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해프닝으로 조기 진화될 수 있었을 거예요. 게임회사가 남성 이용자들의 반발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않았더라면요.” (김환민 게임개발자연대 대표)
게임업계에 불어닥친 ‘메갈 사냥’의 직접적 책임은 결국 게임회사에 있다는 지적이다.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라는 ‘약한 고리’를 잘라내는 쉬운 길을 택하면서 당장의 논란을 잠재우는 데만 급급했다는 것이다. “주 소비자인 남성 이용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메갈’ 작가를 계속 쓸 수는 없다”는 회사의 주장은 ‘변명’에 가깝다.
■ ‘남초 시장’이라 어쩔 수 없다고?
‘메갈 사냥’을 정당화하는 논리 가운데 하나는 게임업계가 ‘남초 시장’이라는 것이다. “남성 상대로 장사하면서 남성이 싫어하는 ‘메갈’ 작가를 쓸 수 있냐”는 노골적인 불만이다. ‘메갈 사냥’이 미소녀 일러스트를 내세운 이른바 ‘남성향 게임’을 시작으로 게임업계 전체로 번져나갔다는 점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통계는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7년 게임백서’를 보면, 전 세계 여성 게임 이용자는 전체 게임 이용자의 약 44%에 달한다. 한국 시장에 한정해 게임 이용률을 알아본 ‘2017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도 비슷하다. 보고서를 보면, 남성 게임 이용률은 75%, 여성은 65.5%로 남성이 높긴 하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다. 모바일 게임만 따지자면 여성은 60.3%, 남성은 59.3%로 오히려 여성 이용률이 더 높다.
게임업계가 ‘남초 시장’이라는 착시 현상이 생기는 건, 여성 이용자들이 ‘있지만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임백서’는 “최근 들어 온라인 롤플레잉게임(RPG), 1인칭 슈팅 게임 등 전통적으로 남성 선호 장르의 게임에 여성 이용자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면서도 “이용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성별 장벽이 남아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여성 이용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게임을 하길 꺼린다. 특정 게임 이용자가 여성인 사실이 밝혀지면 실력에 대한 비하, 근거 없는 비난, 성희롱 등이 발생해 여성 이용자들은 자신의 선호도와 상관없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싱글 플레이 게임을 하거나, 자신이 여성인 사실을 숨긴 채 게임을 이용하는 경우가 다수다. 이런 상황임에도 게임 이용자가 성별을 밝히지 않으면 무조건 남성으로 간주하면서 게임 커뮤니티는 물론 게임업계 전체에서 남성 ‘과대표’ 현상이 발생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년 정도 게임 <오버워치>를 해온 여성 이용자 문아무개(20)씨는 남성들의 노골적인 여성 혐오를 직접 경험했다.
“처음 <오버워치>를 할 때 (팀 대항) 경쟁전을 했어요. 팀원들끼리 명령을 하면서 게임을 진행하는데, 게임을 소개해 준 여성 친구가 ‘보이스채팅으로 여성인 거 티 내면 안 된다. 듣기만 하고 말은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여성인데 목소리를 내서 명령을 내리면 남성들이 ‘여자도 게임하네?’라고 하고, 무조건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친구의 걱정은 곧 현실이 됐다. “한 번은 같은 팀에 다른 여성분이 무슨 말을 하니까 남성 팀원이 ‘너 여자냐?’라고 물어서, 그 여성이 ‘여자 맞는데’라고 하니까 그 남성이 대뜸
‘너 강간해버린다’라고 해요, 게임하는데. 저도 놀라고 다른 팀원들도 ‘너 뭐하냐’라고 했는데, 그 남성이
‘여자가 뭐 게임을 하냐, 밟아 버려야지’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남성이랑 그룹을 맺고 있는 팀원들도
‘여자는 게임 못하잖아’ 이런 식으로 차별을 하더군요.” 이 때문에 문씨는 인벤 같은 게임 웹진 커뮤니티에서도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를 중성적 문체로 글을 쓴다고 했다.
페미니스트 게임 이용자 모임 <페이머즈>가 운영하는 ‘계임계 내 여성혐오 고발 계정’에는 여성 게임 이용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희롱 사례들이 잇따라 올라온다.
문제는 이렇게 과대표된 남성들을 게임회사가 주 소비자로 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페미니스트 게임이용자 모임 <페이머즈>는 “여성 이용자가 돈을 많이 쓰고 적게 쓰고의 문제도 아니다. 여성 이용자는 일단 배제하고 보는 게임회사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게임을 팔아주는 사람들을 10~30대 초반 남성으로 한정해서 생각하는 탓에 ‘메갈’ 의혹 작가를 자르는 것만이 게임을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작가에 대한 ‘메갈’ 의혹이 불거지자 “직원의 행동이 불법이 아닌 이상 회사 밖 개인의 행동과 사생활에 대해 책임을 물을 권한은 없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던 게임 <마녀의 샘 3>. 사진 키위웍스 제공
정말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일까. 모바일 게임 <마녀의 샘 3>은 다른 길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올해 3월 ‘메갈 사냥’ 광풍 속에 <마녀의 샘 3> 일러스트 작가도 표적이 됐다. 앞서 표적이 된 동료 작가를 지지하는 글을 트위터에 썼다는 이유에서다.
