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5개 나라에서 출간 예정인 <질의 응답>(열린책들)의 저자 엘렌 스퇴겐 달이 지난 26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자 khan@hani.co.kr
“중고등학교 땐 분명 ‘자전거를 타면 질막(처녀막)이 손상된다’고 배웠는데, 의학서적을 찾아보니 잘못된 지식이었죠.”
노르웨이에서 자란 의사 엘렌 스퇴켄 달(28)은 초중고 시절 성교육을 떠올리면 영 만족스럽지가 않다. 엘렌은 의대에 입학한 뒤 성인이 되어서야 정확한 지식과 만났다. 학교에선 음핵(클리토리스)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의대에서 공부하며 알게 된 음핵은 골반 전체에 뻗어있는 크고 중요한 기관이었다. 엘렌은 20대가 돼서야 그간 알았던 성 지식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에게 정확한 콘돔사용법을 알리겠다는 의욕으로 엘렌은 동료 니나 브로크만(32)과 함께 성교육 단체 자원봉사자로 수년간 일했다. 노르웨이 곳곳에서 10대, 성 노동자, 이민자들에게 강의와 상담을 했다. 두 사람은 발칙한 이름의 블로그 ‘운데르리베(성기)’를 열고 성 의학 정보를 쉬운 글로 풀어썼다. 젊은 의대생들이 밝고 경쾌하게 쓰는 여성 성 건강 블로그는 금세 인기를 끌었고, 인구 540만명의 나라 노르웨이에서 조회 수 40만회를 기록하는 히트를 했다.
두 사람이 블로그 글을 모아 2017년 책으로 펴내자 노르웨이에서 바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이 나온 지 한 달 만에 세계 11개국에서 판권을 계약하자는 제안이 왔다. 2년 사이 세계 35개 국가에서 판권을 계약했고 한국엔 지난 3월8일 ‘여성의 날’을 기념해 <질의 응답, 우리가 궁금했던 여성 성기의 모든 것>(열린책들)이란 이름으로 출간됐다. 아시아 국가 중에선 처음이었다. 400쪽 분량의 이 책은 △생식기 △냉·생리·그밖의 분비물 △섹스 △피임 △생식기에 생기는 문제 총 5장으로 돼 있다. 여성 신체와 성 건강에 관한 지식을 총망라하면서 그동안 교과서에선 알려주지 않았던 음핵의 존재, 피와 처녀성의 무관함, 다양한 생리용품 사용법, 성생활과 오르가슴, 애널섹스의 방법, 피임과 임신 중단 등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담았다.
최근 2019년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엘렌을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공동저자 니나는 최근 둘째 아이를 출산해 함께 오지 못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지식을 담은 대중 의학서가 지금 왜 전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는 것일까.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19서울국제도서전에서 엘렌 스퇴켄 달은 ‘성교육에서 받지 못한 6가지 진실’을 발표했다. 이 발표 자료에 나온 엘렌과 니나의 사진. 열린책들 제공
전 생애 6년간 피 흘리는 여성의 몸
-한국의 첫인상은 어떤가.
“보수적인 나라 같아서 여성들이 살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느꼈나.
“산업화한 나라 중에 최근까지 낙태죄를 유지한 나라는 매우 드문데, 한국에선 최근에서야 낙태죄가 폐지됐다고 들었다. 유예기간이 남아서 2020년까지 완전폐지는 아니라던데. 며칠 사이 만난 한국 여성들이 말해주길 병원에서 의사와 성에 대해 편하게 말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하더라.”
-한국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성기를 정확한 명칭으로 부르는 대신 ‘거기’, ‘그곳’, ‘아래’ 같은 대명사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 있다.
