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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장애인

입말과 손말을 오가는 이 멋진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해

등록 2016-12-10 10:36수정 2016-12-10 15:49

[토요판] 뉴스분석 왜?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아동들, 코다가 여는 세상
이길보라(오른쪽)씨와 코다 코리아 회원들. ‘코다’를 수화로 표현했다. 코다 코리아 제공
이길보라(오른쪽)씨와 코다 코리아 회원들. ‘코다’를 수화로 표현했다. 코다 코리아 제공

▶ 청각장애인인 부모 밑에서 자란 ‘건청인’을 ‘코다’라 부릅니다. 들을 수 있는 사람과 듣지 못하는 사람의 사이에서 살아온 이들. 이들은 말 대신 수화를 먼저 배우고 옹알이를 손으로 하며 혼란스러운 성장기를 보냅니다. 감각의 부재가 만들어낸 침묵의 세계와, 듣고 싶지 않은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소리의 세계를 오가는 이들. 농인 부모를 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다큐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감독 이길보라씨가 코다의 세계를 전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학부모 상담이 있었어요. 다른 친구들 부모님도 모두 오셨고 우리 부모님도 오셨죠. 저는 엄마 옆에 앉아서 수어 통역을 해야 했어요. ‘현화는 정말 착해요’라고 선생님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유 없이 눈물이 났어요. 왜 우는지도 몰랐어요. 나중에야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요. ‘다른 부모님들은 선생님과 아무 문제 없이 이야기하는데 나는 엄마 옆에 앉아서 수어로 통역을 해야 하는구나’ 하고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코다 이현화)

2년 전인 2014년 12월 한국농아인협회 주관으로 열린 <코다 토크 콘서트>에서 난 나의 것과 너무나도 닮은 이들의 생을 마주하게 됐다. 그들은 자신을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아동을 일컫는 말)라 불렀다.

“안녕하세요. 저희 부모님은 청각장애인이니까 말씀하시면 제가 통역할게요.” 난 아주 오래전부터 어딜 가나 이 말을 가장 먼저 해야 했다. 세상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엄마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흔들리는 눈빛 앞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어떤 이는 황급히 자리를 떴고, 간혹 주머니를 뒤져 오백원을 쥐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이들도 그랬다.

“경계에 있는 정체성이 싫었어요. 부모님에게는 보호받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제가 장애인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제 삶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오기와 복수심이었는데, 저는 남들이 감히 동정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어요.”(코다 한민지)

나는 코다다

엄마는 내게 수어를 가르쳤다. 검지를 코 오른쪽에 댔다가 떼며 검지를 접고 새끼손가락을 폈다. ‘엄마’라는 뜻이었다. 나는 수어로 옹알이를 하며 부모의 언어를 습득했다. 수어는 나의 모어(母語)가 되었고, 나는 손과 표정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엄마는 밤이 새도록 아이에게 호랑이가 나오는 전래 동화를 읽어주었다. ‘어흥’ 하고 호랑이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지만, 엄마는 그 누구보다 호랑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두 손의 손가락을 구부려 두 볼에 댔다가 마치 호랑이가 앞발을 들며 위협하듯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 나는 마치 호랑이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내가 입을 꼭 다물고 수어로만 이야기하자 할머니는 깜짝 놀라 애가 말을 안 한다며 나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나는 한참 후에야 그것을 ‘호랑이’라고 발음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4살 때인 1993년 엄마와 함께 공원을 걷고 있는 이길보라씨. 수화로 “옥수수”라 말하고 있다. 이길보라씨는 유치원에 가서야 말을 배웠다. 이길보라 제공
4살 때인 1993년 엄마와 함께 공원을 걷고 있는 이길보라씨. 수화로 “옥수수”라 말하고 있다. 이길보라씨는 유치원에 가서야 말을 배웠다. 이길보라 제공
나는 부모로부터 수어를 배웠고, 세상으로부터는 음성언어를 배웠다. 그러나 두 언어가 속한 세상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엄마는 스스로를 농문화(聾文化)에 속한 농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장애’라고 불렀고 때로는 ‘병신’, ‘귀머거리’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내가 바라본 엄마, 아빠의 세상은 너무나도 반짝였지만 그것을 설명해내기에는 두 세상의 언어가 너무나도 달랐다. 시각을 기반으로 한 수화언어와 청각을 기반으로 한 음성언어 사이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뿐만 아니라, 편견과 차별의 벽이 함께 존재했다. 그래서 그 둘을 오가는 일은 고단했고 종종 외로웠다. 그것은 농인인 나의 부모도, 청인인 나의 친구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나
2년전 닮은 생들과 첫 만남
농인과 청인 사이
입말과 손말을 오가는
우리는 ‘코다’다

