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유방암에 걸린 뒤 산업재해 승인 신청을 했지만 4년여만에 진행된 역학조사 이후 산재 불승인 결정을 받은 최진경씨. 최씨가 지난 2월25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집에서 과거 근무하던 시절의 일과 암 투병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동생이 떠나기 전 부고 문자 메시지를 보낼 사람들을 따로 모아두었어요. 저희도 보낼 때 실례가 되는 건 아닌가 했는데….”
지난 4일 밤 서울 경희대학교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 최진경(48)씨의 오빠 준희씨는 이렇게 말했다. 최씨는 2018년 7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은 뒤 투병 생활을 해오다 자신의 병이 산업재해로 인해 발생했음을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이날 오전 숨졌다.
최씨는 1603일 동안 국가의 판단을 기다렸다. 삼성디스플레이 기흥연구소에서 17년 동안 연구원으로 일하다 퇴사 이듬해 유방암 진단을 받은 그는 2019년 3월4일 ‘연구를 수행하며 벤젠 등 다량의 유해물질과 방사선, 전자파 등에 노출됐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승인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4년 뒤인 올해 7월24일이 돼서야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공단은 ‘역학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폴리염화바이페닐(PCB)과 방사선 노출 수준이 높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며 최종 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다만, 심의위원 7명 중 한 명은 ‘유방암과 관련 있는 유해요인(방사선, 산화에틸렌 등)의 복합적·누적적 작용으로 병이 발생했을 개연성이 있고, 특히 첨단산업에서는 법적·규범적(보편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불승인 판정이 4년 넘게 지체된 배경에는 ‘역학조사 장기화’라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사 수행 기관인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은 2019년 5월3일 공단으로부터 역학조사 의뢰를 접수했지만, 2023년 2월까지 삼성전자를 상대로 두 차례 ‘사업자 추가자료’ 제출을 요청하는 것 외에 다른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2023년 3월15일이 돼서야 최씨에게 첫 면담조사를 요청했는데, 이는 한겨레가
‘질병산재 황유미들의 733년’ 기획 보도에서 최씨의 사연을 보도한 지 닷새가 지난 시점이었다. 삼성전자는 ‘개발 업무는 확인 불가하다’고 회신했다.
고 최진경씨의 장례식장 빈소 알림.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산재 신청 당시 이미 최씨가 근무했던 연구실과 현장 상황이 담긴 자료가 사라진 상황이라, 내실 있는 역학조사가 진행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노동계에서 제기됐다. 그런데도 산보연은 ‘역학조사 장기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자, 단 두 달 만에 역학조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를 지켜본 최씨는 당시 “무엇을 조사하느라 4년이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퇴사 전에 폐기된 개발라인 업무를 4년간 조사했다는 말인가”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산재 승인을 바라며 모아온 돈을 모두 병원비에 털어 넣은 최씨는 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편, 마지막 순간까지 역학조사 장기화 문제 해결에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도 화답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4일 역학조사 기간을 법으로 정해 이를 넘기면 국가가 산재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선지급하도록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약 없는 역학조사 결과만을 기다리며 병원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들까지 함께 무너지는 상황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이미 뇌를 포함해 온몸에 퍼진 암세포가 발목을 잡았다. 최씨는
지난달 1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출석해 역학조사 장기화에 따른 피해를 증언하려 했으나, 병세 악화로 입원해 우 의원이 증언을 대독해야 했다. 최씨는 우 의원이 대독한 증언에서 “4년을 끌더니 납득할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불승인됐다. (중략) 산재 인정을 받으면 치료비에 보탬이 되겠지만 제 몸 상태가 당장 하루 앞을 장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최씨의 사연을 접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먹먹하다”며 “샘플로 꼼꼼하게 검토하겠다”고 말했지만, 최씨는 끝내 병원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최근 5년 동안(2018∼2022년) 역학조사 결과를 받아보지 못한 채 사망한 노동자는 111명에 달한다. 우 의원은 “이건 정상적인 국가 제도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진경이의 마지막을 보고 참 진경이스럽다고 생각해요. 예전 학생 시절에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그런 성격이었어요.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열심히 문제 제기했을 텐데 아쉽네요.” 언니 영경씨가 웃으며 말했다.
영정 사진 속 최씨는 선글라스를 쓰고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암 진단받기 전 가족들하고 원주에 있는 한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함께 고른 사진인데 가족들도 좋아하고, 조문객들도 전부 ‘정말 진경이 같은 스타일로 잘 골랐다’고 칭찬 일색이네요.” 퇴사 뒤 생기발랄했던 동생의 모습을 그리던 언니의 눈빛이 형광등 아래에서 촉촉하게 빛났다.
장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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