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경기도 여주 천덕산 해월 묘소에서 해월 순도 120돌을 맞아 참례식이 거행되고 있다.
우리 민족 근현대 고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해월 최시형(1827~1898)과 만난다. 고난사 만이 아니다. 기득권의 부패와 차별과 불평등에 맞선 저항과 투쟁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촛불-6·10항쟁-광주항쟁-4.19-독립운동-3·1운동-동학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해월이 있다. 이와는 결이 다른, 비폭력·평화·생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그를 만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개벽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지난 2일은 해월이 관에 의해 처형된 지 120돌이 된 날이었다. 해월은 1861년 35살에 천도교(동학)에 입도해 2년 만인 1863년 37세에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 받았다. 1년 뒤인 1864년 수운이 처형을 당하자 동학 최고 지도자가 되어 72세로 순도할 때까지 평생 쫓겨 다니며 개벽 세상을 열었다.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무려 200곳을 옮겨 다녀 ’최보따리’로 불린 해월의 발자취를 찾았다. 해월 순도 120돌을 맞아 천도교가 연 1~2일 ’동학기행’ 동행이었다.
아직도 소 쟁기로 밭 가는 오지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는 해월이 관군의 검거를 피해 1871년 숨어든 곳이다. 해발 750미터의 밭들이 비탈져 아직도 쟁기로 밭을 가는 모습이 보인다. 해월은 처음 두위봉에 있는 호굴에 숨었다. 쟁기질을 하던 이철규(59)씨가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한 호굴은 비를 피해 능히 10명이 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호굴은 호랑이굴의 줄임말이다. 관군이 검거하러 왔을 때 굴 입구를 호랑이가 지키고 있어 해월을 검거하지 못하고 두려워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해월은 굴에서 내려와 이 마을에 1년을 머물렀다. 이때 한 설교가 유명한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법’인 대인접물(待人接物)이다. 해월은 사람을 다룰 때 ‘남의 악은 감추어 주고 선을 드러내 주라’고 했다. 또 사물에 대해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내 몸같이 아끼라’고 했다. 이 마을 36가구 57명 가운데 천도교인은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순례객을 맞이하는 마을의 인심이 남다르다. 윤경섭(54)이장이 마을회관으로 이끌어 음료수를 대접한다. 마을엔 멋진 회관이 지어지고 있다. 윤 이장은 “단 500만원으로, 마을분들이 자기 산의 나무를 베어오고 울력 봉사를 해 한옥으로 마을회관을 짓고 있다”며 “요즘 세상에 이런 인심과 협력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자랑했다.
교조 최제우로부터 도통 전수 이후
30여년 보따리 하나로 200곳 떠돌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내 몸같이’
비폭력·평화·생명 설파하며 실천
은신처 영월 직동리 두위봉 호굴
관군도 호랑이 무서워 되돌아 가
체포된 원주 송골 ‘모든 이웃 벗’ 비석
민주화·생명운동 장일순 선생 등 세워
처형 당한 뒤 광희문-송파 거쳐
몰래 여주 천덕산 중턱으로 옮겨
흙이 드러난 민둥봉분 앞 참배하며
“링컨·간디는 알아도 해월은 잊혀져”
무위당 장일순 선생 등이 해월을 기리며 강원도 원주 송골에 세운 추모비 옆에 ’무위당사람들’ 김용우 이사가 서있다
가톨릭 신자면서도 정신적 스승으로
이어 간 곳이 강원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다. ’송골’로도 불린 이곳은 해월이 1898년 4월5일 관헌에게 체포된 곳이다. 이 마을엔 당시 해월이 머문 원진여의 집이 복원돼 있다. 큰 길가엔 ’무위당 장일순’(1924~94) 등이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비엔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을 기리며’라고 쓰여있다. 장일순은 1970년대부터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민주화 운동을 했고, 1977년부터 생명살림 운동을 전개해 현재 유기농생산물 생산자 소비자 조직인 ’한살림 생협’을 세웠다.
장일순 선생을 모시고 활동했던 ’무위당사람들’ 김용우(55)이사는 “장 선생은 생전에 집안에 오는 모든 사람을 하늘처럼 공경했던 할아버지 장경호와 서화를 가르쳐준 차강 박기정, 그리고 해월 세 분만을 스승으로 언급했다”면서 “두 분은 직접 모신 분이지만, 해월은 뵙지 못했으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아 스승으로 모셨다”고 전했다. 장일순이 평생 가톨릭을 믿으면서도 해월을 정신적 스승으로 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장 선생이 1945년 경성공업전문대(서울대 공대 전신)에 합격했으나 총장에 미군 대위를 임명하는 것에 반대해 제적 당하고 원주에 내려와 1년간 서점주인 오창세 선생으로부터 동학을 공부했다”면서 “독재시대 투쟁을 거치며 누군가를 패배시키고 배제하는 서양사상에 한계를 느껴 1977년 획기적 회심을 통해 생명사상운동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윤 이사는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해월의 정신을 다시 살려낸 것만으로도 장 선생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평한다”면서 “장 선생의 뜻에 따라 지금도 해마다 여주 천덕산에 있는 해월의 묘소에 참배를 가는데, 원주의 치악산을 바라보고 있는 해월의 묘소를 볼 때마다 해월이 장 선생으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고손자·해외교포 등 300여명 참례식
해월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버스 정류장에서 1시간 가량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해발 550미터 천덕산 중턱에 있다. 살아서도 평생 쫓겨 다니던 삶은 죽어서도 그랬다. 해월은 처형 당한 뒤 서울 광희문 밖에 임시로 매장됐다. 이를 동학교도들이 한강 건너 송파로 옮겨 묻었으나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한 땅 소유주의 요청으로 제자들이 다시 유골을 수습해 한밤 중에 길도 없는 첩첩 산을 넘어 이곳에 안장했다고 한다.
나이 든 교도들이 아래서부터 뗏장을 봉투에 담아 땀을 뻘뻘 흘리며 산길을 올아간다. 해월 묘는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 뗏장이 벗겨져 빨간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갓 태어난 생명체인 핏덩이 같다. 그나마 2일 오전 11시 순도 120돌을 맞은 ‘참례식’엔 300여명이 올라와 고적한 묘소가 모처럼 북적였다. 해월의 고손자인 최인경씨를 비롯한 후손들도 자리했다. 더구나 천도교인들이 아닌 이들도 적지 않았다. 동학의 생명 존중 사상을 공부하는 ’서울동학’의 김기준 ‘우이령사람들’ 이사와 소리꾼 임진택씨 등 회원 40여명은 버스 한대를 빌려 왔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온 마가렛 김은 “미국에서 평화운동을 하면서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동학을 만나 우리 민족과 민주주의 뿌리임을 확신해 이를 교포 2세·3세들에게 전해주는 인내천운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천도교 이정희 교령은 “우리 국민조차 노예해방을 한 링컨이나 비폭력운동가 간디는 알아도, 모든 차별 철폐에 앞장서면서도 비폭력 평화 생명살림 정신으로 일관한 해월은 모르고 있어 안타깝고, 스승께 죄송스럽다”며 해월 묘소에 고개를 숙였다.
영월·원주·여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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