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임어린(13·왼쪽)양과 고등학생 이승주(18)씨가 학교 급식에 바라는 점을 적은 손글씨를 들고 있다. 이들은 완전채식을 하는 비건이다. 이씨와 임양의 아버지 임도훈(40)씨 등은 오는 4일 국가인권위에 채식 급식 선택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의 진정을 낸다. 본인 제공
경기도 하남에 사는 고3 학생 이승주(18)씨는 급식 식단표를 받으면 가장 먼저 밑줄부터 긋는다. 완전채식(비건)을 하는 그가 식단표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없는 음식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이씨는 지난해 1월부터 건강, 동물권, 환경을 위해 채식을 하고 있다. 보통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밥과 김, 야채무침 등이다. 고기로 육수를 내지 않은 국물만 먹을 수 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그는 급식을 먹어도 허기가 져 간식 지출이 늘고 있다.
오는 4일 이씨를 포함한 초·중·고 학생과 학부모 등 6명은 채식급식시민연대 지원을 받아 교육부장관 등을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낸다. 채식을 택한 학생들이 일률적인 급식 식단으로 인해 양심의 자유, 자기결정권, 건강권 등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받지 않도록,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는 정책을 마련하라는 취지다.
채식하는 학생들은 일상적으로 영양 부족을 경험한다. 육류·해산물이 포함된 급식을 받아들면 굶는 것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다. 대전 소재 중학교 1학년 임어린(13)양은 지난해 9월 동물권 관련 다큐 ‘휴머니멀’을 보고 완전채식을 시작했다. 임양의 제안에 아버지 임도훈(40)씨도 육류를 섭취하지 않고 해산물은 먹는 ‘페스코’ 단계 채식을 한다. 임양은 “학교 점심으로 수육, 치킨, 돈가스 같은 반찬이 거의 매일 나온다. 채식이랄 게 없어 밥과 김치만 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임씨는 “아이가 학교에선 먹을 게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집에서 보충하려고 해도 영양 상태가 빈약해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임씨는 임양 대신 이번 인권위 진정에 참여했다.
지지난해 1월부터 완전채식(비건)을 시작한 이승주씨가 받은 급식 사진. 육류, 해산물 등을 제하고 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지 않다. 이씨 제공
모두에게 보장된 ‘먹을 권리’를 누리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신념을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온가족이 채식을 하는 김현수(12·가명)군은 도시락을 챙겨 다닌다. 급식을 먹는 초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별난 존재가 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채식 관련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제작한 감독이자, 김군을 대신해 인권위 진정에 나선 어머니 황윤씨는 “혼자 도시락을 먹다 보니 친구들에게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아이가 걱정하는 것 같다. 선택지가 육식뿐인 상황이 채식을 하는 학생에게 소외감, 결핍감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스스로 채식을 택한 임양도 급식이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아버지 임씨는 “아이는 동물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채식을 택했는데, 고기가 섞인 급식을 받는 상황은 가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주씨는 “모두가 먹는 급식인데 누군가는 부실하게 먹어야 하는 것은 부당하다. 비건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해롭지 않은 급식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군은 “채식을 원하는 학생이 육류 말고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이 없는 건 민주적이지 않다. 몸에 좋고 지구를 살리는 채식 급식을 학교에서 제공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먹을 권리’뿐이다.
앞서 2019년 11월에는 군대 내 채식 선택권을 요구하는 인권위 진정이 있었다. 국방부는 이듬해 12월 채식주의자와 무슬림 병사 규모를 파악해 채식 위주 식단을 제공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올해 하반기부터 일부 부대에서 이 방안을 시범 운영한다. 학교에서의 채식 급식 선택권 법률 지원을 하는 지현영 변호사(사단법인 두루)는 “당시 국방부가 진전을 보인 만큼 교육부도 변화된 모습을 보이길 기대하며 인권위 진정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 서구 석남초등학교에서 제공되는 페스코 채식 급식. 인천시교육청이 정한 채식 급식 선도학교인 석남초에서는 이런 채식 급식이 주 1회 나온다. 인천시교육청 제공
학교에서의 채식 급식을 결정하는 것은 각 지역 교육청 권한이다. 교육부는 연령대 별 학생들이 섭취해야 할 영양 성분 기준치를 시도교육청에 전달할 뿐, 채식 선택지를 추가하는 것은 교육청 결정에 달렸다. 일부 교육청에서 채식 급식을 시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례적이고 특별한 경우다. 울산시교육청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채식 급식 수요를 조사해 채식 학생에게 대체식을 제공하고 있고, 충북교육청과 인천시교육청에서는 지난 3월부터 한달에 1~2회 고기 없는 급식 날을 둔다. 서울시교육청도 지난 4월부터 한 달에 2차례 채식 급식을 제공하는 날을 운영한다. 부산시에서는 채식 급식 활성화를 위한 교육감의 책무를 담은 ‘학교 채식급식 활성화에 관한 조례안’이 5월 통과됐다.
“식단 다양하게 짜면 영양 균형 잡을 수 있어”
전문가들은 식단을 다양하게 짜고 관련 예산을 확보하면 채식 학생의 영양에도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윤지현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채소 별로 다양한 영양 성분이 있다. 필요한 성분을 고루 먹을 수 있게끔 식단을 구성한다면 영양학적으로 문제 없이 채식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에는 식품 기술이 발달해 채식 급식을 위한 제품이 많아졌기 때문에 다채롭게 메뉴를 짜는 게 가능해졌다. 다만 채식이라는 다른 선택지를 제공하기 위한 예산 확보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주 일반서비스 홈페이지(ogs.ny.gov) 갈무리
외국에선 학생들의 채식할 권리가 보장되는 추세다. 최근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과 미국 일부 지역에서 공공 급식에서 채식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2019년 8월 채택한 ‘기후변화와 토지’ 보고서에서 식품 시스템의 다양화와 식물성 식품을 특징으로 하는 균형 잡힌 식단이 기후변화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에서는 국립학교에서 채식 메뉴를 내놓도록 하는 법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지난달 4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 하원은 국립학교에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 고기나 생선이 없는 메뉴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기후복원법안을 찬성 332표, 반대 77표로 통과시켰다. 법안은 이달 상원에서 다시 논의될 예정이다.
포르투갈은 2017년 3월 공용 매점과 식당에서 공급하는 모든 음식에 채식 메뉴 선택 사항을 구비하도록 규정한 ‘공용 매점 및 식당의 채식 메뉴 선택사항 구비 의무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법률은 초·중·고등교육기관이나 교도소에 적용된다. 채식 메뉴는 다양한 영양분을 보장하는 음식으로 식사를 구성해야 한다.
미국 뉴욕 모든 공립학교에서는 2019∼2020학년부터 매주 월요일 급식에서 육류를 뺀 ‘고기 없는 월요일’이 시행하고 있다. 당시 빌 데 블라시오 뉴욕 시장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 “고기를 줄이는 것은 뉴요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