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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인간·사회 동시에 바꿔 갈등 끝내고 상생으로”

등록 2017-03-15 10:55수정 2017-03-15 11:17

[조현 기자의 휴심정]
아들 이동준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말하는
‘새 시대 나침반’ 정역의 대가 학산 이정호

정역 연구의 대가였던 아버지 학산 이정호에 대해 회고하는 이동준 교수.
정역 연구의 대가였던 아버지 학산 이정호에 대해 회고하는 이동준 교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앞두고 ‘탄핵 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이들이 흔든 태극기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박정희 정권 때 정부의 초대로 일본의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 대표단이 방문했을 때다. 북녘의 인공기와는 다른,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을 보고 대표단이 태극기의 의미를 물었다. 그러나 정부부처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령의 최고 석학들만 모인 학술원에 문의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한국철학자 류승국(1923~2011)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류승국은 “우주 만유의 근원이 태극이고, 우주의 중심이 나의 중심이요, 나의 주체가 즉 남의 주체이므로 남의 인권도 내 인권처럼 존중해야 한다는 원리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로 인해 불과 50대 초반의 류승국이 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됐고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냈다.

류승국은 젊은 시절부터 기독교 영성가 유영모와 교유했고, 성철 스님과는 3개월간 함께 참선하기도 했다. 그가 타계하기 1년 전에 인터뷰를 했다. 그에게 “누가 가장 그리운가”라고 묻자 그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다 두고 학산 이정호(1913~2004)라고 답했다.

학산은 세인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그가 광화문광장에 서 있는 성군 세종대왕과 성웅 이순신이 탐구했던 역(易) 연구에 진력해 구시대의 봉건질서를 파하고, 상생의 새 시대를 열어젖힐 희망의 ‘역’을 주창했다는 것은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훈민정음의 음양오행 원리 드러내

‘역’(역경 혹은 주역)은 공자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었다는 동양고전의 으뜸이다. 23전 전승의 전과를 올린 이순신이 아침마다 친 것이 바로 그 주역 점이었다. 또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가 바로 ‘역’의 음양오행에 따른 것이라는 게 1940년대에야 발견된 해례본에 나온다. 이를 명확히 세상에 드러낸 인물이 바로 학산이다.

학산 이정호.
학산 이정호.
그의 노작을 하나로 묶은 <학산 이정호 전집>(아세아문화사 펴냄)이 출간됐다. 무려 13권이다. 지난 5~6년 이 작업에 매달려온 이동준(80)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성균관대 교수와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소장 등을 지낸 그는 학산의 4남매 중 장남이다. 그는 학산과 류승국의 제자이기도 하다. 학산을 보낼 때는 류승국이 장례위원장을, 류승국을 보낼 때는 이 교수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경기도 과천시 주택가에 있는 집으로 그를 찾았다. 학산 부부가 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학산은 <정역>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왔다. 정역은 동양사상의 뿌리인 주나라 역인 주역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한 김일부(본명 김항·1826~1898)에 의해 제시된 새 시대의 역이다.

한글학자(국어국문학)였던 학산은 해방 전후 김일부의 정역을 보고는 30살 무렵 자신의 행로를 철학으로 선회했다. 청주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공부한 학산은 일제에 의해 조선어 학습이 금지될 때까지 조선어 선생을 하고, 해방 뒤엔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가르쳤다.

“해방이 되자 일석 이희승 선생께서 3번이나 찾아와 서울대에 국문학과를 함께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때 호응했다면 서울대 교수로, 국문학자로 존경받으며 일생을 편히 살았을 텐데….”

서울대 교수로 편히 살았을 기회도

이 교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굳이 험로를 택한 부친을 회고했다. 학산은 동양철학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1944~46년엔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인체 해부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홀연히 계룡산 중턱 외딴집에서 들어가 김일부의 조카 덕당 김홍현에게 정역을 전수받고, 3년간 연구에 몰두했다. 전공을 바꾸어 학문에 매진하느라 집 한 칸이 없던 그가 충남대 교수로 간 것도 4남매와 함께 머물 관사가 제공되어서였다. 그 이후에도 계룡산 국사봉 아래 김일부가 도를 닦던 향적산방를 마련해놓고, 수업이 없을 때는 주로 그곳에서 연구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4·19혁명 뒤 5·16쿠데타로 물러날 때까지 민선 충남대 총장직을 지내긴 했지만, 평생 관직에도, 저술에도 관심 없이 연구만 하신 분이다.”

