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아테네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배영(가운데) 선수가 코치였던 고 이형근(왼쪽) 감독에게 월계관과 꽃다발을 건넨 뒤 염동철(오른쪽) 코치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이배영 감독 제공
“역도인들 화합하라고 전부 불러 모은 것같다.” 지난 4일 별세한 고 이형근 감독님의 장례식장에서, 그 정신없던 와중 가장 귀에 와닿는 얘기였다. ‘감독님 듣고 계신가요? 정말 화합하라고 불러 모으신 건가요? 끝까지 희생만 하다 가시는 건가요?’
지난 4월말 세계역도주니어선수권대회 전임감독으로 그리스를 다녀온 지난 5월초 코로나19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방역지침 탓에 얼굴조차 뵐 수 없었다. 출국하기 1주일 전 점심을 함께하며 앞으로도 자주 보자던 약속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향년 59.
감독님은 나에게 역도를 빙산의 바닷속 부분까지 ‘참 뜻’을 알게 해주신 분이다. 1996년 고교생으로 역도 국가 대표에 처음 발탁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촌할 때 감독님은 코치로 합류했다. 그때부터 하나 하나 배우기 시작해 지금껏 그 길을 뒤따라왔으니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 새삼 사무쳐온다.
그러고보니 감독님은 참 말씀이 적으셨다. 동작이 흐트러져 한참 헤매이고 있을 때 해준 한마디, “배영아! 너 엉덩이 높이가 달라진 건 알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대신, 툭! 하고 던저버리듯 말씀해주신 게 전부였다. 그 때는 혼자 끙끙거리느라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같다. 그렇게 스스로 풀게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올림픽 메달은 없었을 것이다.
1996년 역도 국가대표팀에서 인연을 맺은 고 이형근(뒷줄 왼쪽 세째) 코치와 이배영(앞줄 가운데) 선수가 이듬해 부산 동아시아 경기대회에 출전했을 때 기념사진. 이배영 감독 제공
2011년 7월 역도 국가대표팀이 태릉선수촌에서 미디어데이를 열고 2012런던올림픽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사재혁·윤진희 선수, 이형근 감독, 장미란·김민재 선수. 연합뉴스 제공
“내가 88올림픽에서 동메달 땄으니 나보다 그 위로 가야지!” 감독님의 그 한마디에 담긴 진심 덕분에 참 많은 메달이 나왔다. 김태현·최종근·김순희 등의 세계선수권 메달을 시작으로 장미란·사재혁·윤진희 등의 올림픽 메달까지, 일일이 다 나열하지 못할 정도이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한국 역도가 수많은 메달을 일궈낼 수 있었던 1등 공신이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일화도 잊을 수 없다. 전날 밤 11시 문득 떠오르는 동작을 해보고 싶어 전화로 “감독님 저 내일 오전 훈련 좀 쉬어도 될까요?” 앞뒤 설명도 없이 얘기를 했었다. “알았다! 너 어디냐?” 늘 먼저 이해해 주고 뒤에 걱정해주는 말씀에 힘이 더 났었다. 다음날 나는 인상 한국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귀국 뒤 순금 5돈짜리 ‘네티즌 금메달’을 받아 감독님 목에 걸어드리며 눈물이 솟았을 때 역도를 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고 이형근(뒷죽 왼쪽 둘째) 감독은 2022년 5월 그리스 헤라클리온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에 한국 역도선수단을 이끌고 다녀온 뒤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진 대한역도연맹
감독님은 나에게 만이 아니라, 모든 선수 한명 한명에게 배려와 이해심으로 믿고 기다려주었다. 지금 나 역시 감독을 맏고 있기에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
“앞으로도 역도계에 저런 사람은 전무후무할 거야!” 역도인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애도하고 있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도 그렇게 여유가 많아 보이던 분이 삶의 여유는 없으셨나보다. ‘고생 많이 하셨으니 좀 누리고도 가시지! 뭐가 그리 급하셨소이까? 선수 때부터 가실 때까지 숙제를 풀 만하면 또 내주시니, 숙제 검사는 언제 하시렵니까? 그 곳에도 역도장 있나요? 역도의 정점은 어디인가요?’ 물어볼 게 너무나 많은데….’ 듣지 못할 답인 줄 알면서 자꾸 질문을 하게 된다.
이형근 감독. 그 이름 석자는 한국 역도계에 길이 남을 터이니, 그 곳에서는 편안하게 술 한잔 기울이며 진정한 여유를 느끼시며 이 세상에서 못하셨던 것들 호화롭게 누리소서.
이배영/역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종로구청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