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은퇴 목회자들을 위한 생활공동체인 경기도 화성의 ‘광명의집’에서 함께한 고 이규상(왼쪽) 목사와 부인 고순희(오른쪽)씨. 사진 들꽃향린교회 제공
‘이규상 목사님, 1976년 5월 그때 남영동 분실에서 “박형규 목사가 공산당”이라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그자들은 이미 용공조작 사건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목사님의 증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자들이 “박형규가 공산당이 아닌지 잘 모르겠다”라는 말이라도 듣기 위해 한달간이나 모진 고문을 하셨다죠. 한 번쯤은 타협(?)하실 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한평생 그 잔인한 고문의 흔적을 온몸에 짊어진 채 고통스럽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11월 21일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빈소로 달려가면서, 20년 넘게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달리신 모습이 안타까워 속으로 외쳤던 후배의 푸념입니다.
돌이켜 보니 목사님은 민중과 함께 예수의 길을 따라 간 ‘참사람’이었습니다. 1967년 한신대를 졸업하자마자 곧 인천 대성목재 노동자로 일하셨습니다. 그 현장의 세월은 한국교회 산업선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그 뒤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실무자로 빈민선교의 길로 나섰습니다. 목사님은 곳곳마다 아우성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절규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다고 고백하셨다지요. 그때 남긴 말씀은 아직도 후배들에게 금과옥조가 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라. 몸과 맘을 모아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겸손하게 그분들을 마음속에 영접하라. 그분들을 깨우치게 하되 그분들을 교육시킨다는 생각은 독선이고 교만이고 무지의 소치이다. 절대 앞에 나서지 말고 그분들 스스로가 일어나도록 길을 예비해 드려야 한다.” “그분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섬기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고 이규상 목사는 1974년 2월 긴급조치 1호 이후 첫 개헌 시국선언을 주도해 구속된 ‘기독교 성직자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오른쪽부터 김진홍 활빈교회·이해학 성남 주민교회·이규상 수도권특수선교위 전도사, 인명진 도시산업선교연합회 목사, 백윤수 창현교회 전도사, 김경락 도시산업선교연합회 총무 겸 영등포중앙교회 목사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 이규상 목사는 1976년초 서울 청계천에서 철거당한 빈민들과 함께 천막으로 사랑방교회를 열었으나 곧바로 다시 철거를 당했다. 사진은 1975~76년무렵 청계천 철거현장의 천막촌. 청계천박물관 제공
1970년대 그 시절 박정희는 정권유지 차원에서 이른바 ‘5가작통제’로 빈민들의 소통을 감시했습니다. 목사님은 정보기관들의 감시에도 굴하지 않고 빈민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기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민주화운동과 빈민운동에 앞장선 수도권 교역자들을 눈엣가시로 여긴 그자들은 1976년 목사님이 청계천 철거민과 함께 천막으로 세운 사랑방교회마저 용역 깡패들을 동원해 철거하고 십자가를 똥통에 처박아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똥통에서 건져낸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교인들과 함께 행진하였고, 그 행진은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민주화운동 대열에 참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똥통에 처박아야 할 것은 사랑방교회의 십자가가 아니라, 가난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장사꾼으로 변질된 한국교회,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외면한 한국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자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고,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려 애쓴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도 심지어 화를 내어야 할 일에도 옅은 미소로 묵묵히 해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목사님이 크게 통곡하고 슬퍼하신 적도 있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수많은 시민이 학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광주의 현장으로 달려가려고 하였으며, 여의치 못하자 크게 낙담하였습니다. 마침 그 무렵 사모님(고순희)이 첫 아이를 낳아 병원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5·18로 도피 중인 학생들을 사모님의 병실에 숨겨 돌보아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후배들이 목사님을 본받아 빈민선교, 민주화운동의 대열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목사님의 삶을 끝까지 지켜주신 사모님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군사정권에 맞서 투쟁하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옥중에 있던 목사님과 결혼을 결심하고 옥바라지를 했으며, 캐나다 교회의 초청을 뿌리치고 가난한 빈민선교를 선택했을 때도 끝까지 현장에서 함께해준 든든한 동지셨으니까요.
목사님,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 맘껏 누리소서. 물론 오늘을 보면 걱정스러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삶이 후학들에게 큰 울림과 감동으로 살아있으니 정의·평화·생명의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것입니다.
김영주/목사·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