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눈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고 박용구 선생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 새롭게 듣는 귀를 지니신 분이셨다. 그래서 그분의 그 신선한 시각에 나는 깜짝깜짝 놀라고는 했다.
‘우리 무용계의 역사는 홍신자 등장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고인은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나라 ‘비평계’의 역사는 박용구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분의 등장은 비평계와 문화계에 너무나 많은 것을 수혈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박 선생 내외분이 광주 퇴촌 구석에 살고 있는 나를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망백(望百)의 고령이신데도 그 정정하던 모습이며, 쩌렁쩌렁 울리던 목소리가 지금도 눈과 귀에 선하다.
마침 점심때라 집 근처의 ‘풍경’이라는 음식점으로 모셨다. 시골 골목길에 숨어 있는 집이 무척 정겹다시며 선생은 ‘이 집 풍경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으레 경치겠거니, 한 번도 그 뜻을 헤아려본 적이 없었던 나는, 어딘가 쿡 찔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그 충격의 진동에 살짝 흔들리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처마 끝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 소리를, 은은한 여운으로 우리를 황홀케 하는 그 그윽한 소리를, 내가 그토록 닮고 싶어했던 틴틴나불룸(종소리), 내가 그토록 풍기고 싶었던 나불룸(종소리의 여운)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니.
귓전에서 울려오는 그 풍경 소리를 타고 내 상념은 40여년 전의 동해로 날아갔다. 1970년대 중반, 강원도의 해변 낙산호텔에서 미술, 연극, 음악, 무용 등 여러 분야 평론가들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방 하나에 두 사람씩 배정되었던 그날의 내 파트너가 바로 박 선생이었다. 밤늦게 방으로 들어오자, 현묘한 여운을 남기면서 끊임없이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마치 바소 콘티누오(통주저음)처럼 깔아두고, 박 선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일제 말기,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가물거리고 있었을 때 만주로 탈출하는 길목에서 동해를 거쳐 갔다고 했다. 망망한 바다 위의 작은 돛단배처럼 미미한 자신의 존재가 한스러우면서도 툭 트인 바다 앞에서 가슴이 터질 듯 벅찬 마음으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고 그때 어린 시절 풍기의 꿈이 다시 꿈틀거렸다는 대목에서는 낭랑하던 그의 목소리가 극적으로 고조되면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아 그 시절 한때 암울했던 하늘은 얼마나 푸르르고 바다는 얼마나 무한했던가.”
만주의 우중충한 하숙방에서도 그 동해의 풍경은 선생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때마다 어둠 속을 꿰뚫고 비춰오는 햇살처럼 어디선가 먼 풍경 소리가 들리고는 했단다.
이제 선생과 함께 갔던 그 ‘풍경’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고인의 낭랑했던 목소리와 함께 맑고도 그윽하게 울리는 그 풍경 소리를 듣는다.
선생이 멀리 떠나신 지 어느새 한 달, 지금 나는 호레이쇼가 햄릿을 보내면서 목이 메어 중얼거렸던 말을 선생의 영전에서 읊고 싶다. “천사들이 하늘 가득히 날아오르면서 당신의 안식을 노래하기를!” 그리고 나는 단 한마디만 덧붙일 것이다. “그 천사들의 노랫소리에 풍경이 파사칼리아(무곡)처럼 곱게 깔리기를.”
이순열/춤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