주역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한
조선 말 김일부의 정역 보고

한글학자에서 철학으로 행로 선회
계룡산 들어가 3년간 공부 몰두

한때 대학 총장도 했지만
관직도 저술도 관심 없이 연구만

“강자가 약자 억압, 차별의 시대에서
천하가 한가족이 되는 대동세계로”

민족종교들이 잘못 이용해
폐쇄적 민족주의로 폄훼되기도

자식들 종교도 간섭하지 않아
유학-기독교신학-불교학 제각각

학산의 삶을 뒤바꾼 정역은 김일부가 18년의 구도 끝에 깨달음을 얻고 내놓은 새로운 역이다. 공자가 이상적인 나라로 여긴 ‘주나라’의 역인 주역이 선천시대의 지도였다면, 후천시대의 지도를 새로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감히 공자도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해설에 그칠 만큼 성군 복희와 문왕이 그린 지도 격인 ‘괘도’를 바꾼 데 대한 기존 유학계의 반발이 컸다. 이에 대해 류승국은 “그렇지, 성인은 중국땅에서만 나는 법이니까”라며, ‘학문적 사대주의’를 힐난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50여년 동안 연구한 ‘김일부의 정역’ 연구에 매진한 부친 학산의 논리를 요약했다.

“후천시대는 자연, 인간,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시기다. 따라서 천지가 변화해 이전투구와 상극의 갈등시대가 끝나는 개벽으로 상생의 시대가 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대인과 군자가 되는 인간혁명과 사회개혁을 동시에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남성이 여성을, 강국이 약소국을 억압하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음을 억압하고 양을 높임)의 차별시대가 ‘조양율음’(調陽律陰·음과 양이 조율)의 화합시대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나라와 나라가 대결하고 민족과 민족이 투쟁하는 선천(구시대)에서 천하가 한 가족이 되는 대동세계로 변모한다. 상하질서를 강조하는 봉건시대가 평등의 소통시대로 바뀐다는 것이다. 또한 정역팔괘도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간방이 중심으로 변화되면서, 가을결실기가 도래함에 따라 우리나라가 이런 세상 변화의 주역을 담당하게 된다고 한다.

송곳니든 어금니든 각자 제 몫을”

이런 정역의 논리를 민족종교들이 활용하면서 ‘폐쇄적 민족주의’로 폄하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학산은 김일부가 어떤 종교도 창시한 적이 없었다고 했고, 자신도 폐쇄적 민족주의를 타파하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학산은 자식들의 종교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교수는 유학을 공부했지만 여동생은 기독교 신학을 했고, 남동생은 불교학도가 됐다. 이 교수 자신도 자식이 혼인을 두고도 주역 점을 치는 법이 없다고 한다.

이 교수는 학산과 류승국의 뒤에 서는 겸양으로 일관하지만, 그도 공자 선양작업의 일환으로 만든 중국인민대학 공자연구원의 국제학술회의 거의 매년 초청받아 치사와 축사를 하는 유학계의 국제적 원로다. 그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경제 보복과 관련해 맹자의 ‘인자위능이대사소’(仁者爲能以大事小)의 고사를 들어 “오직 인자만이 대국으로서 소국을 잘 도와줄 수 있다”며 “공자와 맹자를 따른다면 대국의 힘만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조를 보더라도 시대의 전환기에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하면 패망에 이르는 것”이라며 “어금니든 송곳니든 앞니든 각자가 제 몫을 해내 희망의 시대를 열 것”을 당부했다.

<학산 이정호 전집> 출판기념회는 25일 오후 3~7시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 6층 첨단강의실에서 열린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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