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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학살 피해 ‘울보아저씨’ 잊고 ‘평화의 전사’ 기억할게요”

등록 2020-11-08 19:33수정 2022-03-17 12:08

[가신이의 발자취] ‘베트남전쟁 빈안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 영전에
고 응우옌떤런은 15살 때 한국군에 의한 집단학살 때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고 자신도 부상을 입은 피해자였으나, 평생토록 증언을 통해 평화를 기원했다. 사진 이재갑 작가 제공
고 응우옌떤런은 15살 때 한국군에 의한 집단학살 때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고 자신도 부상을 입은 피해자였으나, 평생토록 증언을 통해 평화를 기원했다. 사진 이재갑 작가 제공

1966년 한국군 맹호부대 1004명 학살
어머니·여동생 희생 증언하며 ‘펑펑’
2015년 방한 때 파월군인들 시위 보며
“전쟁도 격렬하지만 평화도 격렬하다”
‘나약한 모습 보이지 않겠다’ 다짐해

지난 20년간 수많은 한국인에게 평화의 마음을 나눠준 베트남전쟁 빈안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님이 지난 7일 오전 7시40분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69.

21년 전 여름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날 맹호부대 군인들이 건넜다는 콘강을 따라 걷다가 지금은 사라진, 나무로 된 흔들다리를 건너, 다시 무릎까지 자란 수풀 사이로 난 고샅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당신 어머니와 여동생의 묏자리를 끼고 돌면 정갈한 당신 집 마당이 보였습니다.

당신은 참 눈물이 많은 사람. 학살 이후 30여년 만에 처음 마을에 나타난 한국인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의 주먹과 발길질을 막느라 저를 감싸안고 땅에 엎드린 당신은 제 등이 흠뻑 젖도록 울었습니다.

“너덜너덜한 팔 한 짝은 저기 나뭇가지에 걸리고 발 하나는 마당에 구르고 있었어. 큰애가 7살, 작은애가 겨우 3살. 산산조각 나 흘어진 고 어린것들의 살점과 뼛조각을 이 두 손으로 그러모아 묻었다고. 그 원한을 갚자면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칠 않아!”

한국군에게 두 아이를 잃은 응우옌반저의 서슬 퍼런 고함소리에 “암만, 내가 알지. 그 맘 내가 알지.” 꺼이꺼이 더 큰 울음으로 응수하면서 당신은 저 대신 마을 사람들의 뭇매를 다 받아냈습니다.

마을의 당서기장이던 당신이 주선한 화해의 술자리. “퐁(여동생의 이름)아! 어머니! 그곳에선 편안하신가요?” 술잔에 뚝뚝 떨구던 당신의 눈물방울이 모두 다 별이 되어 박힌 듯 눈이 시려오던 그날의 밤하늘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학살은 ‘소리’로 기억된다고 했지요. 포격소리, 총소리, 저벅저벅 군홧발 소리에 이어 수류탄에 하반신이 날아간 어머니가 질러대던 비명소리,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온 여동생이 뱉어내던 가느다란 신음소리. 먼저 동생이, 이어 어머니가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 실려나가고 텅 빈 방 안에 공명하던 자신의 울음소리.

첫 만남 이후 수십번 아니 수백번 되풀이해, 15살 때 목격한 학살을 증언하면서도 어머니가 죽는 대목에선 늘 펑펑 눈물을 쏟는 당신을 저는 ‘울보 아저씨’(chú khóc nhè)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2015년 4월 한국을 방문한 어느 날 ‘울보’ 당신이 단호히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당신이 머물던 호텔을 중심으로 안국동 사거리에서 공평동 사거리까지 군복을 입은 한국의 참전군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시위를 하던 날이었지요.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으며 인사동 차 없는 거리를 역주행해 건물 뒤편의 외벽에 늘어뜨린 철제 사다리를 타고 유리창을 넘어 가까스로 호텔 방 안에 들어선 순간 긴장한 빛이 역력한 당신이 담배를 찾았습니다.

담배를 한 대 빼어 문 당신이 창문을 열자 “베트콩 응우옌떤런”이라는 문구와 함께 대문짝만한 당신의 얼굴이 실린 펼침막이 펼쳐지고 확성기를 통해 귀를 찢는 듯한 군가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당신이 말했지요. “전쟁도 격렬하지만 평화도 격렬하구나!” 아, 당신은 그 긴박한 순간들을 ‘충돌’로 보지 않고 ‘평화’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당신은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평화의 전사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잖아!”

베트남전 학살 생존자인 고 응우옌떤런(가운데)은 2015년 4월 한국을 방문해 같은 생존자 응우옌티탄(맨 오른쪽), 필자 구수정(맨 왼쪽)씨와 함께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이재갑 사진가의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전시를 둘러봤다. <한겨레> 자료사진
베트남전 학살 생존자인 고 응우옌떤런(가운데)은 2015년 4월 한국을 방문해 같은 생존자 응우옌티탄(맨 오른쪽), 필자 구수정(맨 왼쪽)씨와 함께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이재갑 사진가의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전시를 둘러봤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9월부터 호흡곤란 증상을 겪다가 얼마 전 검진 결과 심장에 이상이 있음을 확인하고 수술을 고려하던 차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당신. 엊그제 영상통화에서 ‘힘내시라’는 응원에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며 엄지 척으로 화답하던 당신이었기에 황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심장이 망가지기 시작한 건 2015년 그날부터가 아니었을까요? 이제 울음을 참는 당신은 학살을 이야기할 때마다 어머니 대목에 이르러서는 숨을 고르지 못해 가슴을 움켜쥐고 한참을 멈추거나 종국엔 그대로 건너뛰곤 했습니다.

살아서 ‘빈안학살 생존자’라 불린 당신. 원래 빈안(Binh An)은 ‘평안’이라는 뜻을 가진 마을이었다고 했지요. 1966년 한국군 맹호부대에 의해 면 단위 정도의 마을에서 1004명이 참혹한 학살을 당한 사건을 겪은 뒤 주민들은 더 이상 그 이름을 쓸 수 없었다고 했어요. 학살의 폐허 위에 마을을 재건한 사람들은 ‘서쪽의 영광’이란 뜻의 떠이빈(Tay Vinh)으로 이름을 바꾸지요. 슬픔이 어떻게 영광이 될 수 있느냐며 당신은 그 이름조차 못마땅해했습니다. 당신이 가신 그곳에 옛적 빈안 마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을 겪은 적도, 겪을 일도 없는 빈안 마을에서 당신이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던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 그 이름처럼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학살, 그 이후 당신이 살아낸 54년의 그 고통스럽고 외로웠을 세월을 헛되이 하지 않을 의무는 이제 저희에게 있습니다. 피해자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평화의 전사’로서 싸워온 당신이 못다 이룬 꿈은 저희가 치열하게 이루어 갈 테니 당신은 부디 좋은 세상으로 어여 가세요. (부조금 우리은행 1005-603-308131 예금주: 한베평화재단)

구수정/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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