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호 노동공제연합 풀빵 상임이사장이 23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재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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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조 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 이수호의 명함 앞면은 우리에겐 이미 익숙하다. 전태일·이소선 장학재단 공동이사장이다. 뒷면엔 낯선 직함이 적혀 있다. 노동공제연합 풀빵 상임이사장. 풀빵은 2021년 1월22일 창립했지만 여전히 익숙지 않다.
풀빵이 최근 3년 무이자 약정으로 1구좌 100만원씩 신탁을 받아 마련한 기금을 밑천 삼아 어려움에 부닥친 대리기사, 배달라이더 등 급전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50만원 소액 대출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수호 풀빵 상임이사장을 찾았다. 미싱사, 시다가 지금도 재봉틀을 돌리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골목, 그 한쪽에 자리한 전태일재단에서 23일 그를 만났다. 그가 건넨 명함에 적힌 ‘오래된 미래, 노동공제. 노동자의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에 의한 생활 속 노동 복지연대를 꿈꾸다’라는 다소 긴 설명은 풀빵이 추구하는 가치를 선명하게 웅변했다.
―풀빵은 당연히 전태일 정신을 담은 것일 텐데 노동공제연합은 낯선데요.
“풀빵이라는 이름엔 나이 어린 전태일이 밥도 잘 못 먹는 더 어린 노동자, 여공들에게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 준 것에서 유래한 연대의 의미가 담겼어요. 그런 전태일의 풀빵 정신을 실천할 공제에 관심이 있거나 공제를 실제로 함께 하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또는 사회적 기업 등 여러 형태의 단체들이 같이 마음을 모아 만든 곳입니다. 온전한 이름이 ‘노동공제연합 사단법인 풀빵’입니다.”
―노조나 단순 공제회와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작동하는 개념인가요?
“공제를 품은 노동조합, 노조인데 공제 사업을 하는 것이죠. 지금까지 우리나라 노동조합 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사용자 또는 정부와 교섭이나 투쟁을 하는 게 주요 활동이었어요. 그런데 노동공제연합은 노동자가 서로 돕는 것을 통해 끈끈한 마음과 정을 나누고, 이런 활동으로 사용자와의 교섭이나 노동자에게 필요한 정책을 실현하는 데 힘을 보태는 노동자의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에 의한 생활 속 노동복지연대입니다.”
―풀빵엔 노조뿐 아니라 다른 단체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노동공제 당사자, 노동공제 지원, 참관 등으로 참여한 27개 단위가 각각 50만원에서 300만원까지 낸 출연금 2500만원을 모아 만든 노동공제연합체입니다. 노동공제 당사자로는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공제회 좋은이웃’, ‘라이더유니온’, ‘한국가사노동자협회’,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을 비롯한 17개 단위가 참여하고 있어요. 또 공생사회적협동조합, 노회찬재단, 전태일재단 등 9개 단위가 노동공제 지원 단체로 참여해 공제당사자 단체 소속 어려운 노동자를 지원하고 있어요.”
―어떤 이들이 주로 공제에 가입하나요?
“언론노조 산하 언론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대리운전·라이더처럼 제대로 노동자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 그와 유사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이른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불안정 노동을 하는 이런 분들이 풀빵에 주로 가입하고 있어요.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을 하면서 사회 양극화의 그늘에 있는 분들이 연대의 정신으로 상호 간에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죠.”
―2021년 1월 출범해 3년째 접어들었는데 회원은 얼마나 되나요?
“월 회비 6천원씩 석 달 이상 낸, 기본공제에 들어와 있는 분이 1337명입니다.”
―노동공제 당사자로 가입한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도 풀빵에 가입할 수 있나요?
“현재까지는 그게 좀 애매하죠. 저희가 조금 더 규모가 생기고 안정성이 확보됐을 때 확대를 하려고 하는데 현재로는 책임성이라든지 이런 게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 분들이 문의를 해오면 (공제당사자인) 어느 조직, 어느 단체에 가입하라고 알려드리고 있어요. 그 단체에 가입해 월 회비를 석 달 내면 자격이 되니까요.”
―월 회비 6천원을 내고 공제회원이 되면 어떤 혜택이 있나요?
“긴급하게 발생한 어려움에 부닥친 경우 최대 150만원 풀빵금고 소액 대출을 받을 수도 있고, 의료, 법률, 여행, 집·가전 수리 등에서 혜택을 받아요. 우리 뜻에 공감하는 병원과 협약을 통해 진료비를 15% 할인하고, 일하다 다쳐 입원하면 1일 4만원 최대 4일까지 추가 입원수당을 준다든지, 재해로 사망했을 때 유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합니다.”
