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산 기슭 동국선원에서 애견 셀티와 함께한 육허 스님.
조현 기자의 휴심정
동국선원 주지 육허 스님
동국선원 주지 육허 스님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리. 천마산 기슭 마을 주택가에 있는 ‘동국선원’ 주지 육허(54) 스님은 ‘별’들의 형님이다. 그는 교도소와 구치소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 올겨울 최고 한파가 몰아친 지난 13일 그를 찾았다. 현관문을 열자 온기라곤 없는 냉골이다. 객이 거실에 앉은 이후에야 난방기를 끌어다 튼다. 내핍이 몸에 밴 그지만 교도소에 갈 때만은 큰손이다. 소형차엔 막 쪄낸 떡이나 빵이 한가득 실린다. 형편이 어려운 재소자에겐 영치금도 넣어준다. 재소자들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해서 그는 ‘예스 스님’으로 통한다. 그는 ‘20년 동안 재소자들을 돌보고, 내 공부를 하겠다’고 원력을 세운 지 17년이 됐다.
그는 “재소자들을 보면 내 전생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스님들은 출가 전의 삶을 전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는 1970년대 인기 있던 권투를 했다. 중3 때는 소년체전에서 입상도 했다. 그런데 18살 때 빗장뼈가 나가 권투를 그만뒀다. 꿈이 좌절되면서 방황이 시작됐다. 그는 20대를 ‘반달로 보냈다’고 했다. ‘(폭력)조직’ 같은 데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반은 건달로 살았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시절이었다.
사법시험 준비생 둘과 의기투합
제 뜻대로 되는 게 없자 그는 미래를 꿰뚫어보는 도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30대 중반이던 1997년 고향 부근인 대구 팔공산 오도암 터로 숨어들어갔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폐사 터에 움막 하나 짓고 주역을 공부했다.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인 채 3년이 되자 명망 있는 역술인들과 일합을 겨뤄볼 만한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러 입산한 두 도반을 만났다. 출세와 출가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 도반들과 스승이 될 만한 ‘큰스님’을 찾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로 간 어느 날 셋은 밤새 술을 마시고는 바람결에 들었던 한 은둔승을 찾아갔다. 비가 흩날려 질척거리던 산길을 겨우 오르자 간판도 법당도 없는 초라한 토굴이 나왔다. 스님은 라면을 끓여 왔다. 객들이 신발에 묻혀온 진흙들로 멍석도 질척거렸다. 멍석 위에 놓인 스님 앞의 라면 그릇이 엎어져버렸다. 그런데도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라면을 두 손바닥으로 쓸어 모아 다시 그릇에 담았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라면을 먹었다. 불경에서 본 ‘불구부정’(不垢不淨·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본래 없음)이었다. 쇼핑하듯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시비하고, 세상사나 탓하던 젊은 객들의 악취마저 은둔승은 흔쾌히 마시고는 향내를 피워냈다. 토굴을 나온 그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셋 모두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아래 삼거리에서 셋은 헤어져 모두 출가했다.