올해 8월 영국 코다 캠프
세계의 코다들을 만났다
코다만 이해하는 장난에 ‘깔깔’
두 문화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독일 영화 <비욘드 사일런스>(1996)의 주인공 ‘라라’도 학교를 조퇴하고 농인 부모님과 은행에 가서 “왜 적금을 찾을 수 없냐”고 엄마 대신 ‘말’해야만 했다. 또한 아버지가 눈이 오는 소리는 어떤 것이냐고 묻자 그것을 수어의 세계로 옮겨야만 했다.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2014)의 주인공 ‘폴라’ 역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음악적인 재능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통역을 하기 위해 집에 머무르는 선택을 한다. 드라마를 보고 싶은 엄마를 위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배우의 목소리를 수어로 옮기는 통역을 해야 했던 것이다. 동생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해 학부모 상담을 하게 되었을 때 통역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으며, 이곳에서 나는 ‘누나’가 되어야 하는지, ‘통역사’가 되어야 하는지, 혹은 ‘딸’이 되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건 단순히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세계의 코다를 만나다

궁금했다. 알아보니 세계 곳곳에선 코다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코다에 관한 공부를 하고, 코다의 경험을 나누고 있었다. 전세계 코다 네트워크(코다 인터내셔널)도 있었다. 영국에는 ‘코다 영국과 아일랜드(UK&Ireland)’가, 일본에는 ‘코다 재팬’이, 홍콩에는 ‘코다 홍콩’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한국에서 모인 코다들도 스스로를 ‘코다 코리아’라 부르며, 코다로서 살아왔던 경험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의 미래를 고민하게 되었고, 해외의 코다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코다 정체성을 확립하고 모임을 꾸려 나가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코다 코리아는 올해 8월 ‘코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여름 캠프에 방문했다. 영국의 그랜섬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열린 캠프는 3박4일 동안 코다 청소년 84명과 코다 성인 자원 활동가 20명이 함께하는 대규모였다. 캠프지에 들어서자마자 한 아이가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 코다예요?”

나는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코다 코리아 멤버 중 한 명이 국제 수어로 우리를 소개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영어와 수어를 섞어 대답했다. 놀라웠다. 수어와 음성언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들이 내 앞에 백여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물었다. “너 코다야?” 우리는 여러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캠프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탤런트 쇼’였다. 한국으로 치면 ‘캠프파이어’ 같은 순서였는데 모두가 마치 코스프레를 하듯 집에서 챙겨 온 복장으로 해리 포터와 헤르미온느처럼 차려입었다. 그중에는 호나우두도 있었고 피카추도 있었다. 미처 옷을 챙겨 오지 못한 몇몇 아이들은 이제부터 자신은 ‘농인’이고 ‘수화통역사’를 연기할 것이라며 농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마치 농인처럼 말이다. 모두가 깔깔 웃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장애인 비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장애인 비하’ 코드로 읽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부모의 흉내를 내었고, 수화통역사들이 흔히 하는 실수 같은 것들을 연기했다. 코다만이 할 수 있고, 코다만이 온전히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장난이었다. 내가 속한 청인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디스코장에서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흥겹게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는지 손을 움직여 얼굴 표정과 함께 상대방에게 수어로 말했다. 의사 표현을 하기 위해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은 청인이었고 동시에 농인이었다. 두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두 가지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들이 여기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농인을 위해 혹은 청인을 위해 통역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음성언어를 사용해도, 수어를 사용해도, 그 둘을 섞어 이야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와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

