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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동료들의 현수막, 그날부터 공장은 지옥이 되었다

등록 2012-10-12 21:23수정 2012-10-12 21:34

지난달 24일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씨가 조선소가 내려다보이는 울산시 방어진체육공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직장 내 따돌림, 비방 현수막, 미행, 업무 변경 등 현저한 직장 스트레스가 우울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그에게 산재요양 판정을 내렸다.
지난달 24일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씨가 조선소가 내려다보이는 울산시 방어진체육공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직장 내 따돌림, 비방 현수막, 미행, 업무 변경 등 현저한 직장 스트레스가 우울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그에게 산재요양 판정을 내렸다.
[토요판] 특집 /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 이야기
▶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기억은 무엇을 말하는가? 1997년 외환위기의 기억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민주노조가 스러지고 비정규직이 공장의 절반을 채워간 20여년 세월을 현대미포조선의 노동자 김석진씨가 뚫고 왔다. 인터뷰 내내 김석진씨는 기력이 없었다. 그가 앓고 있는 우울증은 노동운동의 상처로 보였다.

회사 명예훼손·명령 불복종으로
입사한 지 17년 만에 해고
하지만 노사 무쟁의 결의대회에
반대한 괘씸죄가 진짜 이유

1·2심서 부당해고 판결 뒤
회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 선임
대법에서 3년 이상을 끌다
8년3개월 만에 공장으로 돌아와

현대미포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갈린다. 지난 6월 수주잔량 기준으로 세계 7위(국내 6위)의 조선소를 한쪽에선 ‘산업 평화의 모범 사업장’으로, 다른 한쪽에선 ‘비정규직의 집합소’로 부른다. 지난달 23일 울산에서 만난 현대미포조선의 한 정규직 노동자에게 조선소 내 사내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물어보자 이렇게 답했다.

“공중에서 철근이 떨어져 사내하청 노동자 무릎에 맞았어요. ‘악’ 소리가 들렸죠. 그런데 그 친구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더라고요. 하청노동자가 다치면 회사 응급차도 안 와요. 그 사람도 트럭을 타고 나갔죠.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산재 내면 잘린다고 생각해서 병원 가는 것도 꺼려요. 파리 목숨이에요.”

대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의 비율이 많아질수록,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훼손될 가능성은 커진다. 그리고 더 많은 파이를 가져가기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반목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내 조선산업의 경우 이미 사내하청 노동자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다. 지난해 민간 연구기관인 경제개혁연구소의 위평량 연구원이 국내 조선산업 사업자 7곳과 중소 하도급(사내하청) 기업 466곳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00년에서 2010년까지 사내하도급 노동자의 증가율은 정규직의 6배에 이르렀다. 또한 최근 4년 동안의 사내하도급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1.3배 많았다.

현대미포조선은 울산에서 가장 평화로운 사업장이다. 1997년 이후 16년 연속 노사 무분규의 길을 걸었다. 반면 이 회사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 김석진(51)씨는 15년째 ‘부당해고 관련 투쟁’을 벌이고 있다. 8년은 복직 투쟁을 하느라 나머지는 해고기간 임금 가산금을 받기 위해 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회사의 감시와 미행, 동료들의 ‘왕따’를 받았다. 동료들은 김씨를 비난하는 펼침막도 걸었다. 우울증을 앓게 된 김씨는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 산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부터 ‘산재요양’ 판정을 받았다. 그는 조선소 내 비정규직을 옹호했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한겨레>는 김씨에 대한 직장 내 따돌림 양상이 구체적으로 담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재해조사서를 입수했다. 위원회는 회사와 직원들이 그를 미행·감시한 사실과 직장 내 따돌림, 추가근무 배제, 업무 변경 등의 사실을 확인하고 산재요양 결정을 내렸다. 노동운동 활동가에 대한 직장 내 따돌림과 이로 인한 산업재해(우울증)를 국가기관이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지난 6월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과 정규직화를 위해 헌신했다며 김씨에게 제8회 박종철인권상을 안겼다.

지난달 24일 현대미포조선이 내려다보이는 울산 방어진체육공원 산자락에서 그를 만났다. 우울증 알약을 먹고 나온 그는 다섯 시간의 인터뷰 뒤에 바람을 쐬어야 건강에 좋다며 산으로 걸어갔다. 재해조사서에 실린 일부 내용과 그의 인터뷰를 옮긴다.

비정규직 해고자를 도운 정규직

-1980년에 현대미포조선에 입사했다.