그는 ‘별’들의 형님이다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
무엇이든 들어주는 ‘예스 스님’이다
그들이 출가 전 자기 모습 같단다
10대 때 권투선수 하다 뼈 다쳐 방황
20대는 반은 건달인 ‘반달’
30대 중반에 산속 움막 짓고 주역 공부
우여곡절 끝에 출가해 포교당 맡아
조폭까지 협박하는 빚더미에 파산
스트레스로 대장암 4기
권투 하던 배짱으로 병마 물리쳐
시신도 장기도 기증
가해자-피해자 가르면 범죄 더 악랄
남의 고통이 내 고통임을 깨닫게 육허 스님이 찾아간 곳은 충남 금산 대둔산의 도인이라는 태고사의 노승 도천 스님이었다. 금강산에 출가해 평생 노동 속에서 수도해온 도천 스님을 시봉하며 2년을 지냈다. 그러다 인연 따라 광주 무등산 보현사를 거쳐 경기도 광명 도심 포교당에서 고용 스님으로 부전을 살았다. 무리하게 빚을 내 포교당을 연 주지가 구속되면서 그가 뜻하지 않게 절을 떠안게 됐다. 그는 그곳에서 영등포교도소와 5공수부대에 나가 사회 포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 걸리듯 걸린 빚이 그를 조여왔다. 조직폭력배들까지 협박해왔다. 그는 포교당이고 뭐고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러나 이미 법당에 조성된 천불(1천 불상)을 두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불상들을 고물상에 팔아버리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광명의 포교당에서 빚잔치를 하고 서울 금천구의 허름한 포교당으로 천불을 옮겼다. 이사업체를 부를 돈도 없어서 1층부터 4층까지 천불을 손수 져 날랐다. 그날 밤 얼마나 힘들고 서럽던지 밤새 울었다. 대장과 직장 대부분과 간 30% 절제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결국 몸에 사달이 났다. 그는 2007년 대장암 4기 선고를 받았다. 1차 수술에서 의사는 아기 머리통만한 암이 골반에 떡처럼 박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다며 그냥 덮었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만이라도 출가자답게 마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발심했던 오도암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기도하며 몸을 벗을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시보다 생생한 꿈을 꿨다. 자기가 죽어 병풍 뒤에서 향내를 맡고 있는데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중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쉰도 못 돼 저런 몰골로 죽는다는 말이야”라는 비아냥이었다.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선 후생조차 기약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암전문병원으로 가 떼를 썼다. 의사는 암 절제에 성공한다 해도 휠체어를 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재검진에서 암은 이미 직장과 간과 림프까지 번졌다고 했다. 천행으로 골반에 박힌 암 제거에 성공했다. 그러나 4번의 수술로 대부분의 대장과 직장, 간 30%와 림프까지 절제하고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퇴원해서는 양쪽 옆구리에 장루(인공항문)와 항암제를 찼다. 허약해진 그는 겨우 일어나도 한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미음을 먹어도 모두 토했다. 그런데도 교도소와 군부대 법회엔 가겠다고 우겼다. 법회를 가기 위해 한술이나마 미음을 넘겼고, 기다시피 교도소로 향했다. 학교 운동장에 나가 운동도 시작했다. 처음엔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그러나 권투를 하던 배짱으로 병마와 싸웠다. 결국 몇 달 뒤엔 관악산 정상까지 48분 만에 뛰어오를 수 있었다. 평생 달고 다녀야 한다는 장루까지 떼어냈다. 최상도 최하도, 상하좌우도 없는… 그가 죽음에서 기어나와 예닐곱명의 지인들과 함께 시작한 게 <금강경> 법회였다. 매달 한 번씩 열린 법회에서 승가대도 강원도 다닌 적 없던 ‘반달 스님’은 독특한 해석을 내놓곤 했다. 가령 ‘아뇩다라삼보리’(무상정등정각)는 통상 ‘최고의 깨달음’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최상이라는 게 본래 없다. 최상이라고 하면 벌써 상(相)에 걸린 것이다. 최상도 없고, 최하도 없다. 상하가 없고, 좌우가 없고, 너와 내가 없으니 이름하여 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재소자 교화에도 ‘불이’(너와 내가 둘이 아님)법이 절실하다고 한다. 범죄자를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인간말종시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려고만 들면, 범죄는 진화하고 더욱 악랄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둑이 외아들 대학 등록금을 훔쳤는데, 아들이 그 돈을 소매치기 당하면 그 도둑 심정이 어떠겠는가”라고 물으며, ‘타인의 고통이 내 고통임’을 깨닫게 했다. 