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현장을 가장 오랫동안 지켰던 고 강석신씨. 사진 휴대폰 갈무리.
1981년 3월 성균관대 4학년 때
전두환정권 폭압 맞선 첫 시위
석방 뒤 공장 들어가 노조 건설
서울노련·병원노련 결성 참여
‘6월민주항쟁 국민운동’ 홍보도
강석신 형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지난 25일 오전 11시 끝내 눈을 감았습니다. 향년 65. 그를 아는 친구, 지인 여러분께 비통한 마음으로 소식을 전합니다. 그를 알지 못하는 더 많은 분들께도 부디 강석신 형의 ‘무명의 헌신’에 눈길을 주시고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억눌린 자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되, 공동체로부터는 그 어떤 감사와 보답의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이름 없는 한 시민이 이제 막 세상을 떠났음을 여러분께 보고드립니다.
그는 소싯적에 가난한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모은 수재였습니다. 6남매의 맏아들이었습니다. 호남의 명문 전주고에 입학함으로써 집안의 묵은 가난을 벗고 장래 입신양명할 기대주로 촉망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21살이 되던 1978년 봄 성균관대 사학과에 진학한 그는 역사학자나 교육자로 진출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군사독재의 폭압에 고통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졸업을 코앞에 둔 4학년 때 자신의 미래를 돌보지 않고 학생 시위의 주동자로 나섰습니다. 1981년 3월31일 시위운동입니다. 광주학살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이 서슬 퍼렇게 독기를 품어내던 때입니다. 동기 윤익수·이현배와 함께 폭압에 저항하는 첫 시위였습니다. 그는 5층 건물의 옥상에 올랐습니다. 교내에 상주하는 사복 형사들의 초동 시위 진압을 따돌리기 위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옥상이나 굴뚝, 나무 위로 오르는 이른바 ‘고공 택’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날 이른 아침 검은 배낭에 유인물과 휴대용 확성기를 담아 들고서 목표 지점으로 향하던 그를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그의 표정과 눈을 잊지 못합니다. 긴장감과 불안함이 교차하는 중에서도 결연하게 고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그 맑은 눈동자 말입니다.
옥고를 치루고 난 뒤 그는 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노동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시기 일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7080세대 청년들의 숫자가 연인원 수만명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 도덕적인 숭고한 대열에 함께했던 것입니다.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일입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자던 19세기 제정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치아를 방불케 하는 역사적 현상이었습니다.
그는 영등포, 부천, 수원 등지에서 노동조합 건설과 선진 노동자 조직 활동을 했습니다. 1987년에는 서울노동조합연합(서울노련) 결성에 참여했고, 1989년에는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에서 일했습니다. 홍보부장, 교육국장 겸 중앙집행위원을 지냈습니다. 1997년에는 6월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홍보팀장으로서 <6월 민주항쟁 국민운동> 신문과 영상기록 <솔아! 푸르른 솔아>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1990년대들어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이 진전됐습니다. 대중운동이 퇴조하고, 노동운동 일선에 참여하던 동료들이 정세 변화에 맞추어 하나둘 현장을 떠났습니다. 강석신 형도 권유를 받았습니다. 법률을 공부해 진로의 전환을 꾀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던 길을 좀더 멀리까지 계속 걸어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느 동료들보다도 더 오래까지 노동운동 현장을 지켰습니다.
그가 귀향한 게 42살 때 일이었습니다. 홀로 남은 모친과 함께 지내기로 결심했던 것이죠. 그는 사회운동의 미래에 대해 낙담했던 것 같습니다. 10여년간 옛 동료들과 교류를 끊은 채 은거했습니다. 이 기간에 모친의 교회 출입을 돕다가,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다행히 그는 문필 재능을 발휘하여 프리랜서 교정⋅교열가로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오탈자가 있거나 문맥이 통하지 않는 글을 고쳐서 맞춤법과 어법에 맞게 건강한 글로 되살리는 일에 직업적으로 종사했습니다. 그는 이 분야의 ‘고수’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작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재능이 있음에 감사하고, 긍지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마음 고통과 외로움이 그의 건강을 해쳤던 것 같습니다. 3년 전 혈액암이 생겼음을 알게 됐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두 차례 골수 이식 치료를 했습니다. 한때 완치됐나 희망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끝내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강석신 형을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평합니다. 착하고 맑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참 좋으신 분, 사슴같이 고운 친구라고 회고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의 면모가 이웃, 친지들에게 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억눌린 자들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이름없는 헌신이 잊히지 않고 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