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25일 부산 영도구 에이치제이(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열린 명예복직 및 퇴임식에 참석해 소회를 밝히며 울먹이고 있다. 부산/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5일 아침5시50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전날 깔끔하게 빨아둔 한진중공업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이날은 그가 지난 1986년 옛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민주노조 활동을 이유로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겪고 회사에서 징계해고된 뒤 37년 만에 다시 부산 영도조선소로 돌아가는 날이다. 차창 너머 익숙한 바닷길 풍경을 보며 김 위원은 “투쟁 말고 출근하러 가는” 기분을 새삼 느꼈다. 전날 잠을 한 숨도 자지 못 잤지만, 그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고 했다. <한겨레>가 긴 해고 노동자 투쟁 끝에 다시 회사 문턱을 넘은 김 위원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른 아침 조선소 앞에 도착해 만난 조합원들은 마스크 너머로 웃고 있었다. 김 위원이 오색 무지개떡을 건네자 “내가 이 떡을 받아도 되나” 웃으며 조합원들이 손을 내밀었다. 이 떡은 그동안 함께 싸워준 동지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김 위원이 직접 준비한 떡이다. 김 위원은 ‘복직하면 떡을 돌리겠다’고 종종 말해왔다. 오늘은 그 약속을 지키는 날이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과 에이치제이(HJ)중공업이 김 지도위원의 명예복직과 퇴직에 전격 합의한 데 따라, 25일 부산 에이치제이(HJ)중공업 영도조선소 단결의 광장에서 김 위원의 명예복직 및 퇴직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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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및 퇴직식이 열리기 전, 김 위원은 자신이 일했던 공장 내부를 둘러봤다. 아침 작업이 한창인 선각공사장은 과거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옛날엔 정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사람이 적더라구요. 그만큼 사람이 잘리거나 일 많을 때 쓰는 하청 노동자들이 많아졌다는 뜻이겠죠.”
김 위원은 자신의 근무 장소를 곧바로 알아봤다. 그동안 수없이 떠올렸던 현장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걸 그렇게 37년을 보냈구나, 하는 회한이 들었고요. 지금도 길거리에 있는 해고 노동자들이 있으니 마냥 기뻐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죠.” 김 위원은 무엇보다 “인상 좋고 선하게 웃던 박창수 동지, 다른 사람보다 키 하나는 커서 늘 너울너울 걷던 김주익 동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울컥 났다”고 말했다. 옛 대한조선공사인 한진중공업에선 2000년대 대규모 정리해고와 노조탄압으로 네 명의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민주노조를 이끈 박창수 지회장은 고문실에 끌려간 1991년 의문사했고 김주익 지회장은 회사의 600여명 규모 정리해고에 반발해 크레인 농성을 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2003년 목을 매 숨졌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노조 사무실 인근에 있는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열사 합동 추모비를 둘러보고 있다. 부산/김혜윤 기자
퇴임식이 예정된 아침 11시가 되자 김 위원을 기억하던 이들이 저마다 손에 꽃다발과 선물을 들고 조선소 ‘단결의 광장’을 채웠다. 김 위원도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얼싸안았다. “옛날에 희망버스 타고 왔던 대학생들이 직장생활 하고 결혼을 하니까 진짜 세월이 흘렀구나 싶고 찾아와 준 게 미안하고 좋고 그랬죠.”
김 위원은 지난 2011년 한진중공업이 두 번째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하자 이를 철회시키기 위해 과거 김주익 지회장이 목을 맨 85호 타워크레인에 올라 309일 농성을 벌였다. 김 위원이 크레인 안에서 쏜 140자 트위터 메시지는 시민들의 마음을 모았다. 전국 각지에서 ‘희망버스’가 영도조선소로 모여들었고, 결국 경영진의 해고 철회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투쟁의 순수성’을 의심받을 것을 우려해 복직자 명단에서 스스로 이름을 뺐다.
여러 방문자들의 축사가 끝나고 김 위원이 단상에 올라 펜으로 한줄 한줄 쓴 퇴임사를 읽었다. “탄압과 분열의 상징이었던 한진중공업 작업복은 제가 입고 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미래로 가십시오. 더이상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는, 그리고 더 이상 갈라서지 않는, 단결의 광장이 조합원들의 함성으로 다시 꽉차는 그 미래로 거침없이 당당하게 가십시오.” 낭독하는 목소리에 중간중간 울음이 섞였다.