“경북 월성이 고향인데 고등학교를 울산공고로 왔다. 졸업하고 바로 현대미포조선에 용접공으로 들어왔지. 80년대만 해도 공장 정문 앞에서 경비들이 바리캉(이발기)을 들고 서 있었다. 나도 한번 머리가 깎인 적이 있고….”

-현대미포조선에서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가 생겼나?

“그해 노조가 결성됐다. 나는 조직부 차장에 이어 초대 체육부장을 했다. 파업 때엔 춤 배워와 가르치고 정당방위대도 만들고… 그런 활동을 했다. 94년부터 97년까지 네 차례 대의원을 했고 96년에는 ‘민주노동자동지회’라는 현장조직을 만들었다.”

-현장조직이 뭔가?

“노조 집행부를 견제, 견인하고 노동운동 활동가를 단련시킨다. 그러다가 97년에 상사 명령 불복종과 회사 명예훼손의 이유로 해고됐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해 연말에 무쟁의 무분규 내용을 담은 노사화합 결의대회를 처음으로 열었다. 거기에 내가 강력히 반대했다. 나는 그때부터 민주노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해고됐는데 노조가 도와주지 않았나?

“당시 노조 간부가 와서 세 가지를 이야기하더라. 현장조직 해체, 대의원 사퇴, 노조활동 포기 각서 작성 등을 하면 정직 정도까지 낮출 수 있다는 거다. 회사가 시켜서 온 건 아니고 중간 다리 정도로 온 거지. 그런데 그런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받으면 안 되잖아. 사비를 들여 소송을 시작했다. 1심과 2심 법원 모두 해고할 만한 사유가 안 되는 ‘과잉징계’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결은?

“그런데 대법원 판결이 안 나는 거다. 민사소송법 199조를 보면, 대법원이 다섯 달 안에 판결해야 한다. 대법원에서는 사실 심리는 안 하고 법리 심리만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당시 회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새로 선임한 상태였다. 1년, 2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고… 기다리다 지쳐 2005년 1~2월, 6~7월 대법원 앞에서 ‘판결 빨리 내려달라’고 1인시위를 했다. 변호사가 그러더라. 최대한 판결을 늦추는 게 회사 전략인 거 같다고. 내가 당시 회사 앞에서도 1인시위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비들과 충돌이 발생하면 또 해고 사유가 생기니까….”

-결국 대법원이 재판을 열었나?

“문화방송 ‘시사매거진 2580’의 제작 과정에서 대법원이 선고일을 밝혔다. 2005년 7월22일에 최종적으로 해고 무효 판결이 났다. 고법 판결이 나고 3년5개월이 걸렸다.”

그해 8월9일 그는 시설장비반으로 원직 복직됐다. 8년3개월 만에 돌아온 공장은 많은 게 변해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겪은 한국 사회는 안정을 희구했고, 공장은 점점 ‘사내하청 기지’가 되어갔다. 김씨는 다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해 말 노조 위원장 선거에 뛰어든 그는 결선투표에서 최종 낙선했다. 김씨를 만나기 전날에 만난 그의 동료는 “그때 김석진씨가 결선투표까지 가는 것을 보고 회사가 무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노동운동의 초점은 무엇이었나?

“이미 현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가 절반에 육박하고 있었다. 2008년 사내하청업체인 용인기업 노동자 30여명이 부당해고 철회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현대미포조선의 (정규직 직접고용) 노동자와 지위가 같은지 가려달라는 ‘종업원 지위 확인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지위가 같지 않다는 고법 판결을 뒤엎고 파기환송했다. 그런데 또 시간이 길어질 것 같더라. 그해 9월 나를 포함한 정규직 15명이 나섰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에 식당과 정문 앞에서 회사는 재판을 지연시키지 말고 빨리 복직시키라고 선전전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은 1개월 정직을 받았고 또 한 명은 목을 매 투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정규직 해고자들은 밖에서 싸우고 우리 정규직들은 안에서 싸웠지.”

심야테러당한 뒤 정직… 그 뒤 투명인간이 되다

-일부는 굴뚝에 올라가 점거농성을 벌였던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수석부본부장과 정규직 활동가 한 명이 올라갔어. 아래에는 천막을 치고 농성을 했다. 영남노동자대회를 마친 2009년 1월17일 밤이었다. 조승수 의원을 비롯해 진보신당 단식농성자 등 10여명이 천막 안에 있었다. 그런데 밤 11시30분께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 50~60명이 쇠파이프와 각목, 소화기를 들고 쳐들어왔다. ‘와’ 하는 소리를 내며 전경들을 밀어내고 들어왔어. 아마 전경들도 맞았을 거야. 나는 각목으로 맞았는데, 깨어나보니 울산대병원 응급실이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였나?

