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정태춘은 노래꾼이자 평화운동가인 홍순관을 가리켜 “세상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그늘을 걷어내고자 노력했다”고 평했다. 지난달 26일 저녁 당산동의 한 카페에서 노래 부르는 홍순관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지난달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카페 무대에 섰던 모습 거의 그대로였다. 바지와 티셔츠, 신발, 안경테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검정인데다가 하나같이 튀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 수수했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깔인 군청색 점퍼마저 검은 색조 속에 녹아 있었다. 점퍼 말고는 당산동 공연 때 입었던 옷인 듯했다. 실제로 가수 홍순관(59)은 큰 공연이든 작은 공연이든 평소 옷차림 그대로 무대에 오른다. 무대 위의 화려한 모습과 무대 아래의 일상이 차이 나는 대개의 예술인과 다른 점이다.
무대에 선 지 35년째인 홍순관은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픔과 슬픔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하다. 삶의 현장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는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대신 아픈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주저앉은 이들의 무릎을 일으켜 세운다. 그를 두고 정태춘은 “홍순관은 오랫동안 세상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그늘을 걷어내고자 노력했다”고 표현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2년 만에 홍순관이 작은 무대에 선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달 26일 저녁 영등포구에 있는 ‘당산동 커피’를 찾았다. 대구와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40여명의 팬 앞에서 홍순관은 “가수가 노래 못 하는 상황은 정말 잔인합니다. 이렇게라도 만나게 돼 너무 고맙고 반갑습니다”라고 말했다. 기타 선율에 얹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따스한 화롯불처럼 코로나에 잔뜩 움츠린 겨울 밤공기를 은은하게 감쌌다. 홍순관이 내뿜는 온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 인터뷰를 청했다. 지난 7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있는 비영리단체인 ‘춤추는 평화’ 사무실 겸 개인 작업실과,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가수 홍순관이 지난 7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는데, 어떻게 지내세요?
“책 보고 글 쓰는 일에 몰두할 수 있어서 좋은 면도 있지만, 공연을 못 하니까 힘들죠. ‘연안환경미술행동’이 올 초부터 열고 있는 전국 순회 전시회에 붓글씨 몇 점을 냈는데 그만둘까 고민했어요. 환경보호 전시회인데 작품 이동과 설치, 숙박 등 비용을 작가들이 부담해요. 한 곳 전시에 최소 10여만원씩 드는데, 지금 저한테는 그것도 버겁거든요. 전시를 기획한 화가 홍성담 선생을 얼마 전 만났는데 막상 그만두겠다는 말을 못 했어요. ‘민중미술 시작할 때 으쌰으쌰 하던 사람들 가운데 유명해져서 배부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안 한다’는 그의 마음을 읽었거든요.”
―코로나로 공연 예술가들이 가장 타격이 심하지 않을까 싶어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여러 지원을 하지만, 저처럼 소규모로 노래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고 괴롭죠. 작은 공연만으로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하면서 음악을 할 수 있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평소에도 힘든데 코로나까지 겹쳤으니 더 말할 것도 없죠.”
1980년대 말에 음반 녹음을 두어 차례 했지만, 홍순관이 본격 활동에 나선 것은 1991년 <새의 날개> 음반을 내면서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된 1994년부터 그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알리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모금 공연인 ‘대지의 눈물’을 시작해 10년간 진행했다. 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도쿄(민간)국제법정(2000년)을 위한 한국 쪽 부담금 대부분이 그의 모금으로 충당됐다. 또 ‘대지의 눈물’ 사이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밥 굶는 아이들을 위한 ‘소년의 밥상’ 모금 공연도 1998년부터 5년간 별도로 진행했다. 2004년부터 이후 10년 동안은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모금인 ‘춤추는 평화’ 공연을 했다. 모금 전문 가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뿐 아니라 평택 대추리와 제주 강정마을, 용산 참사 현장, 세월호의 진도 팽목항, 촛불집회의 광화문광장, 필리핀 빈민촌, 베트남 민간인 학살 현장, 오키나와 미군기지 등 눈물이 있는 국내외 현장에서 노래했다.
2009년 용산 참사 현장의 스티로폼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홍순관. 홍순관 제공
―슬프거나 힘든 사람들이 있는 현장은 빠지지 않고 찾아다녔는데요.
