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 인생학교 2기 커뮤니티인 ‘드림가드닝’ 회원들이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가드닝 자원봉사 프로젝트인 초록산책단 강의를 듣고 나온 뒤 꽃밭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가드닝 협동조합을 차근차근 준비 중인 이들은 5월 개장하는 ‘서울로7017’의 꽃과 나무를 가꾸는 자원봉사를 하게 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가드닝 협동조합 꿈꾸는 ‘50플러스 인생학교’ 졸업생들
물리학에서 모든 에너지가 시간에 따라 소멸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습니다. 인간은 교육과 의지로 시간이란 변수를 극복합니다. 서울시가 은퇴를 고민하는 50대 이상의 시니어들에게 새로운 친구들과 으샤으샤 할 아지트를 제공하는 50플러스 캠퍼스를 다녀왔습니다. 전공필수인 ‘50플러스 인생학교’를 수강하고 또래들과 가드닝 협동조합을 꿈꾸는 ‘백발의 청년’을 만나고 왔습니다. ‘나이야 가라’가 아니라 ‘나이쯤 와라’를 외치는 이들의 패기는 청년의 그것이었습니다.
올해 봄은 유난히 벚꽃이 늦었다. 지난 4일에야 서울 마포구 공덕오거리 롯데시티호텔 옆에서 활짝 핀 벚꽃을 처음 봤다. 40층 높은 건물 아래 작은 키의 벚나무 두 그루 덕에 미세먼지로 침침해진 눈이 환해졌다.
벚나무를 뒤로하고 공덕오거리를 굽어보는 염리동 언덕 위의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로 향했다. 옛 한국산업인력공단을 리모델링한 캠퍼스는 새 단장을 하기 위해 온통 공사중이었다. 이날 오후 5시 ‘50플러스 인생학교’ 1기 입학식이 열렸다. 인생학교는 50~60살의 중년들에게 새로운 인생에 대한 설계를 도와주려는 취지로 개설된 과정이다. 50플러스란 말도 ‘늙다’라는 개념을 뺀 중년을 뜻하는 신조어다.
4층 대강당에서 열린 입학식에는 머리가 희끗한 50대 신입생 49명이 7개조로 나뉘어 디귿(ㄷ)자로 배치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남성 29명, 여성 20명이었다. 완전히 은발인 신사도 보였다. 반면 ‘저분은 왜 여기 오셨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젊어 보이는 여성도 있었다. 외모만 보면 동기들의 나이 차는 10년이 훌쩍 넘어 보였다.
무뚝뚝한 50대 표정이 환해진 비결
49명의 표정은 통념상의 여느 중년들처럼 굳어 있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서부캠퍼스 1기 졸업생 현길룡씨가 마이크를 잡자마자 “자, 생명을 같이할 전우입니다. 서로 인사합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입생들은 웃지 않았다. ‘전우’라는 말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한 시간이 걸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자신의 닉네임을 사람들에게 발표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50플러스들이 무뚝뚝한 건 이유가 있다. 유독 힘들기 때문이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매년 발간하는 <한눈에 보는 사회상(Society at a Glance) 2016>을 보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자살률 1위이며 삶의 만족도도 최하위 수준이다. 특히 50대의 사회적 고립감(35위)이 회원국 가운데 가장 위험한 상태로 나타났다.
실제 서울시민들이 퇴직하는 평균 연령은 53살이다(2015년 기준). 재취업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10개월이지만 대부분 질 낮은 일자리다. 지난해 8월 기준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체 비정규직 근로자 644만명 가운데 60살 이상 비정규직이 146만8000명(22.8%)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50대 비정규직이 138만2000명(21.5%)이었다. 이 때문에 노년 빈곤율은 오이시디 최고 수준인 44.7%(2013년 기준)다.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50플러스재단을 만들어 50대 이상 시니어의 재교육에 나선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에게 소득과 함께 사회봉사의 기회를 보장하는 ‘앙코르 커리어’를 마련하기 위해 몇개월만 투자해 또래들과 함께 고민해볼 기회와 공간을 제공하려는 의도다.
