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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또 다른 세상 ‘연출’하러 서둘러 떠나버렸나”

등록 2018-01-29 14:19수정 2022-03-17 12:16

[가신이의 발자취] ‘드라마 피디’ 전기상을 보내며
전기상 피디. 귀한 드라마 피디가 지난 13일 교통사고로 먼저 떠났다. 향년 59.

그는 본래 드라마 피디는 아니었다. 프랑스어를 쓰는 범불어권 청취자에게 단파방송을 통해 한국 소식을 알려주는 프랑스어 피디였다. 제도권에 속한 한류 홍보대사였다고 할까. 그러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관련 뉴스 등 국정 홍보 뉴스가 주류이던 그 시절, 그의 고민은 깊어갔다. 뉴스 내용 자체의 경직성도 그러하거니와, 뉴스는 왜 창작을 통해 재구성해서는 안 되는지 의문을 갖곤 했다. 그는 누벨바그 영화이론을 설파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고,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 같은 프랑스식 코믹영화에 흠뻑 빠져 한밤중에 (세입자 주제에 감히 집주인인) 나를 깨우곤 했다. 기타를 치며 샹송을 불러대던 어느 심야에 나는 그에게 ‘드라마 피디’로 전직을 권유했고 몇달 뒤 그는 꿈을 이루어 같은 부서 동료가 되었다. 1985년 <한국방송>(KBS) 입사동기이자 여의도의 부동산거래소에서 만난 인연으로 1년간 한집에 동거하던 시절의 추억이다.

그는 드라마 연출을 맡자마자 일을 냈다. 일단 십수년간 이어져온 <전설의 고향>의 색깔을 바꾸었다. ‘전설의 고향’의 주된 소재는 사연 많은 귀신이다. 대부분은 씨받이하고 죽임을 당한 여인이거나 첩 때문에 살해된 본처, 죽음을 강요당한 환향녀 등 대체로 억울한 원혼이 주류를 이루는 사극이었다. 그는 과거의 영혼이 현대에 미치는 소위 타임슬립형 현대극을 연출했다. 게다가 경쾌한 외국 팝송을 삽입했다.

‘춘향전’ 원전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의 두번째 미니시리즈 <쾌걸춘향>은 이몽룡·변학도·성춘향의 캐릭터는 가지고 오되, 매우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춘향이와 비루해진 이몽룡, 차도남 변학도로 구성된 현대극이다. ‘국민효녀’ 심청과 함께 ‘국민지조녀’ 춘향의 변용은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방송 토양 속에서 파격이었다. 그는 아마 ‘암행어사 출또요’라는 지극히 신파적인 귀결을 못마땅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대표작이 된 <꽃보다 남자>(2009년)의 인물들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드라마 피디들은 현실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현재성에 기반한 답을 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판타지 드라마에서조차 현실세계를 투영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꽃보다 남자‘는 드라마 피디 중 열이면 아홉은 피하고 싶은 스토리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설정에 지나침은 없고, 어떠한 설정이든 이야기 구조가 치밀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요컨대 그는 기존의 드라마 틀을 바꾸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그가 생각하는 창작은 퍽 근본적이다. 그는 스토리를 잘 버무려서 의외의 결과를 추론해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재료 자체를 새로이 구성한다. 그러하니 그는 이 세상이 지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세상을 재구성하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마도 다른 세상을 취재하려는 듯, 그는 서둘러 떠난 것 같다. 부디 새로운 소재를 찾아 또 다른 드라마를 선보여주길….

전산/팬엔터테인먼트 부사장, 전 <한국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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