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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늘 7천원 막국수 즐기며 ‘한솥밥 한식구’ 품어준 검박한 참목자셨죠”

등록 2020-08-09 21:54수정 2022-03-17 12:08

[가신이의 발자취] 천주교 춘천교구 장익 전 주교님 영전에
천주교 춘천교구는 지난 8일 주교좌 대성당에서 고 장익 전 주교의 장례미사를 올렸다. 이 자리에서 고인의 유언이 공개됐다. 사진 춘천교구 제공
천주교 춘천교구는 지난 8일 주교좌 대성당에서 고 장익 전 주교의 장례미사를 올렸다. 이 자리에서 고인의 유언이 공개됐다. 사진 춘천교구 제공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을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십자가의 요한, 나는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그 분이 가신 날은 해가 반짝 났다. 장익 주교님의 장례미사일인 지난 8일 아침, 춘천은 비가 멈추었다. 여러 날 계속된 장마와 폭우 사이에서 잠시 맑은 하늘이 열렸다. 매미 소리와 새소리도 들렸다. 그리 넓지 않은 춘천교구의 주교좌 대성당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외부 손님들이 자리했지만, 비가 멈춘 덕분에 죽림동 성당 앞과 좌우 잔디밭에는 평소 따르던 교구의 신자들도 함께할 수 있었다.

장례미사를 마친 뒤 몇 분들과 장 주교님이 생전에 자주 다녔던 막국수집을 찼았다. 아직도 순메밀 막국수를 옛날식으로 뽑으며 한 그릇에 7000원 받는 집이다. “원래 막국수 맛이 어떤 건지 이제 알겠습니다. 장익.” 낯익은 글씨체의 서명이 붙어 있는 집이다.

20년 전, 춘천교구청에서 처음 뵌 이래 장 주교님은 7천원 이하의 음식점만 다녔다. 소박 검소한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하시고 맛도 잘 아시는 분이었다. 제철에 난 재료로 늘 시절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어줬던 어머니 말씀도 자주 하셨다.

춘천교구 주교를 맡아 서울에서 이주해 온 이래로 지역 교구민과 하나되고 춘천에 뼈를 묻는 사람이 되겠다는 그 의지가 막국수 사랑에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재직중에는 교구내 모든 본당과 교우들은 물론이고 공소와 공소 교우들까지도 두루 살피셨다. 미혼모와 공부방, 양로원과 이주 노동자들은 더 살뜰히 챙기셨다. 춘천교구와 하나가 되겠다는 의지와 보살핌은 더 깊어지고 넓어지셨다.

춘천에 오신 지 3년째, 1977년 부활절 때 주교님은 ‘한솥밥 한식구' 담화문을 통하여 호소하셨다. “우리 춘천교구는 휴전선 철조망으로 둘로 나뉘어 민족 분단의 아품을 그대로 몸에 안고 있는 교구입니다. 그 절반이 북녘에 있는 춘천교구 신자 공통체는 너무나 당연한 사랑의 부름입니다.” “마음껏 크고 자라서 우리 민족의 앞날을 펴나가야 할 어린이들까지도 애처롭게 죽어가는 실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내 삶에만, 우리 식구에만, 마음을 쓰느라 북녘 동포의 이 굶주림과 고통을 모른체하고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닌지요? 같은 동포가 굶주려 쓰러져 간 뒤의 통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같은 겨레입니다.”

그런 마음과 보살핌으로, 장 주교님은 북강원도에 감자·옥수수·연어 치어·결핵 백신·구급차 등을 꾸준히 지원하셨다. 이른바 ‘사업자 선생’으로 지원 물품을 북녘에 전달하며 “천주교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라고 얘기하고 오면, 다음에 만났을 때 “교주님께서 보내신 물품 잘 받았습니다”라고 인사를 해서 늘 웃음 짓던 기억도 난다. 그 얘기를 전해드리면 주교님께서도 옅은 웃음을 짓고 하셨다.

어느 해 강원도지사와 함께 북강원도 원산을 방문했을 때다. 늘 가방을 손수 들고, 승합차 뒷자리에 앉는 장 주교님의 모습을 보고, 동행한 우리 관청 사람들은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는 뒷말도 전해들었다. 그때 주교님은 원산 방공호에서 순교하신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의 발자취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지난 8일 천주교 춘천교구의 주교좌인 죽림동 성당의 대성당에서 고 장익 전 주교의 영정이 들어오고 있다. 사진 춘천교구 제공
지난 8일 천주교 춘천교구의 주교좌인 죽림동 성당의 대성당에서 고 장익 전 주교의 영정이 들어오고 있다. 사진 춘천교구 제공
지난 토요일 장례미사를 시작하기 직전 교구의 평신도 회장으로부터 질문을 하나 받았다. “장 주교님께서 한국 교회에 기여하신 점 세가지만 말씀해주세요”. 그 자신은 ‘성서 백주간'이 가장 생각난다며, 장 주교님과 성서 백주간 때의 추억을 한참동안 들려주었다. 나 역시 답을 생각해보았다. ‘한솥밥 한식구 운동’, 무엇보다 ‘춘천교구장 주교로서의 직분 수행’이 아닐까?

이날 장례미사에서 장 주교님의 유언이 발표되었다. 성경 한 구절과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아주 간략한 유언이었다.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2 -13)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을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십자가의 요한, 나는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늘 해처럼 따뜻함을 주변에 나눠주시며 참목자의 길을 겸손하고 검소하게 보여주신 주교님! 춘천 주교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하셨기를 기원합니다.

김현준/춘천 소양로성당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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