“현대중공업 경비들이었다.”(현대미포조선과 현대중공업은 실질적 주주(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가 같은 형제 기업이다.)

‘현대중공업 경비대 심야테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검찰이 현대중공업 경비들을 기소하면서 적용한 혐의는 ‘기물손괴죄’였다. 시위용품을 부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폭행 혐의에 대해서는 김씨와 진보신당 당원들은 누가 때렸는지 가릴 수 없다며 기소하지 않았다. 피의자를 특정할 수 없을 경우에는 통상 ‘공동정범’으로 기소가 가능하다.

김석진씨는 이 일로 현대미포조선에서 두 달 정직을 당한다. 그사이 현대미포조선 사쪽과 정규직 노조는 용인기업 해고노동자 문제를 합의하고 이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 하지만 김씨의 고통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회사에서 미행을 했다고?

“거의 매일 집 근처로 현대미포조선 잠바를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감시했다. 내가 차를 몰고 나가면 차가 따라왔다. 그래서 현대자동차 노조 영상팀에 부탁해 당시 상황을 촬영했다. 울산32누 133×… 현대미포 차량이었다.”

이에 대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차량 세 대가 현대미포조선 총무부 차량이었다며 “회사 노무관리 직원들이 신청인의 자택 주변을 감시하고 차량을 이용해 신청인을 미행한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2009년 5월16일 김씨는 다시 출근을 했다. 충격적인 현장을 목도했다. 동료들 명의의 낯선 펼침막이 그가 일하는 현장사무소에 걸린 것이다. ‘우리 삶의 일터를 망하게 하는 자와는 함께 근무할 수 없다’. 며칠 뒤에는 이런 펼침막도 붙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 ‘기만과 거짓… 내 일터 말아먹으려는 자, 당신을 규탄한다’. 그날부터 김석진씨에게 공장은 ‘지옥’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하루 일과를 설명해달라.

“아침 7시20분에 공장 후문에 도착한다. 그러면 경비들이 3~4m 뒤에서 따라붙는다. 그렇게 1.5㎞를 걸어 비난 현수막이 걸린 현장사무소에 도착한다. 젊은 친구들도 본 체 만 체 하고… 아무도 인사를 안 한다. 오전 8시에 업무를 배정받는다. 나에게는 시설물 보수 작업이 떨어진다. 이를테면 녹을 없애고 페인트칠을 하는 일이다.”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자동차 공장과 달리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 건조중인 대형 선박을 찾아다니며 대개 일주일 단위로 업무를 배정받는다. 반장이 업무를 나눠주면 조별로 업무를 받고 움직인다. 김씨의 동료는 “김석진씨 같은 고참한테 추울 때 난간을 수리하라고 한다든지 신입사원이 하는 일을 시켰다”고 말했다.

-동료들과 말을 안 하나?

“첫 출근 이후로 말을 잘 안 건다. 점심때는 조장이 따라오고… 어디를 가면 항상 따라온다. 왜 따라오냐고 하면 안전사고 방지 차원에서라고 한다. 밥 먹을 때도 먼발치에 앉아서 먹는 거 쳐다보고 있고. 3년 가까이 이 짓을 했다.”

인터뷰를 마친 김석진씨(오른쪽)가 산에서 내려가고 있다. 한때 현대미포조선 노조위원장 선거의 결선투표까지 진출한 노동운동가였지만, 지금은 직장 내 따돌림으로 우울증을 앓는 노동자가 되었다.
인터뷰를 마친 김석진씨(오른쪽)가 산에서 내려가고 있다. 한때 현대미포조선 노조위원장 선거의 결선투표까지 진출한 노동운동가였지만, 지금은 직장 내 따돌림으로 우울증을 앓는 노동자가 되었다.
43명한테 떨어진 오더 “김석진과 말하지 마라”

김석진씨는 이때부터 지난해 12월 우울증으로 휴직할 때까지 2년 넘게 이른바 ‘왕따’를 당한다. 김씨가 산재요양 신청을 하면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제출한 동료와의 대화 녹취록을 읽어보면 공장 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김석진: 출근길에 만나서 이렇게 걸어가는 걸 문제 잡을 이유는 없잖아요.

