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7일 토크콘서트 함께
“나이들면 입 꽉 다물고 살기로 결심”
관객들 폭소 끌어낸 마지막 무대
“나이들면 입 꽉 다물고 살기로 결심”
관객들 폭소 끌어낸 마지막 무대
【가신이의 발자취】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님 영전에
국악계의 큰 어른, 황병기 명인께서 돌아가셨다. 향년 82.
황병기 선생님의 생전의 사고방식이나 활동 영역을 생각할 때, ‘국악’으로 분야를 한정짓는 건 부족하다. 선생님은 국악과 서양음악을 아우르는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집행위원장을 맡으셨고, 일찍이 유니세프한국위원회의 대표로도 다양한 문화활동을 했다. 선생님을 주축으로 하는 많은 활동이 내부적 화합과 함께 늘 괄목한 성과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분야의 여러 사람들이 ‘황병기’라는 존재를 왜 인정했을까?
황 선생님이 생전에 가장 사랑한 책은 <논어>였다. 그 밑에 깔린 생각은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그는 모든 장르의 여러 사람과 두루 화목하게 교감하는 분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선생님의 ‘존재감’은 분명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른바 예술적인 사단을 만들지 않은 분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믿고 따르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안 하셨지만 그와 관계된 조직에선 모두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황 선생님은 가야금 연주가이자, 가야금 창작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음악에는 고금(古今)과 아속(衙屬)이 아름답게 공존해 있다. 이런 것을 나누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다. 그는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의 본질을 너무도 잘 아는 분이었다. 그러하기에 ‘현대 가야금의 효시’라고 하는 ‘숲’에서부터 1970년대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미궁’과 같은 현대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이념적인 갈등이 있는 남과 북의 갈린 음악 속에서, 순수한 ‘공통분모’를 찾아내려는 첫걸음을 내디딘 인물도 황병기다. 지금 대한민국은 평창겨울올림픽에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고, 예술단의 교류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이렇듯 남과 북의 음악이 만나는 데 앞장선 분도 그였다. 황 선생님을 단장으로 하는 서울전통음악예술단의 평양 공연(1990년 10월18일)은 남과 북이 서로의 이념을 떠나서 상대의 음악을 순수하게 바라본 최초의 음악회였다. 이런 공연의 성과로 그해 연말에 서울에선 ‘송년통일전통음악제’가 열렸고, 우리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 북한 음악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황병기는 1994년 ‘국악의 해’ 추진위원장을 비롯해서, 2004년 ‘국악축전’ 조직위원장에 이르기까지 한국 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그 외연을 넓히는 데 큰 몫을 했다. 그의 생각은 젊은이들을 앞서갔고, 그의 감성은 세대를 초월했다. 이런 것이 모두 가능했던 것은 역시 황병기 명인의 ‘다름’에 대한 포용이 밑에 깔려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황 선생님의 작품은 하나하나 생명력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곡은 역시 가야금 독주곡 ‘침향무’(1974년)다. 이 작품은 세계의 주요 도시, 주요 공연장에서 연주되었다. 가야금 연주가들이 외국 공연 때, ‘침향무’를 연주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다. ‘비단길’ 역시 ‘한국적’ 작품일 뿐 아니라, ‘아시아적’ 작품으로서 늘 최고의 위치에 놓여 있다.
황 선생님의 마지막 무대는 지난해 12월27일 경기도 고양 명지병원에서 주최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 초청 뉴힐 하우스콘서트’였다. 이때도 ‘침향무’를 연주했다. 사회자가 선생님의 연주 ‘공력’을 칭송하자 “나이 든 연주가에게 공력 운운해서 좋긴 하지만, 요즘 손가락이 예전같이 잘 돌아가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그날 콘서트를 끝내는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다음 세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물었다. “나이 든 사람이 나이 들어서, 예전에 이랬고 저랬다는 얘기가, 난 젊은 시절에 참 듣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저는 나이 들어서 그런 얘기를 안 하려고 일찍 결심을 했죠. 저는 이제부터 입을 ‘꽉’ 다물고 살 겁니다.” 이런 말씀과 함께 선생님은 당신의 입을 마치 지퍼를 채우는 시늉까지 했다. 객석에서는 큰 박수가 쏟아졌다.
한국의 예술사에서 황병기와 같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이전에는 없었고, 이후에도 있을까? 황병기와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축복이란 생각마저 든다.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빈다.
윤중강/국악평론가·공연연출가
국악평론가 윤중강(오른쪽)씨와 토크쇼를 하고 있다. 황 선생은 그뒤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치료를 받다 1월31일 별세했다. 사진 명지병원 제공
?고 황병기 명인이 지난해 9월 14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국악시리즈 II ?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연에서 가야금 독주곡 ‘침향무’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롯데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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