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베트남전쟁 빈안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 영전에
고 응우옌떤런은 15살 때 한국군에 의한 집단학살 때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고 자신도 부상을 입은 피해자였으나, 평생토록 증언을 통해 평화를 기원했다. 사진 이재갑 작가 제공
어머니·여동생 희생 증언하며 ‘펑펑’
2015년 방한 때 파월군인들 시위 보며
“전쟁도 격렬하지만 평화도 격렬하다”
‘나약한 모습 보이지 않겠다’ 다짐해 지난 20년간 수많은 한국인에게 평화의 마음을 나눠준 베트남전쟁 빈안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님이 지난 7일 오전 7시40분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69. 21년 전 여름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날 맹호부대 군인들이 건넜다는 콘강을 따라 걷다가 지금은 사라진, 나무로 된 흔들다리를 건너, 다시 무릎까지 자란 수풀 사이로 난 고샅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당신 어머니와 여동생의 묏자리를 끼고 돌면 정갈한 당신 집 마당이 보였습니다. 당신은 참 눈물이 많은 사람. 학살 이후 30여년 만에 처음 마을에 나타난 한국인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의 주먹과 발길질을 막느라 저를 감싸안고 땅에 엎드린 당신은 제 등이 흠뻑 젖도록 울었습니다. “너덜너덜한 팔 한 짝은 저기 나뭇가지에 걸리고 발 하나는 마당에 구르고 있었어. 큰애가 7살, 작은애가 겨우 3살. 산산조각 나 흘어진 고 어린것들의 살점과 뼛조각을 이 두 손으로 그러모아 묻었다고. 그 원한을 갚자면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칠 않아!” 한국군에게 두 아이를 잃은 응우옌반저의 서슬 퍼런 고함소리에 “암만, 내가 알지. 그 맘 내가 알지.” 꺼이꺼이 더 큰 울음으로 응수하면서 당신은 저 대신 마을 사람들의 뭇매를 다 받아냈습니다. 마을의 당서기장이던 당신이 주선한 화해의 술자리. “퐁(여동생의 이름)아! 어머니! 그곳에선 편안하신가요?” 술잔에 뚝뚝 떨구던 당신의 눈물방울이 모두 다 별이 되어 박힌 듯 눈이 시려오던 그날의 밤하늘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학살은 ‘소리’로 기억된다고 했지요. 포격소리, 총소리, 저벅저벅 군홧발 소리에 이어 수류탄에 하반신이 날아간 어머니가 질러대던 비명소리,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온 여동생이 뱉어내던 가느다란 신음소리. 먼저 동생이, 이어 어머니가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 실려나가고 텅 빈 방 안에 공명하던 자신의 울음소리. 첫 만남 이후 수십번 아니 수백번 되풀이해, 15살 때 목격한 학살을 증언하면서도 어머니가 죽는 대목에선 늘 펑펑 눈물을 쏟는 당신을 저는 ‘울보 아저씨’(chú khóc nhè)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2015년 4월 한국을 방문한 어느 날 ‘울보’ 당신이 단호히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당신이 머물던 호텔을 중심으로 안국동 사거리에서 공평동 사거리까지 군복을 입은 한국의 참전군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시위를 하던 날이었지요.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으며 인사동 차 없는 거리를 역주행해 건물 뒤편의 외벽에 늘어뜨린 철제 사다리를 타고 유리창을 넘어 가까스로 호텔 방 안에 들어선 순간 긴장한 빛이 역력한 당신이 담배를 찾았습니다. 담배를 한 대 빼어 문 당신이 창문을 열자 “베트콩 응우옌떤런”이라는 문구와 함께 대문짝만한 당신의 얼굴이 실린 펼침막이 펼쳐지고 확성기를 통해 귀를 찢는 듯한 군가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당신이 말했지요. “전쟁도 격렬하지만 평화도 격렬하구나!” 아, 당신은 그 긴박한 순간들을 ‘충돌’로 보지 않고 ‘평화’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당신은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평화의 전사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잖아!”
베트남전 학살 생존자인 고 응우옌떤런(가운데)은 2015년 4월 한국을 방문해 같은 생존자 응우옌티탄(맨 오른쪽), 필자 구수정(맨 왼쪽)씨와 함께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이재갑 사진가의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전시를 둘러봤다. <한겨레> 자료사진
연재가신이의 발자취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