논란이 불거지자 <마녀의 샘 3> 제작사 키위웍스 장수영 대표는 게임 공식 카페에 글을 올려 “직원의 행동이 불법이 아닌 이상 회사 밖 개인의 행동과 사생활에 대해 책임을 물을 권한은 없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특히 장 대표는 “일러스트는 제작자의 기획, 세계관, 스토리는 물론 참여한 사람들 모두의 열정이 담긴 게임의 일부”라며 작가의 사상과 일러스트는 별개임을 강조했다.
게임업계가 우려하는 매출 하락은 없었다. 오히려 구글플레이와 애플 앱스토어에서 <마녀의 샘 3> 순위가 급격히 상승해 한때 앱스토어 유료 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 ‘메갈’ 의혹 작가 일러스트를 재빨리 내린 게임 <소울워커>는 이후 ‘역주행(초반엔 순위가 낮다가 갈수록 순위가 올라가는 현상을 일컫는 말) 게임’으로 알려졌지만, 유의미한 동시접속자 수 증가 등 구체적인 수치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작가 박지은씨는 “(역주행했다는 건) 자기최면 수준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 게임회사가 ‘메갈 사냥’ 견인…“악플러와 영혼의 쌍둥이”
<소울워커>는 ‘메갈 손절(손절매) 마케팅’으로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3월27일 <소울워커> 공식 페이스북에는 ‘노 젓느라 신났다’는 글과 함께 한 직원이 춤을 추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메갈’ 의혹 작가 일러스트를 내리고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소울워커>는 신규/복귀 이용자를 대상으로 게임 아이템을 지급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법의 사각지대를 노린 프리랜서 노동자에 대한 노동권, 인권 침해라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진행한 행사였다. 여성 혐오를 바탕으로 여성 노동자를 부당하게 축출해놓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흥행만 노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겨레>는 <소울워커> 배급사 스마일게이트에 당시 상황을 묻고자 취재 요청을 했지만 스마일게이트는 응하지 않았다.
지난 3월27일 게임 <소울워커> 공식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
선제적인 ‘사상 전향’을 요구한 회사도 있다. 중국에서 개발한 게임 <벽람항로>의 한국 배급사 엑스디글로벌(X.D Global)은 지난 4월 ‘메갈’ 의혹을 받는 작가에게
‘나는 메갈리아와 관련이 없고,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식적으로 써달라고 요구했다. 작가는 이 요구를 거절했고 <벽람항로>에서 사용되던 작가의 일러스트는 바로 삭제됐다. 이후 작가는 입장문을 내고 “지금이라도 회사에서 요구한 입장을 SNS에 쓴다면 일러스트를 다시 사용해주겠다고 한다”고 폭로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엑스디글로벌에 취재 문의를 했지만, 역시 답이 오지 않았다.
등 떠밀린 모양새가 아니라 게임회사들이 직접 ‘메갈 사냥’을 견인하는 것을 두고 작가 박지은씨는 “게임회사와 (‘메갈’ 의혹 작가를 비난하는) 악플러는 영혼의 쌍둥이 같은 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김수아 강의교수(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도 “게임 개발자 역시 게임 문화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으면서 자랐다”며 “소비자가 원해서가 아니라 소비자랑 똑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게임회사들이) 더욱 앞서서 칼을 휘두른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피해 작가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인 ㄷ씨는 “게임 커뮤니티 자체에 여성혐오가 깊게 뿌리 박혀 있는데 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게임을 개발하는 곳이 바로 한국 게임회사”라며 “두 곳의 가치관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메갈’ 의혹 작가에 대한 공격이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작가는 “젊은 업계라고 해서 안 그럴 것 같지만 게임업계 내에 반페미니즘 정서가 굉장히 심하다”고 말했다. 그는 “절반에 가까운 여성 이용자 비율이 무색하게 게임을 만드는 사람은 대다수가 남자다. 남녀 모두 즐기는 게임을 만든다고 해놓고 유독 여자 캐릭터만 벗긴다든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털어놨다.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들은 ‘이중고’에 처한다. “작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게임회사에서 원하지 않으면 발주서대로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 프리랜서”지만 게임 속 성차별, 성 상품화에 일조한 것 아니냐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한다. 사진은 페미니스트 게임 이용자 모임 <페이머즈>가 운영하는 ‘계임계 내 여성혐오 고발 계정’에 올라온 게임 장면과 광고들이다.