“평화는 격전지에 있다고 생각해요. 아픔과 고통 속에서 평화를 찾아내야지요. 제가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그겁니다. 일본 가와사키의 한 교회에서 위안부 관련 공연을 할 때였어요. 공연이 끝나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분이 저를 잡고 말씀하는데 처음에는 한국말인지 일본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귀 기울여 들어보니 ‘젊은 사람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어?’였어요. 얼마나 위로가 됐으면 나를 안고 놔주질 않으실까, 여기서 노래하길 정말 잘했구나 싶더라고요. 내 노래가 위로가 된다면 어디든 가서 하겠다는 생각을 다졌죠.”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10대 때 교회를 정말 열심히 나갔어요. 노래가 좋고, 예수가 좋았거든요. 그분이 뭘 했던 분인가를 알고는 예수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예수가 만약 이 시대에 가수를 한다면 어디서 노래를 할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형 교회는 당연히 아닐 테고 따뜻한 곳도 아니죠. 아픈 곳, 억울한 곳, 외로운 곳 아니겠어요? 그러면 당연히 위안부 할머니나 용산 참사 현장이죠.”
―그런 현장은 노래 부르기에는 열악하지 않나요?
“대부분의 현장은 음향 시설도 없고, 주변도 시끄럽고 해서 가수들이 꺼리죠. 그러나 거기에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제가 가장 가슴 뭉클하게 감동을 한 곳은 2009년 용산 참사 현장입니다. 제가 갔더니 가수가 왔다고 스티로폼 넉장을 포개서 무대를 만들어줬어요. 그 무대야말로 제 인생 최고의 무대였어요. 철거에 항거하다가 여러 사람이 숨진 그 참혹한 현장에서도 가수라고 대접해준 거잖아요.”
2005년 뉴욕 링컨센터에서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공연에서 노래하고 있는 홍순관. 홍순관 제공
홍순관은 국내 가수들이 선 적이 없었던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2005년 단독 공연을 했다. 돈을 내고 대관할 수 있는 카네기 홀과 달리 링컨센터는 엄격한 기준으로 공연자를 선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 2009년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했다.
―자기 노래로 정식 무대에 선 것은 1986년이더군요.
“제가 부산대 예술대(조소과)를 다닐 때였어요. 학교 축제 때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행위예술을 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걸 본 무용과 교수가 먼저 제안했어요. ‘내가 춤을 출 테니 순관씨가 노래를 만들어 불러달라’고요. 그때 생애 첫 노래(‘전화’)를 만들어서 교수님과 당시 부산에서 가장 좋은 무대인 경성대 콘서트 홀에 섰지요. 기획 자체가 파격이었어요. 당시 무대미술도 제가 했어요. 무대미술이 우리나라에서는 정립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외국 책을 구해 배우면서 했죠. 그 뒤 10년 동안 현대무용의 주요 무대미술을 담당했어요.”
―미술이 전공이었는데 음악으로 바꾼 거였군요.
“노래 잘한다고 어릴 때부터 좀 알려졌죠. 초·중학교 때 부산의 여러 콩쿠르에 나가서 우승하고, 대학 때는 여러 학교 축제 때 불려 다녔어요. 그러나 저는 초등학교 4학년인 11살 때부터 화실에 다닌 뒤로는 미술가가 꿈이었어요. 고교 때 한 유명 가수의 매니저가 찾아와 가수를 하라고 권한 적도 있었지만 거절했어요. 미대생일 때 방학 때마다 서울의 주요 대학 미술과를 다 뒤지면서 얘네들은 뭐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다닐 정도로 미술 공부에 열심이었어요. 미술을 그만둔다는 것은, 제 성장 과정을 아는 사람들이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미술을 포기할 때 광안리 앞바다에서 꼬박 석달을 울었어요.”