해외 코다 초청강연을 준비하며

‘코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표인 마리 디몬드 역시 코다로 태어나 자랐다. 사촌들 중에도 유독 코다가 많아 어려서부터 코다 정체성을 일찍 습득할 수 있었다는 마리는 자라면서 소속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자신과 부모를 자책하거나 원망하며 자라는 다른 코다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코다 국제 콘퍼런스에 다녀온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코다의 미래 세대를 지원하기 위해 2007년부터 여러 활동들을 해왔다고 한다. 여름에는 코다 캠프를 열고, 다달이 영국과 아일랜드 각 지역에서 코다 아동들이 모일 수 있는 워크숍을 열기도 한단다. 우리는 캠프 마지막날, 마리에게 이런 놀라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나도 물론 멀리 한국에서 코다들이 찾아와준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해. 우리 아이들도 너희를 보고, 저기 아시아 어딘가에도 코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야. 우리가 이렇게 멋진 ‘코다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고마워. 이 캠프의 아이들이 서로의 모습을 보고, 나도 자라 언젠가는 수화통역사도 될 수 있고, 영화감독도 될 수 있고, 언어학자도 연구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또한 나도 그렇고 다른 성인 코다 자원 활동가들 역시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렸을 때의 기억들을 꺼내 놓고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런 시간들이 되어 나도 너무 감사해.”

마리는 ‘수고가 많았다’는 말에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도 한국에 가게 될 기회가 있다면 정말 기쁘게 아시아에서 네트워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4개월 뒤 마리는 정말 한국에 왔다.

마리는 10일 ‘서울시 청년허브 콘퍼런스’에서 ‘해외 코다 단체의 설립과 활동에 관하여’를 주제로 발표한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한 이 콘퍼런스는 서울시 청년허브 주최로 이달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은평구 녹번동 청년허브 일대에서 열리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에 지속가능한 삶에 초점을 맞춘 ‘삶의 재구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콘퍼런스에선, 정치·문화예술·교육·환경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청년들의 시도와 실험 사례가 소개됐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코다 코리아는 코다 단체를 만들고 운영해오고 있는 두 명의 해외 연사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코다 인터내셔널과의 끈끈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코다 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해온 마리는 단체의 운영과 영국 내 코다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해 들려줄 것이다. 코다 홍콩의 설립자 신디 챈은 아시아 최초의 코다 단체를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홍콩에서 코다로서 긍정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등을 진솔하게 풀어낼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어떻게 코다에 대한 인식과 지원 체계를 만들어갈 것인지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나는 코다라는 단어를 스물두살에야 처음 들었다. 그때의 내가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던 건 나의 자리가 농인 사회와 청인 사회 사이의 어디쯤일 것이라는 거였다. 누군가는 코다가 농문화와 청문화 사이의 교집합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 자리가, 나만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더 많은 이들이 옆에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확립했고, 또 다른 이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제 막 한국에서 자리를 펴고 앉은 우리는 떠듬떠듬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찬찬히 숨을 고르며 서로에게 ‘나도 코다다’, ‘나도 그랬다’며 손을 붙잡고 이 놀랍고도 찬란한 세상에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미 자리에 앉은 선배들은 두 팔을 들고 손바닥을 돌리며 반짝이는 박수를 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멋진 코다 세계로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고. ‘그것이 바로 코다 정체성(CODA Identity)’이라고 말이다.

이길보라 독립영화 감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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