“사실 좋은 문화는 아니다. 노르웨이에서도 여성 환자들이 의사와 상담할 때 ‘아래쪽이 아파요’처럼 자신의 성기를 직접 지칭을 못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점점 많은 환자가 정확하게 지칭해가고 있다. 언어가 없으면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 정확하게 지칭하지 않으면 성기를 더욱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고, 수수께끼 같은 기관으로 만들어버린다. (성기도) 다른 신체 부위처럼 똑같이 지칭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코가 있는 것은 예쁘게 보이기 위해 있는 게 아니고 냄새를 맡기 위한 것이다. 성기도 똑같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성적 유희와 재생산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고 그에 맞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다면 슬픈 일이다.”
-한국에서는 생리 중일 때도 ‘그날’이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책에서 말하길 ‘생리란 출혈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왜 그런 것인가.
“여성은 평생 살며 약 6년간 피를 흘리며 보낸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닷새씩 생리를 한다고 가정하면 1년에 60일이고, 대략 40년 동안 생리를 할 경우 평생 2400일, 즉 6년6개월을 생리하면서 보낸다.”
-여러 생리용품 가운데 질에 삽입하는 형태의 탐폰, 생리컵 등이 외국에선 활발히 사용되는데 한국에선 주로 생리대를 사용한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대체로 보수적인 나라, 즉 여성의 처녀성과 질막(처녀막)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나라에서 어린 여성에게 생리컵과 탐폰 사용을 지양하도록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두 사람은 2017년 인터넷 강연 사이트 테드(TED)에서 12분짜리 영상 <‘처녀막’에 대한 거짓말>로 박수를 받기도 했다. 영상에서 니나는 “의학계에선 이미 100년 전부터 ‘처녀막’(질막)과 처녀성이 무관함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처녀막’(질막)을 신화처럼 믿고 있다”고 말했다. 질막은 마치 머리끈과 비슷해 늘어나며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들은 강조했다. 그러면서 엘렌은 영상 말미에 “어떤 여성이 ‘처녀’인지 아닌지가 정말 궁금하다면, 차라리 그냥 물어보세요”라고 조언했다.
“○○은 다양하고 모두 정상이다”
책의 영문판 제목은 ‘The Wonder Down Under’(질의 경이로움)다. 책 출간 전 한국 출판사에선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여성 성기 ‘질’이 책의 제목이 되는 경우는 그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판사는 여성의 몸을 긍정하자는 책의 취지처럼 질이란 단어를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질’이란 단어를 제목에서 빼지 않았다. 그 결과 ‘묻고 답한다’는 뜻의 질의응답과 여성의 신체 기관인 ‘질이 응답한다’는 두 가지 뜻을 가진 책 제목 <질의 응답>이 탄생했다.
이 책엔 ‘정상’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도 □도 둘 다 정상이다”, “○○은 다양하고 모두 정상이다”, “◇◇은 비정상이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다” 같은 표현들이다. 엘렌은 “그동안 환자와 독자들에게 ‘저 이런 거 정상인가요?’란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까놓고 이야기만 할 수 있어도 ‘다들 비슷하구나’ 알게 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조언했다. “여성들이 몸에 대해 수치심에 사로잡혀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고민하는 신체에 대한 걱정은 함께 이야기해 보면 대체로 별문제가 아니다”고 엘렌은 말했다.
많은 여성이 성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는 까닭 중 성교육도 한 몫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르웨이도 마찬가지였고 지금은 사회운동을 통해 변화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엘렌은 학교 성교육이 “실제 필요한 지식 대신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우는 ‘해서는 안 될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며 “‘조신한 척하는 법’이나 ‘자위 안 하는 척하기’ 같은 체면 차리기 교육을 잔뜩 하고 있는데, 성의 유희적이고 쾌락적인 면을 알려주고 여성이 성의 주체가 되어 성생활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여성의 성 건강에 관한 의학서는 임신과 출산 위주로만 기술돼 왔다. 의학 자체가 남성 중심적으로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이 책을 감수한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의대 해부학 교과서도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신체를 기술한 다음, 생식기 부분에서만 여성의 몸이 나오는 식이었다”며 “남성 몸을 기준으로 여성 몸이 어떻게 다른지를 기술하지 않고 여성 신체를 주체적으로 다룬 이 책은 남성 중심적 의학 체계를 전복시키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