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태까지 30년 가까이 사회를 보면서도 선동꾼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어요. 단언컨대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광장에 나온 그들의 마음이었고, 그들의 분노였어요.” ‘거리의 사회자’란 별명을 가진 최광기 토크컨설팅 대표가 지난 8월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한 인터뷰에서 전문 사회자로서의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국민 사회자’ ‘거리의 사회자’ ‘인권 전문 사회자’ ‘약자 전문 스피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와 2008년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 사회자로 유명한 최광기(52)씨의 별명들이다.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때는 본무대에 한번도 서지 않았지만, 앞선 두번의 강렬한 기억 때문에 그는 여전히 대표적인 ‘촛불집회 사회자’로 기억된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쉽고 간명한 말로 광장에 모인 수십만명을 그야말로 들었다 놨다 했다. 그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박근혜 정부 내내 방송 진행 등 공적인 공간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약자들의 무대에서 끊임없이 마이크를 잡아왔다. 최근에는 <목소리의 힘으로 꽃은 핀다>라는 책을 냈다. 최광기 토크컨설팅 대표(호칭 생략)를 지난 8월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코로나 때문에 정말 모든 게 다 멈춤이죠. 그동안 바쁘게 지내와서였는지 코로나 초기 한달 정도는 달콤한 선물 같은 휴가였는데 그다음 달부터는 슬슬 몸이 근질거리고, 마음도 좀 우울해지더라고요. 강연이든 사회든 이런 건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 일인데 그게 다 멈추니까 아쉬움도 많고 무기력해지더라고요. 이러다가 잊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냥 유쾌하게 지내려고 해요. 그사이에 책 내고, 2년 전에 찍었던 영화(<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도 개봉이 됐어요. 조진웅씨가 나오는 장면에 단역으로 나왔는데 나름 신스틸러였다고 할까요. 하하.”
‘거리의 사회자’ 최광기씨가 8월31일 오후 서울 마포구 효창공원 둘레를 걷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이번이 두번째 책인데 모두 베스트셀러 맞죠?(웃음)
“이거 두권 다 모아도 어떤 분의 한권보다 못해요. 하하. 첫번째(<밥이 되는 말, 희망이 되는 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생각에서 썼어요. 저 역시도 많은 사람들에게 목소리로 기억되는 사람인데 이제 도태되는 시기에 살고 있거든요. 어떤 의미냐면, 제가 눈도 심각하게 안 좋은 상태라서 점점 제 시야에서 세상이 멀어지고 있어요. 게다가 나이로 봐도 중년이 넘은 여성이 설 수 있는 자리나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예전처럼 제가 광장에 설 일도 없잖아요. 그렇게 자꾸 뭔가 물러서야 하는 처지인 셈이죠. 그래서 어렵고 약한 사람들에게 그런 나도 이제 다시 시작하는데 당신들은 당신의 삶에서 어떤 것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지,
누군가의 인생에 힘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무엇을 만들기 위해서 지금 씨앗을 품고 있는지 등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희망을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눈이 안 보여도 이렇게도 책을 낼 수 있고, 의지를 가지면 지금까지도 꿋꿋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책이라고 할까요.”
최광기는 스물아홉살 나던 1997년에 오른쪽 눈이 녹내장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 뒤 상태가 나빠져 지금은 거의 실명 상태다. 왼쪽 눈도 시력이 떨어져 이번 책은
구술로 집필했다.
―책은 잘 나가고 있어요?
“잘 나갈 수가 없어요. 하하. 지금 여러가지로 사람들이 우울하잖아요. 거리와 광장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제 삶의 굉장히 큰 이력 중의 하나가 요즘은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특히 (보수단체의) 8·15 광복절 집회 이후에 사람들에게 집회 자체에 대한 혐오가 생기는 것 같아요. 원래 광장의 힘은 선한 의지가 모여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다수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에너지가 되죠. 그런데 그 기운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집회가 굉장히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지금 모인 사람들은 그전에 광장에 나왔던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지 그 절박함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잖아요. 이들로 인해 이제는 모이는 일 자체가 혐오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좀 많이 안타까워요.”
―어떤 면에서요?