―150만원 소액 대출의 밑천이 되는 1구좌 100만원씩 기금을 내는 풀빵 금고지기 자격은 뭔가요?
“금고지기는 회원·비회원 조건이 없습니다. 풀빵의 가치에 동의하는 개인 또는 단체 어디든 가능합니다. 1인이 아닌 가족 등 공동명의로 구좌를 만들 수도 있어요.”
―‘3년 동안 이자는 전혀 받지 않고, 3년 뒤 원금만 돌려받겠다’는 약속만 하면 되는 것이군요?
“네, 대신 법적인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 협약서를 드립니다. 돈을 빌려주면 차용증을 받잖아요. 우리는 차용증을 대신한 협약서를 통해 신탁한 돈이 정말 필요한 데 잘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금고지기 스스로 어려운 분들과 어깨를 겯는 연대의 정신을 실천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소통합니다.”
―최근 1차 금고지기 모집에서 100구좌 1억원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들었어요.
“지난 연말과 올해 1월에 해봤더니 뜻밖에 호응이 좋아서 100구좌 출연을 목표로 했는데 1월에 127구좌가 모였고, 호응이 계속 이어져 어제(2월22일)까지 143개 구좌가 들어왔어요. 개인이 구좌를 튼 경우가 많고, 부부와 아이가 공동으로 가입한 경우도 있습니다. 좀 특별한 경우이긴 한데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노동정책국장은 풀빵 금고지기 모집 얘기를 듣고 10개 구좌(1천만원)를 개설했어요. 외국에서는 비슷한 시도를 많이 하고 있대요. 노동조합의 활동이 꼭 임금을 갖고 싸우는 게 아니고, 공제에 가입하고, 다양한 공제 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실제 삶에 깊숙이 개입해야 한다는 거죠.”
―풀빵 금고지기 2차 모집 공고를 보니 4월11일까지 300구좌 추가 개설을 목표로 제시했어요.
“4월11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조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설립된 날이에요. 그날을 기념하면서 노동공제연합 풀빵을 의제화하려고 그날을 목표일로 설정했어요.”
―풀빵 설립 3년차인데, 금고지기 사업을 이제야 시작한 까닭이 있나요?
“우리가 그런 소액 대출 사업을 하기로 정해놨지만 기금이 필요하잖아요. 그동안 지원단체의 도움을 받아서 시도했는데 그것만으로 유지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참여할 수 있도록 일종의 아이디어를 낸 것이죠. 그런 논의를 했을 때 우리 내부에서도 ‘이건 어렵다’ ‘100만원을 이자도 없이 3년 동안 그냥 맡기겠냐’는 등의 반대가 많았어요. ‘그래도 믿고 한번 해보자’며 시작했는데 많은 분이 참여하니 저희도 상당히 고무됐죠. 다 힘든 처지인데 이런 상부상조 정신이 우리에게 살아 숨 쉰다는 생각,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노동공제연합 ‘풀빵’은 노동자의,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에 의한 생활 속 노동복지연대를 표방한다. 사진은 ‘풀빵’으로부터 기금 대출을 이용한 배달라이더의 모습. 노동공제연합 풀빵 제공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150만원을 대출해 준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풀빵금고 쪽에선 개인의 신청을 받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그 개인은 어느 회원단체 소속이잖아요. 회원단체가 일종의 보증을 하는 셈이니 저희는 진짜 묻지도 않고 대출해 줍니다. 대출금은 10개월 원금·이자 분할상환 방식입니다. 원금과 이자 3%를 10개월 동안 분할상환하도록 풀빵금고 소액 대출이 설계되어 있어요.”
―소액 대출을 받는 이들은 어떤 분인가요?
“대리운전 기사, 라이더들인데 이들은 직업을 두세개씩 갖고 있어요. 안 그러면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니까 굉장히 어렵죠. 갑자기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아 급하게 뭔가 물어줘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노동자들입니다. 이런 노동자가 의외로 많아요. 그런 사각지대에서 일하는 분에게 기회를 좀 드리고 같이 연대하자는 생각으로 150만원 한도를 설정했어요.”
―지속 가능해야 할 텐데, 원리금 회수를 못 하는 것에 대한 우려는 없나요?
“아직 그런 사고가 없어요. 풀빵금고는 어느 정도 담보 장치가 있어요. 만약 원금을 못 갚는 사고가 생기면 그 회원의 소속 단체와 우리 풀빵이 공동 책임을 지자 이렇게 정해 놓고 있는 것이죠.”
