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통일운동가 고 정용일 동지를 추모하며
2000년대 중반 고 정용일 <민족21> 편집국장이 방북 취재에 나서 묘향산을 방문했을 때 모습이다. 안영민 평화의길 사무처장 제공
통일운동단체 공동 장례위원회 꾸려
10여개 단체·주요 직책 ‘존재 실감’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 나와는 1980년대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할 때부터 인연을 맺었고, <민족21>을 거쳐 평화의길까지 30년 넘게 동지적 관계를 이어왔던 정용일 형. 지난 9월 4일 오후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9월 6일 아침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 쉰의 나이에 뒤늦게 결혼해 여섯 살 쌍둥이 남매를 남겨 둔 채 끝내 눈을 감은 것이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홀연히 떠난 뒤에야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실감했다. 비로소 그 빛나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형의 부고를 접하자마자, 그가 활동해온 통일운동단체들을 모아 공동으로 장례위원회를 꾸렸다. 나는 어린 아이들을 대신해 상주 노릇을 맡았다. 뒤늦게 우리는 서로 깨달았다. 평화의길, 통일의길, 평화철도,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액션원코리아(AOK)한국, 전대협동우회, 민플러스, 통일교육협력단, 엔케이(NK)투데이…. 형이 참여하고 있던 단체가 얼마나 많고 다양했는지. 단지 이름만 걸어둔 것이 아니었다. 대외협력위원장, 정책위원장, 홍보위원장, 기획위원장…, 주요 직책들을 도맡고 있었다. 통일 관련 토론회와 세미나, 발표회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언제든 달려갔고, 힘을 보탰다. 그만큼 뜨거운 심장을 지닌 사람이었다. 여의도성모병원에 빈소가 꾸려지자마자 형을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아직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세상을 떠난 그를 추모했다. 형이 남겨둔 어린 아이들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기억하는 형의 모습은 온화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늘 웃는 얼굴로 화해와 통일, 평화와 번영을 말하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만나 막걸리 마시는 걸 좋아했던 천생 운동가였다. 쓰러지기 불과 며칠 전에도 막걸리 한 잔 하며 통일운동 진로와 평화의길 사업방향을 토론했었다. 다양한 단체와 직책에서 알 수 있듯이 형은 통일운동의 가교 노릇을 충실히 했다. 작은 차이를 인정하고 단합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일상 속에서 대중들과 함께 하는 폭넓은 통일운동을 강조했다. 우리가 운동의 방향을 찾지 못할 때는 나침반이 되었고,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흔들릴 때는 파수꾼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대구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대대협) 시절 후배들과 함께 엠·티(수련회)를 즐겼던 고 정용일(오른쪽 세번째 안경 쓴 이) 당시 정책차장. 안영민 평화의길 사무처장 제공
2011년 ‘민족21’ 탄압도 함께 겪어
“빛나던 대대협 정차 형 기억할게요” 대구 지역에서 학생운동을 할 때 형의 별명은 ‘정차’였다. ‘정차’는 대구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대대협) 시절 형이 맡은 직책인 정책차장의 준말이다.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8월 19일 전국적 규모의 학생조직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결성됐고, 이에 발맞춰 대구에서도 대대협이 결성됐다. 이때 용일 형이 맡은 직책이 대대협 정책차장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정차’였다. 그 때 후배들은 형의 본명도 학교도 몰랐다. 하지만 대구는 물론 경북 지역의 대학을 쫓아다니며 학생회를 세우고자 후배들과 정세를 토론하고, 조직을 지도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의자를 붙여놓고 새우잠을 청하던 ‘정차’ 형의 모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2001년 봄 <민족21>이 창간됐을 때 누구보다 반가워한 형은 이듬해부터 대구지사장으로 돕다가 2006년 취재부장을 맡아 공식 합류했다. 2009년부터 형은 ‘정 국장’으로 불렸다. 2011년 7월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은 ‘로동당 지령으로 종북잡지를 발행해왔다’는 간첩 누명을 씌우려고 ‘민족21’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편집주간이었던 나와 편집국장인 형의 집은 물론 ‘민족21’ 사무실까지 압수수색했지만, ‘정 국장’은 초지일관 당당히 탄압에 맞섰고 이겨냈다.
고 정용일 편집국장의 영결식은 지난 8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진행됐다. 고 정용일 동지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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