전국의 교도소에서 별들과 절친이 되다보니, 지난번 법회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 집에 들어온 강도가 돈을 챙긴 뒤 딸을 겁탈하려다 벽에 길린 동국선원의 달력에 적힌 ‘육허 스님’이란 글씨를 보고, “육허 스님을 아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허 스님이 교도소 가신다면 떡을 해서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했더니, 훔친 돈까지 놓고 인사를 하고 도망가더라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이 있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연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금강경> 한 품씩 매달 1회씩 32품을 끝내고, 그가 맨 먼저 한 것은 시신 기증과 장기 기증이었다. 함께 공부한 사람들도 따라 했다. 법회에 빠지지 않았던 조각가 현공은 오는 3월 출가하기로 했다. 불교계에선 화가로 이름이 알려진 부친 무공스님이 열반한 뒤 절까지 빼앗기고 쫓겨나 한 때 원한에 사무치기도 했던 현공은 “스님과 함께 금강경을 공부한 뒤 원한이 쉬어지고, 내가 그 절에서 나올 때가 되어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공부를 시켜준 그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요즘은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육허 스님은 최근 남양주시 화도읍 달매산 정상의 기증받은 땅에 약사여래불을 다음달까지 모신다. 모든 중생들의 병 치료를 기도하기 위해서다. 아픈 이들이 스님 눈치볼 필요도 없이 자기 기도만 하고 가는 기도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생엔 가난한 집에 태어나 의사가 된 뒤 출가해 출가자로서 몸과 마음의 병을 동시에 치료해주고 싶다는 서원을 세웠다. “왜 하필 가난한 집이냐”고 묻자 “부잣집에 태어나면 나태해져서 출가 같은 건 생각지 않을 것 같아서”란다. 몸과 마음을 비워 더욱 가벼워진 그가 날다람쥐처럼 산을 오른다. 병조차 애초 없었던 것인가. 남양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
무엇이든 들어주는 ‘예스 스님’이다
그들이 출가 전 자기 모습 같단다
10대 때 권투선수 하다 뼈 다쳐 방황
20대는 반은 건달인 ‘반달’
30대 중반에 산속 움막 짓고 주역 공부
우여곡절 끝에 출가해 포교당 맡아
조폭까지 협박하는 빚더미에 파산
스트레스로 대장암 4기
권투 하던 배짱으로 병마 물리쳐
시신도 장기도 기증
가해자-피해자 가르면 범죄 더 악랄
남의 고통이 내 고통임을 깨닫게 육허 스님이 찾아간 곳은 충남 금산 대둔산의 도인이라는 태고사의 노승 도천 스님이었다. 금강산에 출가해 평생 노동 속에서 수도해온 도천 스님을 시봉하며 2년을 지냈다. 그러다 인연 따라 광주 무등산 보현사를 거쳐 경기도 광명 도심 포교당에서 고용 스님으로 부전을 살았다. 무리하게 빚을 내 포교당을 연 주지가 구속되면서 그가 뜻하지 않게 절을 떠안게 됐다. 그는 그곳에서 영등포교도소와 5공수부대에 나가 사회 포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 걸리듯 걸린 빚이 그를 조여왔다. 조직폭력배들까지 협박해왔다. 그는 포교당이고 뭐고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러나 이미 법당에 조성된 천불(1천 불상)을 두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불상들을 고물상에 팔아버리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광명의 포교당에서 빚잔치를 하고 서울 금천구의 허름한 포교당으로 천불을 옮겼다. 이사업체를 부를 돈도 없어서 1층부터 4층까지 천불을 손수 져 날랐다. 그날 밤 얼마나 힘들고 서럽던지 밤새 울었다. 대장과 직장 대부분과 간 30% 절제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결국 몸에 사달이 났다. 그는 2007년 대장암 4기 선고를 받았다. 1차 수술에서 의사는 아기 머리통만한 암이 골반에 떡처럼 박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다며 그냥 덮었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만이라도 출가자답게 마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발심했던 오도암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기도하며 몸을 벗을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시보다 생생한 꿈을 꿨다. 자기가 죽어 병풍 뒤에서 향내를 맡고 있는데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중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쉰도 못 돼 저런 몰골로 죽는다는 말이야”라는 비아냥이었다.