그런데 필수 강의로 불리는 인생학교 강좌는 4월4일 시작해서 6월20일 끝난다. 석달이 채 안 되는 11주 수업으로 과연 50대들이 환하게 웃고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을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선뜻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해답은 이들의 선배들을 보면 되지 않을까? 이날 입학식에는 신입생들을 돕는 ‘자기주도 학습설계사’(모더레이터) 자격으로 참석한 선배들이 있었다. 이강호(59)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이씨는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12주 동안 서부캠퍼스 인생학교 2기를 다녔다. 그는 “우리 때는 입학식 때 오늘처럼 교수님들이 뭘 시켰더니 ‘내가 왜 이런 걸 해야 하느냐’며 욕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그런 분위기가 변곡점을 찍기 시작한 것은 6주째 동기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 때부터였다고 말했다. 그 역시 2기 사진 커뮤니티 ‘펀’(PUN: 사진을 우리 함께 나누자란 뜻)의 대표이고 가드닝 커뮤니티 ‘드림가드닝’에서 활동 중이다.
50+인생학교 최고의 소득은 ‘친구’
서부캠퍼스 인생학교 2기의 커뮤니티 6개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는 드림가드닝 회원을 지난달 29일 서울시 엔피오(NPO)센터 1층 강당에서 만났다. 드림가드닝 멤버는 모두 15명이지만 이날 나온 이는 서울시 초록산책단으로 활동하기 위해 서울시에서 강의를 듣는 8명이었다.
초록산책단은 5월말 개장 예정인 ‘서울로7017’(옛 서울역 고가와 주변에 조성하는 공원)의 꽃과 나무를 유지·관리하는 자원봉사 모임이다. 지난 1월 초록산책단 2기는 50명을 뽑았는데 80명이 지원했다. 과정을 마치고 바로 현장에 투입되기 때문에 실무 경험을 갖췄거나 공원과 가까운 지역 주민을 우선 선발하다 보니 30여명이 떨어졌다는 게 서울시 조경과의 설명이다.
멤버 가운데 시민정원사 등 관련 과정을 준비해온 8명은 통과했지만 5명은 떨어졌다. 시민정원사는 서울시가 지역 조경식물을 돌볼 자원봉사자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으로 2015년 처음 수료생을 배출했다. 4개월 기본 과정과 10개월의 심화 과정으로 구성된다. 즉 드림가드닝 회원의 상당수는 지난해 9월 인생학교에 오기 전부터 조경을 통한 인생 2막을 차곡차곡 준비해오고 있던 셈이다.
우울증도 치료하는 동기의 힘
이날 만난 8명의 표정은 정말 봄꽃처럼 화사했다. 똑같이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지만 4일 중부캠퍼스 입학식에서 만났던 신입생과 대비가 됐다. 환한 웃음의 비결을 물었다. 답변은 명쾌했다. ‘친구’라고 입을 모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또렷했다. 그리고 하나 더. 꽃과 나무로 대표되는 자연을 가꾸는 일을 하며 인생 2막을 살겠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대표인 박수덕(59)씨는 “지난해 시민정원사 심화 과정 강의를 듣다가 자연을 즐기면서 주변을 가꾸는 자원봉사를 해보자는 취지로 가드닝 커뮤니티를 제안했는데 호응이 좋았다”며 “특히 여성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국책은행 등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퇴직한 박씨는 75살 이후 자연과 함께 살기 위해 지금 가드닝을 배운다고 말했다. 무려 25년 뒤의 삶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분재 등 이미 관련 활동을 꾸준히 해온 유병옥(56)씨는 “맨 처음엔 커뮤니티라는 말도 생소했다. 4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6개의 커뮤니티 가운데 가장 멤버가 많다”고 말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졸업한 뒤 석달이 지난 2월부터였다. 가드닝 일을 하기 전 자연을 느껴보자는 취지로 북한산 둘레길과 안산·인왕산 등 서울의 주요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매주 등산과 둘레길을 걸으며 꽃과 나무에 대해 대화하다 보니 새로운 감성에 눈을 떴다고 한다. 하지만 꽃과 나무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건 끈끈한 연대감이었다. 박준기(58)씨는 “우울증 때문에 몇년 동안 사람을 사귀지 않았는데 사람을 만나면 좀 좋아지겠다고 생각해서 인생학교를 지원했다”며 “맨 처음에는 무표정했지만 또래들 덕분에 지금은 활짝 웃게 됐다”고 말했다.