“뭐랄까, 좋은
쪽으로의 학습이 아니라 ‘이상한 학습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촛불집회라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국민들의 의지와 분노, 열망 이런 걸 모아나갔잖아요. 그것으로 정권을 바꾸기도 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도 했는데, 이분들은 사회 발전에 대한 고민은 없이 모이는 것 자체가 힘이 된다는 생각만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민주주의를 거꾸로 이용하는 건데 저런 모습은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지금의 광화문 집회와 그걸 주도하는 사람들이 유튜브 방송으로 하는 행태 등을 보면 자기들의 민낯을
드러내준 측면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반면교사가 되는 것도 같아요. 우리가 이 시간을 잘 이겨내면 진실과 정의로움에 한걸음 더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와 별개로 저는 우리의 집회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광장에 있으면서 많은 분들을 봐왔고 그 흐름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이제는 광장에 나오는 이들의 욕구와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가야지, 과거에 우리가 했던 방식과 내용, 틀에 박힌 것들은 진짜로 걷어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은 토크쇼 같은 작은 행사나 라디오 진행을 하고 싶어요.” ‘거리의 사회자’ 최광기씨가 지난 8월31일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최광기는 1990년 초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집회에서 사회를 봤다. 두번의 출산일에 임박해서도 무대에 섰으며, 12시간 밤샘 사회(2000년, 금융노동자 총파업 결의대회)를 보기도 했다. 또 양심수의 밤 행사(2002년) 때는 낮은 시력 때문에 무대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는데도 끝까지 행사를 진행했다.
―광장과 집회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얘기인가요?
“네. 얼마 전에 거의 10년 만에 검찰개혁과 관련된 국회 앞 촛불집회 사회를 한번 본 적이 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2008년도에 혼자 조용히 은퇴를 선언하고 내려왔었어요. 그때 변화된 상황에 맞게 시민들의 자발성이나 자율성을 수용해서 다른 방식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과거에 했던 방식을 고집하는 게 안 맞더라고요. 그때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부모들이 더 이상 나올 수 없도록 정치화된 것 등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불편했었어요.
사회자로서의 저를 마치 광장의 선동꾼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있지만, 저는 여태까지 30년 가까이 사회를 보면서도 선동꾼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어요. 단언컨대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광장에 나온 그들의 마음이었고, 그들의 분노였어요. 그들의 그런 생각을 대신 전하는 전달자였고 스피커였지, 그걸 만들어 선동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살았거든요. 근데 이게 자칫 잘못하다가는 선동이 되고 정치적인 이슈가 되고 쟁점이 돼요. 물론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 문화적인 문제이기도 한 등 굉장히 많은 여러가지가 광장 안에 녹아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일상의 민주주의가 구현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정치로 묶이는 순간 비틀어지는 거거든요. 그때 저는 그런 걸 경험하면서 이제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 혼자 많이 울면서 광장의 사회를 그만둬야겠다, 이제 안 가겠다고 결심했었죠.”
―그랬군요.
“실제로 그 뒤에 거의 안 섰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제 제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죠. 그 후에 방송에 나오거나 하면 개인적으로 돈을 벌러 다니나 보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2004년 촛불집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제 이름을 알려준 계기가 되는 등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이었지만, 그게 저한테는 굉장히 큰 낙인 같은 것이기도 했어요. 제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모습을 다 보여드릴 수가 없었어요. 제가 이렇게 조용조용히 이야기하고, 작은 모임의 사회도 보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그런 건 원치 않고 언제나 저한테는 광장에서 사회 보는 것만 원했죠. 광장의 사회자는 제가 갖고 있는 제 일상의 한 부분이지 전부는 아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가 다양성이에요. 제 안에 있는 다양한 저를 찾고 싶은 게 제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고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이 다양성이 물 흐르듯이 넘치면서 서로 존중하고 평화가 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는 게 제가 바라는 거예요.” 그는 이번 책에서도 마음의 벽을 얘기했다. 어릴 때 책가방으로 몇대 맞은 뒤 오랫동안 미워했던 아버지, 대외 행사 진행을 하는 자신을 불편해했던 시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두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토로했다. “못을 박는 일은 못과 망치만 있어서는 할 수 없습니다. 못을 박을 ‘벽’이 있어야 하지요. 마음에 박혔다고 생각했던 못들, 그 못이 박힌 벽은 사실 내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음의 벽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말캉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그분들을 받아들였다면 던져진 말들은 넓은 호수에 던진 작은 조약돌처럼
풍덩 빠지고 말았을 뿐일 겁니다.”