―왜 미술을 포기했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었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니 혼자 남았는데, 형은 이미 프랑스로 미술 공부를 하러 떠난 상태였어요. 저도 이탈리아로 조각 공부를 하러 갈 계획이었는데 나마저 떠나는 게 맞냐는 고민이 왔어요. 또 하나는 졸업작품이 뽑혀서 부산의 신인 작가 전시회가 열렸는데, 아무도 제가 뭘 만든 건지 못 알아보는 데 대한 충격이었어요. 참인간을 잉태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는 신라 토우를 모티브로 한 것이었는데, 작업을 함께하는 가까운 작가들도 못 알아보더라고요. 민중미술이니 해방신학이니 이런 이론들이 많이 들어올 때여서 나름대로는 그런 정신을 반영해서 만든 조각인데, 아무도 못 알아보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는 우리말로 된 가사가 있으니 알아들을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죠. 내 뜻을 노래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메타포가 섞이고 은유적으로 하니까 또 못 알아듣는 거예요, 사람들이. 요즘엔 제 노래가 조금 어렵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웃음)”
홍순관이 고철로 만든 조각 작품. 홍순관 제공
조각칼과 그림 붓 대신에 마이크를 쥔 홍순관은 가요계로부터 본격적인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당시 국내 최대 음반회사인 킹레코드사를 비롯한 대형 음반사들이 그에게 대중가요 음반을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여러 차례 했다. 지금은 목회자로 활동하는 가수 장욱조도 가수가 되기를 권했고, ‘열애’ ‘이별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등 히트곡 제조기였던 작곡가 최종혁은 두 곡을 만들어 줬으나 그는 거절했다.
―가수로 뜰 기회를 왜 마다했어요?
“돌아보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죠. 욱조 형에게도 미안하지만, 최종혁 선생님께는 정말 죄송하죠. 지금 만나면 큰절로 사과하고 싶어요. 그러나 그때 저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요.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고등학생 때 어느 토요일 교회에서 사찰집사(교회를 유지·보수·관리하는 교회 직원)가 청소하는 것을 봤는데, 호칭도 없는 그의 부인은 설교하는 단상에서 걸레질하고 있었어요. 목사가 설교하는 단에는 당시에 여자들은 못 올라갔어요. 그 모습을 보고는 아, 여성은 청소할 때나 단상에 올라갈 수 있구나,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개혁하자고 결심했죠.”
―대학가요제 출전 제의도 거절했다고요?
“예선 거치지 말고 그냥 나가라고 했는데 안 나갔어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만든 ‘국풍 81’이니 뭐니 하는 것은 대학생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대학가요제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곳에 나가면 이름이 난다는 건 알았지만, 어금니 딱 깨물고 그런 건 안 한다고 결심했어요. 운동권 노래도 녹음하자는 걸 안 했어요. 저도 독재정권에 맞서 돌을 던지긴 했지만,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진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다, 나는 내 가사로 된 내 노래를 하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혁명도 어렵다, 그러니 사람 마음을 바꾸는 노래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 노래가 부드러워진 거죠. 저는 윤동주를 좋아하는데 그의 시가 무슨 혁명 시가 아닌데도 확 스며들잖아요. 제 취향도 그래요. 그러니까 저는 늘 제 색깔로 노래했어요.”
그러나 그에게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직도 팔리는 메들리 포크송 가수가 된 흑역사가 있다. 노래를 불러보라는 한 선배의 요청에 그는 나중에 음반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포크송 70곡을 노래했다. 박인수와 이동원이 부른 ‘향수’는 혼자서 두 사람 목소리로 불렀다. 그의 재능에 반한 킹레코드사의 킹박(박성배 사장)은 가스펠로만 채운 홍순관의 첫 앨범(<새의 날개>)을 기꺼이 만들어줬다.
덕분에 홍순관이 고집스레 추구한 음악 세계가 비로소 열렸다. 시처럼 아름다운 노랫말을, 높낮이도 거의 없고 절정도 없는 멜로디로 나지막이 부르는 그의 노래는 듣는 이의 영혼을 깨운다. 이어령의 표현대로 “숨과 음악이 하나가 된 노래” “마음을 돋구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히는 음악”이다. 1994년에 낸 국악가요 음반(<민들레 날고>)도 음악적 진보였다. 국악기에 없는 베이스를 보완하기 위해 쓰는 신시사이저를 사용하지 않고 국악기만으로 완성했다. 홍순관은 “나는 내 숨을”(
나는 내 숨을 쉰다) 쉬고,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는(
나처럼 사는 건) 길을 30여년간 꿋꿋하게 걸어왔다.
