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현장 사무실 벽 한 켠에 ‘무재해 운동’ 로고 포스터를 액자에 넣어 비치한 모습.
서울의 한 건설 현장 사무실에 들어서자 ‘무재해’ 글씨가 커다랗게 써진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사고 0건을 상징하는 동그란 원형 마크가 새겨진 무재해 운동 포스터다. 그 옆엔 ‘안전사고 제로(zero)’와 ‘중대재해 제로’를 올해의 안전 목표로 삼는다는 표어도 걸려 있다. “아침 조회가 끝나면 늘 안전을 강조하는 구호를 외치고요. 매달 안전점검을 할 땐 ‘다음 달도 사고 없이 만나자’고 당부합니다.” 현장 소장 ㄱ씨가 힘 주어 말했다.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인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지난달부터 50억원 이상 건설 공사를 맡은 중견·중소 시공업체를 대상으로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 의무인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을 돕는 컨설팅을 진행 중이다. 공사금액 500억원 가량 규모인 이 현장도 컨설팅 대상으로 선정돼 지난 7일 세 시간에 걸쳐 중대재해법 준수를 위한 시범 컨설팅을 받았다. <한겨레>가 컨설팅 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이날 현장을 찾은 오병한 안전공단 서울광역본부 건설안전팀장(건축공학 박사)은 보다 구체적인 안전 관리 목표를 만들 것을 제안하며 컨설팅의 첫머리를 열었다. “무재해 목표는 사고가 나면 목표가 그냥 깨져버리잖아요? 좀 더 정량화된 목표가 필요합니다. 우리 현장 ‘아차 사고’가 한 달에 100건이 나오고 그 중에 60건은 관리가 된다면 ‘아차 사고 관리 수준이 60%구나’ 하고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앞으로 80~90%까지 올려보자’고 구체적 목표를 수립해요. 현장의 아차 사고 관리 포인트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면 관리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1년 산재 발생 건수가 동종업계 평균값보다 낮은 사업장에게 혜택을 주는 ‘무재해 운동’은 1979년부터 정부 주도로 40년 가까이 시행됐지만 지난 2018년 인증사업이 종료되면서 막을 내렸다. 재해의 근본 원인을 분석하기보다 절대적인 건수 자체를 줄이는 데만 집중해 산재 은폐 기제로 작용한다는 지적 때문이다. 운동이 종료되고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산업 현장이 무재해를 안전 관리 목표로 두고 있다.
현장 실무자들은 업무 과중을 호소한다. 작은 현장은 안전관리자 혼자서 현장 관리와 안전서류 관리를 함께해야 하니 아차 사고 데이터까지 관리하기는 힘들다는 취지다. 특히 본사가 대형 건설 현장 중심으로 만들어 내려보내는 안전관리 매뉴얼은 과중한 서류 업무를 유발한다. 현장 실무자는 “본사에서 관련 양식과 매뉴얼을 배포해 모든 현장에서 동일하게 사용하는데 저희 현장은 규모가 작다 보니 그에 비해 과중한 업무를 맡게 된다”고 말했다.
오 팀장은 현장 사정에 맞게 체계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조직이 작으면 각 공정별 위험 요인을 주기적으로 파악하는 ‘위험성 평가’를 할 때 하청업체 대표를 불러다 개선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안전보건협의체’를 함께 열어 한꺼번에 두 가지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청업체와 노동자가 많은 대규모 건설 현장에선 시도할 수 없는 방식이다. 오 팀장은 “임의로 법적 의무를 취사선택하라는 게 아니라 그 의무를 이행하는 방식을 작은 현장에 맞추어 바꾸자는 것”이라며 “공단은 법 의무를 지키면서도 현장 사정에 맞게 업무를 간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컨설팅 등을 통해 조언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대재해처벌법 현장 컨설팅에 나선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서울광역본부 오병한 전문위원(왼쪽)이 7일 오후 서울 구로구의 한 건설현장에서 현장 작업자에게 안전수칙 준수 여부 등을 확인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현장의 고유한 안전 목표가 있으면 ‘비상 조치 계획’도 그에 맞게 꾸릴 수 있다. 오 팀장이 안전관리자에게 현장의 비상 조치 계획 자료를 요청하자 현장 안전관리자가 화재 대피 요령을 담은 서류를 들고 왔다. 해당 계획은 각 사업장에서 벌어질 법한 위험 상황을 다양하게 찾고 이에 대비하도록 만들어야 하지만, 일선에선 관행적으로 화재 대피 용도 등으로 만들어 두고 있는게 현실이다.
오 팀장은 “꼭 우리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가 아니더라도 동종업계 타사 사고 사례를 참조해 자주 발생하는 재해 상황에 대비하도록 비상 조치 계획을 만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건설 현장엔 타워크레인으로 고정하지 않은 상태의 갱폼(안전발판)을 해체하려고 볼트를 풀었다가 갱폼이 떨어져 노동자가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많다. 이런 현장은 갱폼을 해체하기 전 관리자와 노동자가 각자 확인해야 할 위험요인을 매뉴얼로 정하고 그에 맞게 훈련할 필요가 있다. 오 팀장은 “이렇게 하면 노동자들도 위험 작업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작업을 중단하고 누구에게 연락을 취할지 알고 즉시 대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노동자가 위험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작업중지’ 권한은 평소 자주 훈련하지 않으면 위기 상황에서 발휘하기 어렵다. 하청업체와 노동자가 불이익을 우려해 작업중지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서다. 오 팀장은 “용기 내어 작업 중지한 노동자가 있으면 참치 캔 세트 같은 작은 선물이라도 제공하면서 사용을 북돋아야 노동자들이 진짜 위험할 때 작업을 중지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작업중지를 악용할 거란 우려에 대해선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상황이 된다”며 “오히려 ‘언제든 위험하면 작업중지를 걸라’고 독려하면 소장의 리더십에 노동자들이 따라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 팀장은 특히 노조에 가입하지 못해 위험 작업을 거부하기 어려운 영세 하청업체 노동자나 건설기계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중대재해법으로 재해가 발생하면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고 그에 맞게 예산과 인력 등을 지급할 의무가 경영책임에게 생기면서, 산업현장은 이제 그간 방치했던 유사 사고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기저에 깔린 위험 요인을 찾고 그에 맞는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오 팀장은 ‘목표→점검→안전역량 향상’의 선순환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회사는 사고에 이런 절차로 대응한다’라고 노사 모두 말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입니다. 위험성 평가 등 개별 안전 과제도 그런 구조 안에서 실시해야 하고요. 초기라서 ‘잘 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작은 목표라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관리하는 순환 구조를 만들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조직의 안전 관리 역량을 성장시킬 수 있을 겁니다.”
글·사진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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