―마음이 말랑말랑하다면 설령 누군가 그 마음에 못을 박더라도 무슨 큰 상처가 되겠느냐는 말이 눈에 띄던데요.
“사람들이 자기를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방어벽이라고 하는 벽을 자기 안에 자꾸 만들죠. 그러다 보면 자기도 그 안에 갇히고 자기가 숨 쉴 수 있는 곳, 자기가 살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요. 저도 그걸 깨닫기까지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항상 네 탓이었고, 너 때문이었고, 당신 때문이었다고 했죠. 요즘은 제가 살면서 유연해지려고 하는 게 느껴져요. 제가 제 안에 갇혀서 누군가를 그동안 함부로 재단하고 그러지는 않았을까라고 되돌아보기도 하고요.”
―좋은 말인데, 개인의 마음 수양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결국에는 마음먹기에
따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갖고 있는 제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를 살피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음 수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가 말을 가르칠 때 늘 그러거든요. 말은 기술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는 거라고. 자신의 지금 마음과 감정 상태, 자신의 생각 이런 것들을 돌아볼 때 말이 잘 표현되어 나올 수 있다고 이야기하죠. 일상에서 끊임없는 유혹과 도전이 있을 때 그걸 잘 견뎌낼 수 있는 단단한 자기만의 힘은 결국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 마음을 잘 살펴서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해내는 것이라고 봐요.”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광기는 다섯살 때까지도 말을 잘 못할 정도로 말문이 늦게 트였다. 초등학교 때는 부당한 일을 당해도 말을 못 하고 울기만 하는 소심한 아이였다. 초등 5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가서 담임선생님 흉내를 낸 게 끼의 첫 발현이었다. 그 친구의 추천으로 수업시간에 앞에 나가 선생님 흉내 내기를 했다. “그날부터 학교가 뒤집어지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등굣길이 달라지고, 반장이 됐다.” 중·고교 때는 소풍 등 모든 행사 진행을 도맡았다. 1988년 대학(덕성여대 사회학과)에 들어가서는 시대 분위기에 따라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지만, 방송국 엠시(MC)가 되는 게 여전한 꿈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친한 학교 선배에게 점심을 얻어 먹으러 서울 상계동에 갔다가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선배의 부탁으로 야학 교사를 6개월만 하기로 했으나, 그는 2000년까지 10년을 상계동 어머니학교에서 보냈다.
―6개월 뒤에 못 떠난 것은 왜였어요?
“그때 저희 엄마는 제가 그런 일 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시고, 취직을 하길 바랐어요. 저도 당시 방송국 엠시를 하고 싶었고요. 그랬는데 어느 한여름에 화장실에서 딱 느낌이 왔어요. 당시 화장실이 ‘푸세식’으로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그런 곳이었는데 앞으로 어쩌면 내가 살아갈 인생도 이럴지 모르는데 내가 여기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사라지지 않는 한 여기에서 사는 사람을 버리고 간다는 게 비겁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나이 많은 분들이 저한테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쫓아다니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겠더라고요. 그렇게 남았지만, 정말 학교를 운영해나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매일 일일 찻집과 주점을 열어서 운영비를 벌어야 했어요. 일이 힘든 것도 힘든 거였지만 너무 외로웠었어요. 힘들어도 어디 기댈 데도 없고 해서, 나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한명만 보내주세요 하고 맘속으로 기도했어요. 그 무렵에는 다들 노동운동을 하러 갔지, 지역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어요. 제가 지금 자기 마음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지독한 외로움의 경험도 있고,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때 얼마나 힘든지를 알아서 그래요.”