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선 후생조차 기약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암전문병원으로 가 떼를 썼다. 의사는 암 절제에 성공한다 해도 휠체어를 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재검진에서 암은 이미 직장과 간과 림프까지 번졌다고 했다. 천행으로 골반에 박힌 암 제거에 성공했다. 그러나 4번의 수술로 대부분의 대장과 직장, 간 30%와 림프까지 절제하고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퇴원해서는 양쪽 옆구리에 장루(인공항문)와 항암제를 찼다. 허약해진 그는 겨우 일어나도 한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미음을 먹어도 모두 토했다. 그런데도 교도소와 군부대 법회엔 가겠다고 우겼다. 법회를 가기 위해 한술이나마 미음을 넘겼고, 기다시피 교도소로 향했다. 학교 운동장에 나가 운동도 시작했다. 처음엔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그러나 권투를 하던 배짱으로 병마와 싸웠다. 결국 몇 달 뒤엔 관악산 정상까지 48분 만에 뛰어오를 수 있었다. 평생 달고 다녀야 한다는 장루까지 떼어냈다. 최상도 최하도, 상하좌우도 없는… 그가 죽음에서 기어나와 예닐곱명의 지인들과 함께 시작한 게 <금강경> 법회였다. 매달 한 번씩 열린 법회에서 승가대도 강원도 다닌 적 없던 ‘반달 스님’은 독특한 해석을 내놓곤 했다. 가령 ‘아뇩다라삼보리’(무상정등정각)는 통상 ‘최고의 깨달음’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최상이라는 게 본래 없다. 최상이라고 하면 벌써 상(相)에 걸린 것이다. 최상도 없고, 최하도 없다. 상하가 없고, 좌우가 없고, 너와 내가 없으니 이름하여 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재소자 교화에도 ‘불이’(너와 내가 둘이 아님)법이 절실하다고 한다. 범죄자를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인간말종시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려고만 들면, 범죄는 진화하고 더욱 악랄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둑이 외아들 대학 등록금을 훔쳤는데, 아들이 그 돈을 소매치기 당하면 그 도둑 심정이 어떠겠는가”라고 물으며, ‘타인의 고통이 내 고통임’을 깨닫게 했다. 전국의 교도소에서 별들과 절친이 되다보니, 지난번 법회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 집에 들어온 강도가 돈을 챙긴 뒤 딸을 겁탈하려다 벽에 길린 동국선원의 달력에 적힌 ‘육허 스님’이란 글씨를 보고, “육허 스님을 아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허 스님이 교도소 가신다면 떡을 해서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했더니, 훔친 돈까지 놓고 인사를 하고 도망가더라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이 있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연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금강경> 한 품씩 매달 1회씩 32품을 끝내고, 그가 맨 먼저 한 것은 시신 기증과 장기 기증이었다. 함께 공부한 사람들도 따라 했다. 법회에 빠지지 않았던 조각가 현공은 오는 3월 출가하기로 했다. 불교계에선 화가로 이름이 알려진 부친 무공스님이 열반한 뒤 절까지 빼앗기고 쫓겨나 한 때 원한에 사무치기도 했던 현공은 “스님과 함께 금강경을 공부한 뒤 원한이 쉬어지고, 내가 그 절에서 나올 때가 되어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공부를 시켜준 그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요즘은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육허 스님은 최근 남양주시 화도읍 달매산 정상의 기증받은 땅에 약사여래불을 다음달까지 모신다. 모든 중생들의 병 치료를 기도하기 위해서다. 아픈 이들이 스님 눈치볼 필요도 없이 자기 기도만 하고 가는 기도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생엔 가난한 집에 태어나 의사가 된 뒤 출가해 출가자로서 몸과 마음의 병을 동시에 치료해주고 싶다는 서원을 세웠다. “왜 하필 가난한 집이냐”고 묻자 “부잣집에 태어나면 나태해져서 출가 같은 건 생각지 않을 것 같아서”란다. 몸과 마음을 비워 더욱 가벼워진 그가 날다람쥐처럼 산을 오른다. 병조차 애초 없었던 것인가. 남양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육허 스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108배를 올린다.
육허 스님이 금강경 법회에 참석했던 제자 현공(왼쪽)과 학비를 도와주고 있는 승가대 비구니 스님 등과 차담을 나누고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