이 와중에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들은 ‘이중고’에 처한다. 피해 작가 가운데 한 명인 ㄴ씨는 “여성 캐릭터를 ‘더 야하게 그려달라’는 게임회사의 요청은 일상이다. 가슴 크기나 각도까지 요구하는데 회사 쪽에서 너무 당연하게 말해서 수치심을 느낀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회사와 작업할 때 한국에서 그리던 대로 그렸더니 ‘치마가 너무 짧다’며 가려달라고 했다”는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작가 박지은씨도 “게임 속 여성 캐릭터가 하녀복을 입었는데 이용자들이 항의했다. ‘왜 가슴이 안 파였냐’는 거다. ‘여성 캐릭터의 방어력은 노출도와 비례한다’는 말도 있다. 예컨대 여성 캐릭터는 갑옷도 비키니”라며 게임업계에 만연한 성차별적 문화를 비판했다.
남성 중심적 시선을 가진 게임업계의 일상적인 노출 요구에 시달리는 작가들은 동시에 일부 여성들로부터 ‘게임 속 성차별, 성 상품화에 일조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이 비난의 논리를 고스란히 가지고 와서 ‘여성을 상품화하는 그림을 그려놓고 페미니즘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들에 대한 ‘메갈 사냥’을 정당화하는 비난까지 더해진다. 이에 대해 ㄷ씨는 “작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게임회사에서 원하지 않으면 발주서대로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 프리랜서”라며 “비난의 화살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업계도, 소비자들도 자정하고 있지 않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 “우린 책임 없다” “사상 검증은 아니지만…”
게임회사 책임론이 커지고 있지만 이들이 내놓은 해명은 마뜩잖다. “외주를 포함한 모든 직원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면서도 여전히 “이용자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는 것을 막고자 일러스트를 교체했다”는 식이다.
게임 <클로저스>, <트리오브세이비어> 등의 배급사인 넥슨은 “우리는 배급만 할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게임 <트리오브세이비어> 개발사 IMC게임즈 김학규 대표는 지난 3월 ‘메갈’ 의혹 작가를 면담하고 그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해 최근 노동청으로부터 ‘재발 방지 권고’ 조처를 받았다. 2016년에는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 인증 사진을 올린 성우 김자연씨가 게임 <클로저스>에서 갑자기 하차하면서 큰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화평론가 성상민씨는 “냉정하게 말해 게임 개발사가 가질 수 있는 실권은 많지 않다. 게임 배급사가 갑이라면, 개발사는 을,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는 최소 정부터 병까지 간다”고 꼬집었다. “2018년 ‘메갈 사냥’은 2년 전 넥슨이 길을 닦았기 때문”(작가 박지은씨)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넥슨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어떤 가치와 권리도 ‘소비자 요구’ 앞에서 멈추는 게임업계 현실을 두고 성상민씨는 한국 게임업계의 특수성을 지적했다. 성씨는 “게임회사들은 게임을 파는 게 아니라 게임을 하면서 ‘캐시 결제’를 하게끔 한다. 온라인 게임이 특히 그런데, 한국만큼 온라인 게임 비율이 높은 시장이 없다. 여기에 이른바 ‘헤비 유저’(유료 결제 비율이 높은 이용자)를 양산하는 확률형 아이템에 대판 비판도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씨는 “남성 이용자들도 확률형 아이템을 싫어한다”며 “게임회사가 이들의 ‘메갈’ 주장에 동조하면서 지지 기반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년 전 성우 김자연씨 지지 발언을 했다가 모든 중계방송에서 하차한 전 게임방송 캐스터 김경우씨는 “‘메갈’이라는 이름의 ‘후미에’를 밟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게임업계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로도 조금씩 퍼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후미에는 17세기 일본 막부 정권이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으로, 마리아상이나 십자가를 새긴 동판을 밟으라고 한 뒤 이를 밟지 못한 사람들은 기독교인으로 간주해 처형한 일을 말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게임업계가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재고하고 스스로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이유다. 업계 내부에서도 “이익만 추구하다 보니 창의성은 없고 성적인 요소만 앞세운다”, “노출하고 확률형 아이템밖에 없다”, “저투자 고수익만 노린다”는 비판이 나온다. 성상민씨는 “과대표된 남성 이용자들의 의견만 따르다 보면 게임업계는 결국 사회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며 “페미니즘이든 노동권 문제든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혐오에 쫓겨나는 여성들]
1회 “메갈 잘라라” 한마디에…게임업계 밥줄이 끊어졌다 2회 ‘소비자 운동’에 숨은 여성혐오…‘메갈 사냥꾼’은 누구?
이유진 박다해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