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언론노동조합 와이티엔지부가 15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와이티엔>(YTN) 지분매각 추진을 비판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와이티엔지부 제공
한껏 부풀어 오른 꽃망울을 보다가 좋아하는 선배의 오래전 말이 떠올랐다. 나이 들면 포용력이 커지고 관대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막상 노여움만 많아진다는 토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옹졸함까지 더해져 완고하고 괴팍한 노인네가 돼가는 게 두렵다며 ‘듣는 능력’이 절실하다는 고백이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푸코가 말년에 천착했다는, 말하는 용기에 관한 책(<담론과 진실: 파레시아>)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온 말이었다. 같이 책 읽는 묘미가 그런 것이겠지만 우리는 그 책에서 ‘말하는 용기’보다 ‘듣는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훨씬 더 깊게 했다. 미디어 전공자들로 구성된 모임이라 언론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가 풍부하게 나왔지만 경청하는 자세와 ‘듣는 용기’에 대한 생각도 못지않게 많이 나누었다.
흔히 파레시아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진실을 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로 알려져 있다. 말하는 이의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리키기 때문에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저널리즘 실천 덕목이나 언론인의 태도를 비유하는 것으로 사용되곤 한다.
푸코가 주목한 파레시아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다. 즉 ‘말하는 용기’는 결코 ‘듣는 역량’과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다. 게임이 성사되려면 말하는 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로 인해 위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주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능력’이다. 군주는 파레시아를 가진 타인을 자신의 영혼과 능력을 배양하는 자로 인정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말하는 이가 어떤 말을 하든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파레시아는 말하는 자의 ‘용기’와 듣는 이의 ‘능력’이 결부됐을 때만 게임이 성사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부터 따지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넘었다. 그간 언론계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김만배 기자와 돈거래’라는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언론계 내부가 풀어가야 할 숙제라면, 권력자에게도 무거운 과제가 꽤 많이 던져졌다. 그간 윤석열 정부에선 출근길 문답이라는 신선한 시도도 있었지만 전용기 탑승 배제, 신년 기자회견 대신 특정 언론사와만 진행한 인터뷰, 아래로부터 소통한 결과라고 보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한국방송>(KBS) 수신료 징수 방법 변경 논의, <와이티엔>(YTN) 민영화 이슈 등이 잇따라 전개됐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언론과 취재의 자유를 위축시킬 만한 고소·고발 사건의 지속이었다.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자료와 반박자료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론사가 아니라 해당 기자를 직접 고소하는 행위는 언론인의 자기검열과 취재의 자유 제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한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이후 언론자유가 후퇴했다는 목소리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증가했다. 언론계 원로들도 최근 ‘끔찍한 과거로 돌아가는 언론자유’를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쓴소리를 노여움 없이 들을 줄 알고 나와 다른 주장을 포용해 타협하는 과정, 그것은 능력이다. 개인도 그렇지만 위정자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한선 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