―곡조가 차분할 뿐 아니라 슬픔이 느껴지는 노래가 많은데요.
“독재 속에서 산 사람의 노래가 기쁠 수가 없잖아요. 기쁜 노래가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기쁘지 않으니까 옷도 화려한 옷을 입을 수가 없었고요. 독재보다 더 갑갑했던 건 천편일률이었어요. 똑같이 머리 짧게 깎고 까만 교복에 까만 모자를 쓰고 학교에 다녔으니까 정신이 옥죄였어요. 그것을 벗어나려고 외국에서 들어온 음악이 아니라 본보기 자체가 없는 우리 음악을 추구했죠. 그런데 뭐랄까 허공을 파는 느낌이었어요. 동굴을 파면 누군가 저쪽에서 파서 중간에 만나기라도 할 텐데, 허공을 파니까 완전히 저 혼자죠. 이건 그냥 단순한 외로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요. 심지어 교회에서는 제 음악을 굿 음악이라고 조롱했어요. 그래서 ‘나처럼 사는 건’이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었죠.”
2018년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을 보도한 <한겨레> 1면에 쓴 홍순관의 붓글씨. 홍순관 제공
홍순관의 붓글씨 작품 ‘한가로움’. 홍순관 제공
―색깔이 독특해서인지 음반을 12개나 냈는데도 이름이 나지는 않았어요.
“18살에 사회 개혁을 결심할 때부터 윤동주의 십자가 시 구절처럼 뭘 하더라도 생색내지 않고 ‘조용히’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비장한 결심인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유명해지지 않은 것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데, 불편한 점은 있죠.”
―어떤 점에서요?
“돈이 없어 제대로 된 기타 하나를 사고 싶어도 그게 안 될 때죠. 주변에서 되레 명성을 아쉬워할 때도 있고요. 제가 기후문제 등 환경 노래를 많이 부르는데 불러주는 데가 별로 없거든요.(웃음) 그럴 때 ‘네가 히트곡 한 곡만 있었다면 이런 게 쉽지 않냐’는 말을 듣죠. 제 대답은 이래요. 언감생심 조용필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약 내가 대단한 히트곡을 내서 유명 가수가 됐다면 이런 일 안 할 거라고요. 저는 일상이라는 말을 자주 해요. 날마다 숨 쉬듯 노래하고 일하는 게 중요하다고요. 유명해지면 그쪽 일이 바빠서 이런 일은 하고 싶어도 못 하죠. 일상이 달라지는 거거든요.”
홍순관은 조각과 서예 실력도 뛰어나다. 고철과 폐품으로 만든 철조 작품 전시회와 한글 서예전도 여러 차례 열었다. 특히 어릴 때 선친(홍종욱)한테 배웠던 붓글씨는 균형과 조화, 여백미로 가득한 것이 마치 그림 같다. 하지만 그에게 예술은 일상과 따로 있지 않다. “노래하지만 평화운동을 위해 노래를 하는 거고, 글씨를 쓰지만 당연히 평화운동을 하는 거예요.” 실제 그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여전히 평화박물관을 짓는 일이다. 가수로서 느지막이 생긴 욕심 하나가 더 보태어졌지만.
지난달 26일 홍순관씨가 모처럼 가진 작은 콘서트에는 대구와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40여명의 팬들이 찾아왔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사람들이 즐겨 들을 만한 노래를 만드는 거예요. 지금까진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다르기 때문에 대중들을 신경 쓰지 않고 만들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소통 없이 예술을 했다는 의미예요. 냉정하게 반성합니다. 그래서 쉽게 듣고 소통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픈 생각이 막 끓고 있는데, 막상 작업을 시작하면 이전보다 더한 걸 할지도 몰라요. 제 안에서 두 생각이 막 싸우고 있어요.”
녹취 조아라
☞주말 뉴스를 가장 손쉽게. S-레터를 ‘무료’ 구독해주세요.
구독하기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15
김종철 선임기자
1989년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정치부, 사회부 등에서 일하다 지금은 토요판 선임기자로 현장을 뛰고 있다.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운이 오래가는 기록’을 지향한다.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