손님들은 김 위원의 ‘도시락 투쟁’ 결과물인 구내 식당에서 갈비탕으로 배를 채운 뒤 마지막 희망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김 위원이 한진중공업 재직 시절 ‘쥐똥 든 도시락’을 거부한다며 도시락 거부 투쟁을 해 맺은 결실이 구내 식당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가장 큰 불만은 밥이었다. 화장실이 없어 작업장 아래가 똥밭이었고 도시락을 열면 뚜껑엔 쥐 발자국, 안에는 쥐똥이 있었다. 쥐똥 섞인 도시락을 먹고 화장실이 없어 배 안에서 용변을 봐야했던 열악한 노동환경. 그 속에서 수없이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보고 김 위원은 결국 도시락을 집어던지며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그 이후 식당과 화장실이 지어졌다. “그때 식당 생겨서 밥 먹고 나니까 조합원들이 문자로 ‘우리 여기서 밥 먹는다고’ 자랑하고 그런 게 참 뿌듯했죠.” 김 위원이 말했다.
그의 긴 복직투쟁에 ‘이만 포기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 위원에게 복직은 단순한 일자리가 아닌 ‘국가폭력에 대한 회복’을 의미했다. “어느 날 일하는데 나오라고 해서 보자기 씌우고 빨간 방(대공분실)에 들어간 거잖아요. 그런 사람이 나와서 어디 가서 취직을 하고 무슨 삶을 살겠어요. 그렇게 끌려 나갔으니까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게 그 세월에 대한 회복이고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 뒤로 김 위원은 복직투쟁을 이어왔다. 생계비가 없어 깡말랐고 라면만 질리게 먹어 지금도 라면은 먹지 않는다. 조합 상황이 나아지면서 처음 받은 생계비 10만원에 김 위원은 “갑부가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부산 에이치제이중공업 영도조선소 들머리에 있던 복직투쟁 텐트가 텅 비어 있다. 이 텐트는 복직식이 열린 25일 철거됐다. 부산/김혜윤 기자
삼십여년간 요지부동이던 김 위원의 복직 요구가 최근 급물살을 탄 건 복직을 꾸준히 요구한 조합원들 노력이 있었다. 특히 임기 초기부터 김진숙 복직을 내걸고 투쟁했던 심진호 지회장 집행부가 재선한 영향이 컸다. 때마침 한진중공업을 동부건설 컨소시엄이 사들이면서 에이치제이(HJ)중공업으로 바뀌었고 해묵은 과제를 해결할 때가 됐다는 양쪽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물밑 논의가 올초부터 시작돼 두 달에 걸친 실무 논의 끝에 복직이 결정됐다.
이미 떠난 해고자의 복직 투쟁에 어떻게 모든 조합원이 힘을 모았을까. “부채감이 있었을 것이고, 2011년 크레인 투쟁을 함께 해 본 경험이 컸던 것 같아요. 그때 저는 크레인에 있고 같이 투쟁했던 조합원들은 밑에 있었잖아요. 그러니 ‘저 사람을 살려야 된다’는 게 너무 절박했던 거고,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복직을 못하고 있으니까 이 문제를 우리가 풀어야 된다라는 사명감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 위원은 자신 뿐만 아니라 청계피복 노동자 등 그 시절 국가폭력으로 일자리를 잃은 피해자 모두의 명예 복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분들이 복직 투쟁을 벌일 회사는 사라졌지만, 그분들이 당한 건 명백한 국가폭력이니까 정부가 특별법이라도 만들어 명예 복직 시켜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코로나19 이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해고 노동자들 문제도 빨리 해결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시아나케이오와 한국도로공사,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정부와 국회가 씻어야 합니다.”
김 위원은 앞으로의 삶은 몸을 관리하고 스스로를 ‘잘 먹이는’ 일에 집중할 참이다. 세 차례 유방암 수술로 그의 몸은 많이 쇠약해졌다. 김 위원은 “투쟁하면서 늘 고구마, 옥수수 그런 것만 먹었지 육십 평생 살면서 한번도 내 손으로 밥을 지어 나를 먹인 적이 없다”며 “나한테 이제 밥을 해 먹이고 싶다”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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