어머니학교의 자원봉사자 최광기는 곧 정식 실무자와 사무국장을 거쳐 교장이 됐다. “아무도 없으니 자동 승진했다.” 말이 교장이지 어머니들에게 한글과 영어 등 필요한 과목을 모두 가르치는 선생이자 때로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재롱을 피워야 하는 엔터테이너 등 멀티플레이어였다. 삶의 경험이 풍부한 어머니들과 울고 웃으면서 대중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자연스레 성장했다. 최광기의 첫 공식 무대는 서울과 경기의 지역 공부방 사람들이 모인 도시빈민문화제(1993년)였다. 사회자를 놓고 고민할 때 상계동 어머니들이 “재간둥이 우리 교장 선생님”을 추천했다. 그 뒤 그는 민주노총 창립 문화제(1995년) 등 크고 작은 집회의 진행자로 불려 다녔다.
―2004년 촛불집회 이전부터 인기가 대단했는데요.
“2000년대 들어와서는 거의 1년 스케줄이 꽉 차 있을 정도였어요. 거리의 아이돌이었죠. 하하. 그때는 집회 사회자라는 영역에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제가 솜씨가 좀 있거든요. 하하. 저는 집회가 무거울수록 가볍게 진행해요. 그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순간을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는 게 뭘까를 고민하죠. 서로 다 무거운 얘기만 하면 지루해지고, 보는 사람은 얼마나 더 지겹겠어요. 그런 집회는 대부분 대본도 없고, 출연자도 시간을 잘 안 지켜요. 비는 시간이 많은데 그럴 때 제가 좀 발랄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내서 활용하죠. 지금은 유명한 촛불 파도타기도 2004년 광화문 현장에서 제가 즉흥적으로 생각해냈던 거예요. 그러니 ‘최광기를 데려다 놓으면 집회는 걱정 안 해도 된다’가 됐죠.”
―제일 기억에 남는 행사는 뭐예요?
“10년 넘게 사회를 본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요. 그건 인권 콘서트였는데 세계 유일이었고 최장 기간 이어진 행사였어요. 그런 걸 계속 갖고 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아쉬워요. 촛불집회도 잊을 수가 없죠. 촛불을 드신 분들이야 자기 앞의 작은 촛불 하나만 보지만, 저는 사회자 특권으로 그 장엄한 광경을 보았거든요.”
―앞으로 계획은요?
“요즘은 젠더 토크 콘서트 등 작은 행사를 주로 하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라디오 진행을 하고 싶어요. 사람들은 되게 정치적인 사람으로 저를 생각하기 때문에 방송도 시사 프로그램 외에는 연락이 안 오는데 사실 제일 하고 싶은 건 <여성시대>(MBC)같이 사람 이야기를 하는 따뜻한 프로그램이에요. 다른 한가지 큰 꿈은 치유의 말하기 센터를 만들고 싶어요. 말이라는 게 어떤 면에서는 치유가 되거든요. 가슴속의 말을 뱉는 순간 문제가 좀 더 가벼워지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잖아요. 그러기까지 참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겪죠. 세월호 유가족 등 우리 사회에서 고통을 받는 많은 분들이 직접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마이크 하나로 수십만 군중을
들었다 놨다 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인터뷰 내내 그는 조곤조곤 말했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의 개별성에 주목하고, 그들 각자의 마음을 읽어내려 애쓰는 최광기의 본모습을 살짝 엿보는 듯했다. 그를 다시 광장에서 볼 수 있을까. “비문 뭘로 쓸 거냐고 누가 묻길래 ‘쉿, 깰라!’라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내가 깨서 또 떠들면 시끄러워지니까 조용히 하자는 거죠. 하하. 저야 남은 생애 동안 토크쇼 같은 작은 행사나 라디오 진행을 꿈꾸지만, 세상이 저를 또 필요로 하면 제가 안 나가겠어요? 나가서 돌아온 언니의 모습을 보여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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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기의 타임라인
상계 어머니학교: 대학 3학년 때부터 10년 동안 한글 교육 등 봉사활동을 했다.
2004년 촛불집회: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로 ‘국민 사회자’ 별명을 얻었다.
안티미스코리아대회: 월경페스티벌 등 여성운동 집회에서도 단골 사회를 맡았다.(오른쪽)
방송 진행: 교육방송(EBS) 라디오의 ‘사랑해요 코리아’ 등 방송 진행자로 활약했다.
시민운동: 2020년 ‘정의연 성찰과 비전위원회’ 기자회견에서 정의연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에 맞섰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