살되고 232마리가 산 채로 잡혔다.
다이지(일본)/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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