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 | 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차기 정부의 미디어 정책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콘텐츠 강국을 목표로 하는 산업적 진흥이 한 축이라면 공영방송 개편이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미디어 산업의 진흥과 규제가 따로 구분되는 일도 아니고 공영방송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지금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공적 책무는 공영방송만 담당하는 것인지 논의의 여지가 많지만 일단 공영방송 개편 방안에 집중해 몇가지 제안해보려고 한다. 마침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공영방송을 개편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한 세미나와 주장들도 계속되고 있다.
일련의 논의에서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공영방송의 공적 책무와 공공성을 철 지난 이념 정도로 취급하는 발언이 나온다는 점이다. 공공성은 철 지난 유행가가 아니라 공유지의 비극을 막는 최소한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 일이다. 반드시 기억하고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또한 ‘진짜 공영방송을 만들겠다’는 차기 정부의 공정성 강화 방안이 인적 청산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는 사실도 우려스럽다. 그것은 공영방송이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정치적 후견주의의 불행한 굴레를 반복하는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중립성과 자율성, 신뢰를 확보하는 길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거버넌스 장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나 강조하고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고 싶어 하는 정치권력의 강한 유혹과 일부지만 거기에 기꺼이 몸을 싣는 공영방송 내부의 협력 구조 탓에 그동안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공정과 상식을 내세운 새 정부에서는 그 어려운 일을 시작해 완성해주기 바란다.
공영방송의 공공성 강화 방안에서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공영방송의 역할과 공적 책무가 서울과 지역에서 다르게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공영방송의 사회적 책무에 관한 정책과 제도의 틀을 짤 때 전국과 지역을 따로 또 같이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역 미디어 생태계는 자원과 에너지가 풍부한 서울의 미디어 생태계와 다르게 작동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공영방송의 공적 책임을 설명할 때 시장성이 없음에도 반드시 필요한 집밥과 같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지역에서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뉴스와 정보가 넘쳐나는 미디어 홍수 시대지만 지역에서는 양질의 정보는 물론 지역 정보 자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꼭 필요한 정보가 지역사회 전체에 유통되고 도달하는지를 고려하면 지역에는 더더욱 빈 공간이 많다. 따라서 지역에서 공영방송의 사회적 책무를 부과하는 정책 방안은 집밥과 같은 콘텐츠를 생산하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생산된 콘텐츠가 지역사회 전역에 빠짐없이 확산될 수 있도록 유통 과정까지 포괄하는 사회적 책무를 구상해야 한다. 지역 지상파에 디지털 플랫폼을 관장하는 조직이 상설화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같다.
공영방송 개편을 주제로 한 최근의 논의들에서 공영방송의 사회적 책무를 비롯해 로컬리즘에 대한 고려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너무 아쉽다. 지역성은 다양성에 포함된 항목이라고 퉁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서 공영방송의 사회적 책무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로컬리즘을 다양성의 하부 항목으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향후 꾸려질 공영미디어위원회(가칭)에 지역의 미디어 생태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잘 아는 전문가가 포함되는 것에서 시작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