커뮤니티에는 부부도 있었다. 김봉익(57)·민영임(56)씨 부부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입학했다. 민씨는 이미 동네에서 시든 나무와 꽃을 잘 되살려내 ‘능력자’로 통한다. 지역의 나무를 가꾸는 자원봉사도 꾸준히 해왔다. 부부들끼리 협동조합을 만들면 단단하게 잘 운영될 것으로 생각해 입학했는데 자신들을 포함해 동기 57명 가운데 부부는 단 두쌍이어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남편 김씨는 “인생학교는 부부끼리 다니기 정말 좋다”고 부부 입학을 권했다. 부부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한다는 동기들의 시샘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자연을 즐기는 일들은 과연 소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인생 2막의 일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을까? 50플러스 인생학교는 입학생 대상으로 무료 상담을 해준다. 박정하 50플러스 컨설턴트는 “정년퇴직을 했거나 앞둔 50대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건 일”이라고 말했다. 재산이 많고 적음과 상관이 없고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한 일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봉사를 위해 찾는 사람도 있다. 그는 경험적으로 그 비율이 반반 정도라고 말했다.
인생학교를 취재하기 전인 지난달 27일 중부캠퍼스 상담센터에서 개인적으로 인생 설계 상담을 받아봤다. 몇년 뒤면 닥쳐올 50이 되면 어떻게 슬기롭게 준비할 수 있을지가 개인적으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상담센터는 일·재정·가족관계 등을 상담해 개인별로 필요한 교육 프로그램을 알려주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한 자원봉사 프로그램까지 연결해준다. 급여를 받을 수 있는 보람 일자리도 소개한다.
2시간가량 상담을 받았는데 역시 일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기자 경험을 토대로 또는 새로운 일을 배워 제2, 제3의 커리어를 가질 것을 권했다. 100살 시대에는 한 가지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여러 커리어를 갖는 ‘슬래시 커리어’가 필요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한번의 상담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졌다.
50플러스들이 가장 고민하는 건 ‘일’
드림가드닝 커뮤니티 멤버들도 입학 당시 일을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4일 중부캠퍼스 입학식에서도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입학생 가운데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드림가드닝 멤버들은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로서 정원사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실무 경험이 필수적인데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몇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들이 5월 개장할 서울역고가공원의 자원봉사에 우선 나서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물론 자원봉사는 돈이 되지 않는다. 실제 멤버 가운데 올해 초 금융기관에 일자리를 찾아 재취업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수익 창출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박 대표는 “솔직히 아직 우리가 어디와 용역계약할 단계는 아니다”라며 “50대 초반들은 수익에 조급함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커뮤니티 멤버들은 자식들이 독립한 60대쯤이어서 다소 느긋하다”고 말했다. 이강호씨는 “인생학교 오기 전부터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을 염두에 뒀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기업을 하려면 가장 필요한 게 자본이겠지만 협동조합은 그 일을 좋아하고 봉사하는 마음이 더 중요한데 이를 인생학교에서 한걸음 한걸음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노년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오래된 미래’다. 하지만 아무 준비 없이 폭풍이 몰아친 뒤에야 우산을 찾는다. 커뮤니티 드림가드닝 멤버들은 짧게는 4~5년, 길게는 30년을 보고 있다. 50대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한철 꽃이 아니라 늘 푸른 숲을 키우려는 그들은 머리가 흰 청년들이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염리동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인생학교 1기 입학식 모습. 아직 낯설지만 커뮤니티를 만들면서 서로서로가 인생 2막을 함께 준비할 동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미지메이커스 제공
지난 4일 중부캠퍼스 인생학교 1기 수업에서 대안학교인 이우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정광필 중부캠퍼스 학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는 교육당하지 말고 뭔가를 해라. 50대까지 가져온 ‘범생이’ 틀을 깨라. 너무 매끄럽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맘껏 실수해라”라고 당부했다. 이미지메이커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