동료: 그런데 저그가 생각하기는 석진이하고 같이 이래 다니면 위험하니까 함부로 같이 다니지도 마라 이런 식이지 … 일부러 고통을 주는 거 아니가. 내가 이해하는 동료들한테 물어봤어. ‘당신들은 석진씨하고 팀에서 이야기도 안 하지?’ 이러니까 ‘이야기하면 왕따당해서 이야기도 못한다’ 이러데.

김석진: 아침에 출근하면 말을 안 해요.

동료: 그래 말 안 한다 하데. ‘석진이하고 이야기하면 왕따를 시키기 때문에 안 한다’ 하데.

-1인시위 등 ‘튀는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괴리감이 생긴 거 아닐까?

“같은 팀 동료들 43명에게 오더가 떨어진 거야. 김석진하고 이야기하지 말아라. 물론 그렇다고 동료들 마음이 다 그랬겠냐? 나를 만나면 누가 보고하고 그러다 자기네들끼리 견제하는 거야. 그러다 보니 왕따가 된 거고. 매달 1만원씩 팀 회비도 내는데 내지 말라고 하더라고.”

반면 회사는 이런 갈등이 동료들의 자발적 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김씨가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해고 관련 집회에서 ‘회사가 망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동료들이 이를 사과하라는 차원에서 그런 행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펼침막 철거 문제나, 팀 회비도 김씨가 사과하면 받아주겠다는 게 동료들의 입장이라고 회사는 밝혔다.

-건강은 왜 나빠졌나?

“회사에서 그런 일 당하고 한 달 지나니까 식은땀 나고 잠도 안 오고 화병이 쌓였다. 2009년 6월부터 정신과를 다니고 있다. 경비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꾼다. 2009년에 자동차 타고 가는데 갑자기 회사 차량이 끼어들어 급브레이크를 밟고 나와서 뭐라고 욕하고 가버렸거든. 그렇게 안 좋았던 일도 꿈에 나타난다. 힘들어서 지난해 12월 휴직계를 냈고, 지난 5월 산재가 승인됐다.”

-복직은 했지만 해고 관련 소송이 또 진행중이다.

“부당해고 기간만큼 주기로 되어 있는 100%의 임금 가산금을 받지 못했다. 노사가 1990년 단체협약에서 합의한 징벌적 조항이다. 즉, 해고기간 임금을 더 지급함으로써 부당해고를 막자는 데 노사가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사쪽은 100% 가산금 지급은 복직 직후 한 달분만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심은 내가 이겼고 2심은 졌지만 대법원이 다시 파기환송했다. 이렇게 되자 회사는 부산고등법원장 출신을 영입해 재판에 나섰다. 하지만 결국 파기환송심에서도 고등법원은 100% 가산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다시 회사가 대법원에 재상고를 했다.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광장을 법률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나?

“회사 쪽에서 또한 현대미포조선 조합원 2700명을 대상으로 탄원서를 받고 있다. 지난 파기환송심에서 노조가 ‘노동조합원 일동’ 명의로 회사 쪽의 해석이 맞다는 탄원서를 냈다.”

지난 11일 현대미포조선 노조 관계자는 “노조 운영위원회와 대의원회에서는 가산금 지급은 1개월분에 한해 지급받는 것으로 해석을 내렸다”며 “하지만 법원 결정이 (다르게) 난 만큼 이 부분에 대해 재검토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석진씨도 조합원이기 때문에 노조가 보호해야 할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현대미포조선 사쪽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판정을 받아들이면서도, 직장 내 따돌림에 대한 회사 차원의 조직적 개입은 없었다고 밝혔다. 비난 펼침막을 건 것도, 점심때 쫓아다니는 것도 동료들의 자발적인 의지에서라는 얘기다. 지난달 28일 홍보실 관계자가 말했다.

“다소 과잉으로 한 적이 한두 번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하진 않았습니다. 과잉충성 직원이 그랬을 수 있죠. 개인적인 입장에서 억울하겠지만 오죽하면 왕따당하겠습니까? 그분 조직이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자기 입장에서 탄압받고 그런 거죠.”

김석진씨의 편에 선 동료들은 찾기 어려웠다. 그가 이끄는 현장조직인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도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재판을 미루는 법원, 대형 로펌과 명망가를 변호사로 불러들인 재판에서 그는 홀로 싸우고 있다. 김석진씨는 시대의 부적응아일까? 우리가 왕따의 공범은 아닐까? 그가 묻고 있다.

울산/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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