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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의사가 환자돼 보는 ‘역지사지 꿈’ 꾼다면, 얼마나 달라질까

등록 2022-02-12 15:33수정 2022-02-12 15:45

[한겨레S] 양선아의 암&앎
의사의 말과 태도

달러구트 꿈백화점 진짜 존재하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완치의 꿈
의사가 환자로 바뀌는 꿈도 팔면
고통 이해하고 더깊이 배려할텐데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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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지난해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 소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책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잠들면 꾸는 꿈은 ‘꿈 제작자’가 만든다. 달러구트는 다양한 꿈을 파는 판매자다. 꿈을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꿈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니 ‘불면증에 시달리고 암 치료 과정에서 각종 어려움을 겪는 암 환자를 위한 꿈이 있다면?’이라는 상상으로까지 이어졌다. 오늘 글은 그런 나의 상상을 ‘달러구트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썼다.

_______
암 환자에게 최고의 ‘꿈 가게’는?

안녕하세요, 달러구트님. 저는 ‘꿈 백화점’을 이제야 알게 된 유방암 3기 암 환자입니다. 제가 펜을 든 이유는 당신의 꿈 백화점에 ‘암&꿈’ 코너를 만들어달라고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러구트님도 아시지요? 우리나라 암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요. 암 환자는 매해 늘고 있고, 국민 25명당 1명이 암 유병자입니다. 환자 외에도 가족, 의료진, 암 연구자, 암 관련 정책 담당자 등을 합하면 ‘암&꿈’ 코너를 찾을 고객은 정말 많을 겁니다.

‘암&꿈’ 코너에 첫번째로 필요한 꿈은 ‘완치 꿈’이에요. 달러구트님이 꿈 제작자를 만나 암 환자가 완치된 미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꿈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하면 어때요? 암 환자가 완치에 이르는 길은 길고 지루해요. 울퉁불퉁하고, 장애물도 있지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암 환자는 몸의 작은 변화에도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3~6개월마다 검진을 하고 결과를 기다릴 땐 바들바들 떨어야 합니다. 이런 길을 갈 때 완치 후 자신의 모습을 꿈에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요? 항암 치료 중 부작용이 너무 심해 치료를 중단하고 싶은 환자가 꿈에서 자신이 마침내 도달할 그 모습을 본다면 위기를 좀 더 쉽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요?

두번째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꿈은 암 치료를 하는 의사들을 위한 맞춤 제작 꿈입니다. ‘역지사지몽’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겠어요. 이 꿈은 암 치료를 하는 의사들이 자신의 환자와 역할을 바꿔보는 꿈입니다. 그런 악몽을 누가 꾸고 싶겠느냐고요? 저는 이런 꿈이 출시된다면, 모든 의과대학에서 구매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꿈에서라도 암 환자가 겪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본인이 직접 경험해본다면, 환자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불친절한 의사는 줄어들 테니까요.

저도 의사의 말 한마디에 힘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수술을 끝내고 종양내과를 방문했는데, 의사는 “이제 호르몬 치료제인 타목시펜을 먹고, 난소 기능을 억제하는 졸라덱스 주사를 맞자”고 했어요. 통상적으로 항암에 전절제(가슴 전체를 자르는 수술)를 하면 방사선 치료는 안 해요. 그런데 저는 방사선 치료도 하기로 했지요. 항암·수술·방사선 다 하는데 약도 먹고 주사까지 맞아야 한다니….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의사에게 “주사는 안 맞으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죠. 그 순간 의사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환자분은 3기예요. 수술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항암을 통해 수술 가능하게 만들어 수술하셨어요. 타목시펜도 먹고 졸라덱스도 맞으셔야 해요. 안 하시면 10명 중 7명은 재발됩니다. 그래도 괜찮으세요?”

‘10명 중 7명 재발’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제 심장은 얼어붙었습니다. 암 환자에게 가장 큰 공포는 재발과 전이입니다. 그런데 그 수치를 들으니 제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제 이성이 온전히 작동했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의사에게 물었어야 합니다. 그 데이터는 어떤 연구에서 나왔는지, 또 주사의 부작용은 없는지 등을 말이죠. 그런데 의사의 신경질적이고 바쁜 듯한 태도, 10명 중 7명 재발이라는 수치에 압도돼 “주사 맞을게요” 하고 진료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날 이후 ‘70% 재발’이라는 말이 저의 목을 조여왔습니다.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아무리 관련 논문과 책을 뒤져봐도 그 수치는 나오지 않았어요. 타목시펜 단독 요법과 타목시펜과 난소억제주사 5년 병행 요법을 비교한 임상시험에서 8년간 각 환자군의 재발률을 분석했을 때, 타목시펜 단독군에서 78.9%, 타목시펜+난소억제주사군에서 83.2% 무병 생존율을 보인다는 데이터는 있었습니다.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다시 물을까 고민하다 관뒀습니다. 선생님을 계속 만나야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어요.

<암에 걸렸다는데, 저는 건강히 잘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쓴 일본 작가 이마부치 게이코는 2014년 염증성 유방암이 간 주변으로 전이되어 4기 판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대학병원에서 만난 첫 의사는 이마부치에게 “수술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항암제도 곧 듣지 않을 겁니다.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 완화 케어를 할 수 있는 병원을 알아보세요”라고 말했어요. 그 의사는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환자와 얘기했고, 치료법에 대해 환자가 물어도 자세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지요. 의사와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마부치는 병원을 바꿨는데요. 새로 만난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완치는 바랄 수 없지만 쓸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가능한 한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삶의 질을 길게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죠.” 이마부치는 그제야 치료를 받을 용기를 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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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말 한마디에 살고 죽는데

두 의사는 내용상 비슷한 말을 한 것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환자는 천지차이로 느끼는 것이죠. 그만큼 의사의 말 한마디로 환자는 죽고 삽니다. ‘역지사지몽’의 필요성 절감하시겠죠?

암 환자는 대체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요. 차에 타 마실 수 있는 ‘진정 시럽’과 ‘숙면용 사탕’은 필수입니다. ‘심신 안정용 쿠키’도 좋아할 겁니다. 삶에 대한 자신감을 높이는 ‘자신감 충전 소스’도 개발해 채소에 듬뿍 뿌려 먹으면 좋겠어요.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접하고 전 이런 싱거운 생각도 해봤어요. 암 진단 받고 항암 치료 받고 병가 중이라는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이 꿈에서 깨어나면 암 진단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앗! 왠지 달러구트님이 제게 한마디 하실 것 같아요. “늘 중요한 건 현실이고, 현실을 침범하지 않는 적당한 꿈이 좋다”고요. 맞아요. 이미 저는 암 경험자이니 잘 받아들이고 치료받아야죠. 올 한해 무탈하시고, ‘암&꿈’ 코너 제안에 대한 답 꼭 들려주세요.

양선아 사회정책부 기자 anmadang@hani.co.kr

기자이며 두 아이의 엄마. <자존감은 나의 힘> <고마워, 내 아이가 되어줘서>(공저) 등의 저자. 현재는 병가 중이며, 유방암 진단을 받고 알게 된 암 치료 과정과 삶의 소중함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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