―이런 시도가 어떤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노동운동도 상당히 딜레마 상황에 직면한 것으로 보여요. 윤석열 정부가 노동에 대해 심각한 공격을 하는데, 노동조합이 권력화돼 있고, 그 권력이 잘못 행사되고, 비위가 있다 이렇게 보는 입장이잖아요. 윤석열 정부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봐요. ‘건폭’(건설 현장 폭력 행위)이라고 이름 지어 몹시 나쁜 이미지를 덧씌우는 이런 건…. 아니거든요. 하지만 왜 그렇게 노동이 이분화되고 마치 적대관계처럼 되어 왔는지 성찰적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노동조합의 활동도 다소 정치적이거나, 대기업 중심의 임금(인상투쟁)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풀빵처럼 생활에 밀착하면서 조합원들끼리 서로 뜻을 나누고 서로 도와주는 이런 운동, 이른바 공제식 운동을 같이 해왔더라면 이렇게까지는 공격을 안 당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느냐 싶은 것이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1920년대 최초로 노동조합이 결성될 때 조선노동공제회로 시작했어요. 노동자들의 단결과 상부상조가 바로 노동운동 기본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걸 우리가 다시 한번 구현을 해보자는 것이죠.”
―정부의 공세에 대한 돌파구나 노조가 여론의 지지를 얻는 방법이 될 수 있겠네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지만…. 저는 사실 노동자끼리 싸움하는 형태로 보이는 건 정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노동자끼리 정규직 비정규직, 고임금 저임금이 있으니 그 안에서 서로 그걸 좀 나누고 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해보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근본 책임은 사용자와 정부한테 있으니 거기에 맞선 투쟁을 계속하면서도 우리끼리도 뜻을 잘 모아야 하는데 노노 갈등이라고…. 조직 간의 갈등도 있지만 고임금 노동자와 저임금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 갈등도 많잖아요. 노동운동가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제 책임도 크고 고민도 많죠. 참, 안타까워요. 어느 측면에서든 그게 노동자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거죠. 저는 사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민주화 운동과 이렇게 궤를 같이하면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해나가고 있지만 거기에 더해 이제는 정말 연대, 공제, 서로 자조하는 이런 것까지 품으면서 노동운동의 폭을 더욱 넓혀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거죠.”
―윤석열 정부의 공세가 터무니없지만 여론에 먹혀드는 측면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른바 보수 진영 쪽에서는 늘 그걸 부추겨왔죠. 정말 그 어려운 화물 노동자들이 약속을 지키라면서 한번 들고일어났는데 그걸 힘으로 제압했어요.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제압하면 전체 국민이 좋아한다는 잘못된 생각, 그런 착시를 하고 있어요. 이런 잘못된 생각을 갖고 이제 (노조에) 회계 장부를 내놓으라, 다 들여다보겠다, 이러는데 이건 아니죠. 지금 당장은 (윤석열 정부가) 힘이 있으니까 검찰력 등을 과도하게 앞세우지만 저는 결국 이런 정부는 오래가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과거에 우리 역사를 봐도 그렇고, 잘못된 것 많지만 노동자만 때려선 안 되죠. 건수 잡았다는 식으로 이러는 건 정말 안 됩니다. 제가 선생을 오래 했지만 학급 군기를 잡겠다며 앞에서 까부는 아이 몇을 막 패는 식이죠. 그런 식으로 사회에 겁주겠다는 것입니다. 매 맞는 애는 뭡니까? 이게 뭐 하자는 것입니까?”
―풀빵 같은 노동자 공제가 잘되기 위해서 법적·제도적으로 정비해야 할 것도 있지 않나요?
“지금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그런 공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좀 마련해 달라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데 아직도 안 됐어요. 지금 저희가 굉장히 좋은 뜻으로 해도 정말 법이 미비해서 생길 수 있는 문제가 있잖아요. 그런 것 때문에 굉장히 우려도 많이 하는데 법이 너무 늦어요. 법적 장치를 빨리 마련하는 게 절실해요.”
―지금도 많은 곳에서 공제회를 하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교원공제회, 군인공제회 다 있어요. 근데 그건 따로 특별법을 만들어 그 사람들만 굉장히 유리하도록 해놨어요. 그런 공제는 지금 일종의 권력이 돼 있죠? 어마어마합니다. 돈도 많고, 뭐 특혜를 많이 줬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풀빵처럼 소액 출연으로 공제연대를 할 때 이를 아우르는 그런 법은 없는 것이죠. 법이 미비한 상황에서 저희가 나서서 이렇게 하려고 하니까 어렵죠. 어렵지만 풀빵금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고 누군가는 해줘야 하고, 선한 뜻과 의지를 자꾸 모아가면서 우리나라 노동운동도 이제 여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폭을 넓혀서 참여할 필요도 있고 해서 저 같은 사람이 심부름을 하는 거죠.”
신승근 기자
sks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