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택배노조 조합원이 서울 중구 씨제이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죽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함께 싸웁시다’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서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달 2일 중앙노동위원회가 원청인 씨제이(CJ)대한통운에 ‘하청업체인 대리점 소속
택배기사들의 단체교섭 요구에 응하라’고 판정한 가운데, 중노위가 이런 판정을 한 배경에는 씨제이대한통운이 단순히 대리점 택배기사가 일하는 장소뿐만 아니라 대리점주와 택배기사의 계약에도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6일 <한겨레>가 전날 씨제이대한통운과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에 송달된 중노위 판정문을 살펴보니, 중노위는 택배노조가 제시한 6가지 교섭 요구안 모두에 대해 씨제이대한통운이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노위는 주 5일제 시행이나 수수료 체계 개편 등 대리점과 택배기사 간의 계약 사항에 대해서도 씨제이대한통운에 결정 권한이 있다고 봤다.
앞서 초심인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대리점주별로 수수료 지급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들어 씨제이대한통운의 결정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중노위가 이를 뒤집은 것이다. 만약 사용자가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권한을 갖는다면 노동조합법에 따라 노조의 단체교섭에 응할 의무가 발생한다.
중노위는 “택배기사 휴일 등 교섭의제는 씨제이대한통운과 대리점주가 중첩적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씨제이대한통운이 대리점과 맺은 위수탁계약에 주 6일 택배운송을 원칙으로 정했고 수수료도 씨제이대한통운이 정한 기준표에 따르도록 정해져 있었으며, 상품 (분실) 사고에 따른 책임도 씨제이대한통운이 정한 ‘사고 판정 및 귀책 지침’을 따르도록 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택배기사가 택배 운송 건당 수수료와 휴일 등을 대리점과 정하기는 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급지 수수료’ 등을 원청인 씨제이대한통운과 하청인 대리점이 함께 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씨제이대한통운은 대리점이 개별적으로 주 5일제 등을 실시할 자율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중노위도 이를 고려해 “제한적이나마 대리점이 지배·결정권을 갖는다”고 봤으나 “씨제이대한통운이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어 택배 운송 기준을 미리 정하면 대리점이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대리점보다 씨제이대한통운에 노동조건 결정 권한이 있다는 판단을 유지했다.
중노위는 더 나아가 서브터미널(배송 상품 분류 공간)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주차 공간을 늘려달라는 택배노조 쪽 요구의 실질적 결정 권한 역시 씨제이대한통운에게만 있다고 봤다. “택배기사가 배송 상품을 인수하는 시간 등은 사용자(씨제이대한통운)가 처분권을 가진 서브터미널의 공간 크기와 구조, 물적 설비, 운영 방식 등에 의해 결정되는 반면 대리점주는 권한이나 책임을 거의 갖지 않는다”고 봐서다. 대리점은 씨제이대한통운의 배송 업무를 지역별로 나눠서 위탁받기 때문에 씨제이대한통운이 운용하는 터미널에 접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씨제이대한통운은 ‘수도권의 각종 규제로 서브터미널 인프라 개선에 한계가 있다’며 자사에 결정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중노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노위는 지난 20여년 동안 간접고용이 확대되면서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결정하는 사용자가 여럿으로 나뉘는 점도 고려했다. 중노위는 “고용 구조가 전형적인 근로계약 관계에서 다면적인 노무제공 관계로 재편되고 사업주도 단일이 아닌 복수로 분화되는 현실을 봤을 때 사업주(원청)가 원사업주(하청)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결정권을 행사한다면 그 범위 내에서 사용자 책임을 중첩적으로 분담하는 것이 노동 3권의 실질적 구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봤다. 단체교섭에 응해야 하는 사용자를 노동자와 직접 계약한 하청업체로 한정했던 초심의 해석을 뒤집은 것이다. 중노위는 또 “이와 같이 해석하지 않으면 원사업주(하청업체)도 자신이 결정하지 않는 노동조건까지 단체교섭 의무를 전적으로 부담하는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도 설명했다.
다만 중노위의 판정에 따르더라도 씨제이대한통운이 대리점 택배기사와 교섭을 거쳐 노조 쪽 요구사항을 모두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중노위는 “노동조합의 교섭요구에 응해 성실히 교섭하라는 의미이지 노동조합의 요구 내용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며 기업활동의 자유 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고 명시했다.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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